우리 가운데 거하신 예수님
요한복음 1장 1-14절
예전 같으면 학교들은 이미 방학을 했고 교회에서는 아이들이 성탄축하잔치를 위해 붐볐을 텐데 요즘은 학교가 성탄절이 지나고 나서 방학을 하는 곳이 많아 시끌벅적하던 성탄의 모습은 추억이 되고 말았습니다. 거리도 조용하고 교회도 조용합니다. 이젠 적응이 될 때도 되었는데 그렇게 되질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성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도 너무 차분해서 뭔가 허전하고 아쉽습니다.
이 성탄의 때에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데로 요한복음의 시작부분입니다. 이 부분은 아주 놀라운 이야기를 해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주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듣는 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1절과 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 기록한 책입니다. 구약은 오실 예수님에 대해, 신약은 오신 예수님에 대해 기록한 책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에 대해 쓴 책들 중에 특별히 예수님의 생애에 대해 기록한 책이 있습니다. 그것을 복음서라고 합니다. 복음서는 네 권인데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입니다. 이렇게 네 권의 복음서는 또 둘로 나누어집니다.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입니다.
공관복음은 요한복음을 제외한 세권을 일컫는 말입니다. 공관복음이란 관점이 같다는 말입니다. 세 권은 모두 예수님을 인간이란 관점에서 기록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내용도 많이 다를 뿐 아니라 하나님이란 관점에서 기록합니다.
이렇게 복음서 저자들이 예수님에 대해 각각 다르게 묘사했는데 마태복음은 왕이신 예수님으로, 마가복음은 종이신 예수님으로, 누가복음은 인간이신 예수님으로 묘사했습니다. 그리고 이미 말씀 드렸지만 요한은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요한이 이렇게 예수님에 대해 하나님이라고 기록한 이유는 요한이 복음서를 기록할 당시는 로마 황제 도미티아누스가 황제숭배를 적극적으로 강요할 때였습니다. 이러한 때 성도들은 황제숭배를 거부했고 그 결과 많은 사람이 순교했습니다.
요한은 이러한 때에 황제가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알려 주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처음 시작부터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태초에”라는 말은 창세기 1장 1절에도 사용된 말입니다. 이렇게 시작함으로 피조물이 있기 전에 먼저 계셨던 분이 하나님이신 예수님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태초에 말씀이 있었고, 이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이 말씀은 하나님 자신이었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예수님은 태초부터 계신 분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예수님은 창조주라고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만물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헬라어 원문을 보면 “만물”에 해당하는 단어로 “판타”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단어 앞에 관사가 없습니다. 관사가 없다는 말은 어느 한 시점에 국한되거나 한정된 것이 아니고 전 우주적인 만물을 의미합니다. 과거, 현재, 미래에 존재하는 전 우주입니다.
따라서 이 용어는 역사와 더불어 존재하는 만물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1장 16절과 17절에서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본문에서 말씀 한 대로 “말씀으로 말미암아” 세상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말씀으로라고 할 때 도구이면서 예수님 자신을 의미합니다.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라는 말씀을 읽은 대로입니다.
이렇게 태초부터 계시고 말씀이신 예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한 요한은 이제 다른 모습으로 예수님을 묘사합니다.
4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그 안에 생명이 있다고 합니다. 당연히 그 안은 “예수님 안에”입니다.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이 생명은 육체의 한계에 갇힌 생명이 아닙니다. 이 생명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 영원한 생명이 예수님 안에 존재한다고 요한은 말합니다. 본문은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다고 말하지만 14장 6절에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생명 자체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생명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자들 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자신이 쓴 다른 성경인 요한일서 5장 11절과 12절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모든 자에게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이 땅에서 잠시 있다가 끝나는 유한한 생명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은 사망의 세력을 이기고 이미 천국의 생명을 누리고 있는 자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살아야 합니다.
요한은 11장에서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그의 누이 마르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라”(요11:25,26)라고 말입니다.
이 말은 두 가지 생명을 말합니다. 하나는 육적 생명의 죽음 후에 생명과 이미 우리 안에 있는 생명에 대해서 말합니다. 먼저 말했던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고 한 말인데 이 말은 이미 주 안에 죽은 자들의 부활을 말한 것이고 이어지는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혼이 생명을 얻은 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죽음 앞에서 자신은 “생명의 약속을 받았다”(딤후1:1)라고 하였고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지켜 주실 것(빌1:6)이라고 확신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것으로 영생을 얻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행위로도 얻을 수 없고 다른 신이나 종교로도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생명을 얻는 유일한 길은 오직 어린양이신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의 더러운 옷을 빠는 것(계7:14) 밖에 없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은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참되고 영원한 생명이 곧 인류에게 임할 참빛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은 4절 말씀에서 언급한 “생명과 빛”을 요한복음과 요한서신에서 아주 많이 사용합니다. 이렇게 많이 거론하고 있는 생명과 빛은 하나님 안에 있는 고유적 속성인 것입니다. 누구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천인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36편 9절은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생명과 빛으로 오신 예수님에 대해 세상은 어떻게 반응하는지 5절에서 말씀합니다.
