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84편 1절~12절 (복이 있나이다)
복이 있나이다
시84:1-12
우리는 2016년을 시작하면서 시편 1편을 통해 “복 있는 사람”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도 복에 대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은 시편 84편을 통해 “복이 있나이다”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려고 하는데 본 시를 쓴 시인이 간절히 원하는 복이 무엇인지 보면서 그 복을 함께 사모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먼저 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이 시를 쓴 이는 고라 자손입니다. 이들은 성전에서 노래하는 자들이었는데 시인은 이 글을 시작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라고 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장막이 사랑스럽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장막은 당연히 성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에게 있어 성전이 사랑스러운 것은 앞으로 보겠지만 그 외형 때문이 아닙니다. 시인에게 있어서 성전이 사랑스러운 것은 그곳이 하나님께서 임재하여 거하시는 처소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전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장막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것도 주의 장막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시인은 화려한 예루살렘 성전의 외형을 사랑스럽다고 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거하시는 만군의 여호와를 사랑스럽다고 한 것입니다. 얼마나 사모했으면 “사모하여 쇠약함이여”라고 하였을까요? 시편 119편 131절에도 시인은 “내가 주의 계명을 사모하므로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라고 고백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시인은 자신의 상태가 어떻게 되었는지 말해 주고 있습니다.
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시인은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의 궁정을 사모하여 병이 났다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궁정은 “하초체르”라는 말인데 이는 “뜰”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성전의 뜰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지성소에 들어간다는 말이 아니라 성전 앞마당으로 자신들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대한 경외심이 가득한 나머지 하나님의 성전 뜰에 이르러 그분을 경배하고자 소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병이 난 것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는 그 열망을 부르짖음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과 육체가 의미하는 전인격으로 하나님의 뜰을 사모하여 그곳에 서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죄인의 본성은 하나님의 뜰에서 하나님과 만나기를 원치 않습니다. 원한다면 그 분의 뜰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요구하고 그것을 얻으면 그 뜰을 떠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정말로 하나님을 만나길 원해 우리의 심령이 병이 날 정도입니까? 아니면 주님을 통해 얻기를 원하는 물질이나 성공에 목말라 병이 날 지경이십니까?
어제까지 청소년 집회를 하고 왔습니다. 마지막 말씀을 전하고 가방을 들고 나오는데 한 학생이 제 주변을 계속해서 서성거렸습니다. 직감적으로 제게 할 말이 있는 학생이라고 생각해서 그 학생에게 내게 할 말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학생이 저에게 생각날 때마다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랍니다. 그래서 뭐라고 기도해 줄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학생은 저를 놀라게 했는데 그 기도제목이 이제 고등학교를 진학하는 학생에게서 나올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 학생이 기도해 달라고 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죽지 않을 만큼의 고난을 주시도록” 기도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놀라서 왜 그런 기도를 해달라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학생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 고난이 아니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 수 없을 것 갔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평안한 삶을 통해서는 그냥 성경에 있는 하나님, 남들이 말하는 하나님 정도밖에 알 수 없기 때문이랍니다. 또한 그렇게 아는 하나님을 평생 섬길 자신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기도를 하겠답니다. 그 아이가 고난이 뭔지 몰라서 그런 기도제목을 내 놓았다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 학생은 제가 하나님을 만나야 된다고 한 설교를 듣고 만나고 싶어 기도한 후에 결론을 내고 제게 말한 것이기에 너무 귀하고 예뻤습니다. 그에게 죽을 만큼의 고난이 아니더라고 하나님을 진지하게 만나는 은혜가 있길 원합니다.
어떻습니까? 이 학생이 하나님의 궁정을 사모하는 마음이 느껴지셨습니까? 지금 시인은 하나님과의 만남과 교제를 온 인격을 다해 사모하고 바라며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인이 이렇게 하나님의 전을 사랑스러워하고 사모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3절과 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셀라)”
지금 시인은 하나님을 부를 때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절대적 권능자와 통치자로서 갈망하며 사모하는 마음으로 부르짖는 말인 것입니다. 특히 “나의 왕”이란 이스라엘에 왕이 있었지만 참된 왕, 통치자는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말입니다.
그런 절대적 통치자이신 하나님께 자신도 그 안에 거하게 하여달라는 강력한 요청으로 참새와 제비를 거론합니다. 참새와 제비를 언급한 것은 이것들은 싼값에 팔려지는 것으로 아주 하찮은 존재를 의미합니다. 참새도