5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빛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을 본문은 “빛이 어둠에 비추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땅은 어두움이었습니다. 사탄의 권세 아래 있어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존재들이었습니다. 인간은 아담의 범죄로 인해 에덴에서 쫓겨나 하나님을 찾을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냥 죽은 존재였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오늘 말씀으로 하면 어둠 자체였는데 빛이 비춘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고 한 것을 여러 번 기록하고 있습니다. 8장에는 현장에서 간음하다가 붙잡혀 온 여자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주님은 그를 고발하는 자들에게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그들은 모두 물러갔고 주님도 그 여인을 용서하시면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신 후에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8:12)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9장에서는 소경을 고쳐주셨는데 그를 고치시기 전에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요9:5)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죄라는 어둠을 속에 사로잡혀 사는 자들의 빛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는 어둠 가운데 있지 않고 빛을 받아들이고, 빛의 자녀로, 빛을 발하며 살게 하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알지 못했고 영접하지 못했습니다.
6절부터 11절까지 같이 읽겠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사람들이 생명과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세례 요한을 먼저 보내서 그 길을 예비하였습니다. 이미 말라기 4장 5절과 6절에서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라고 하였는데 그가 요한이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요한을 빛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빛이 아니라 이 빛 즉, 예수님을 증언하러 온 자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미리 보내심을 받아 예수님을 소개했던 세례 요한의 증언을 들어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세상의 창조주이자 타락한 세상을 구원하실 예수님에 대한 세상의 무지를 보여줍니다. 어둠에 잠긴 죄악 된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예수는 목수의 아들(마13:55)이었으며 귀신들린 자(마12:24; 막3:22)에 불과하였습니다. 더구나 예수를 따르던 군중들도 예수를 기적을 행자는 자, 내지는 정치적 메시야로 판단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 얼마나 무지했는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죽기 전까지 끊임없이 예수님이 빛이라고 소개했고 자신은 그의 신발끈을 풀지도 못할 존재라고 해도 사람들은 세례 요한을 추종했습니다. 심지어 주님을 대적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들은 주후 3세기까지 존재했고 스승인 요한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요한의 제자들도 빛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했다면 다른 사람들이야 오죽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읽은 11절에서 아주 슬픈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다”고 말입니다.
주님은 “자기 땅”에 오셨고 “자기 백성”에게 오셨습니다. 그러나 배척 당하셨습니다. 심지어는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기까지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셨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그 관계는 과거의 사건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포도원 농부들의 비유를 통해 농부들이 자신의 아들을 죽인 것을 말하며 그들을 벌하시겠다는 비유를 할 정도였습니다.(마21:33-46)
33. 다른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거기에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34. 열매 거둘 때가 가까우매 그 열매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35.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
36.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그들에게도 그렇게 하였는지라
37.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이르되 그들이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38.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산을 차지하자 하고
39. 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
40.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그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41. 그들이 말하되 그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열매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
4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44.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45.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46. 잡고자 하나 무리를 무서워하니 이는 그들이 예수를 선지자로 앎이었더라
그래서 본문에 영접하지 않았다는 말은 헬라어로 “람바노”인데 이는 주로 개인적인 영접을 의미하는 데 비해 본문의 “파랄람바노”는 집단적 공동체적 영접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선민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환영받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요한은 “깨닫지 못하더라”(5절), “알지 못하였고”(10절), “영접지 아니하였더라”라는 세 구절을 통하여 창조주이신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배척한 이세상의 죄악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사 1:3)라는 과거 이스라엘의 상태를 기억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마 23:37)라고 탄식했으며, 스스로 선민이라 자부하던 자들을 “마귀의 자식”(8:44)이라고 선언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영접하지 않는 세상에 요한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요구하고 있습니다.
12절부터 14절까지 같이 읽겠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생명으로,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겠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요한은 말씀에서 생명으로, 생명에서 빛으로, 그리고 빛에서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으로 의미를 확장하여 완성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 가운데 영원히 계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이 세상에서 이루어졌으며, 우리 인간들 속에 영원히 거하시는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은 “천막을 치다”란 뜻의 “에스케노센”을 사용함으로써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잠시 들르신 것이 아니라 거주 하고 있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죽으시기 전에 성령을 예언하시며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14:16)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안에 영원히 거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명과 빛으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주님께서 하늘 보좌 버리시고 온 사건이 바로 탄생의 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빌립보서 2장 6절부터 8절에서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라고 하셨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에 대해 히브리서 2장에서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9절)라고 하였고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14,15절)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18절)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주님의 탄생은 세상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하늘엔 영광 땅에는 평화”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거짓입니다. 왜냐하면 하늘엔 영광이 맞지만 땅에는 평화가 아닙니다. 주님은 스스로 당신이 오신 목적을 말하면서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10:34)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오신 것은 한쪽에는 평화지만 다른 한쪽에는 검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른 한 쪽은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은 생명이고 빛이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기에 평화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하늘엔 영광 땅에는 평화”라고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눅2:14)라고 하였습니다. 땅에는 한정 된 사람들에게만 평화입니다. 그 한정된 사람은 바로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에베서소 1장 4절과 5절의 말씀처럼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신” 성도들에게만 평화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 며칠 있으면 성탄절입니다. 비록 예수님께서 그날 태어나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날을 기억하며 예수님의 오심의 의미를 특별히 생각하는 시간인 만큼 이 기간에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묵상하고 깊이 감사하며 은혜를 입은 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는 한 주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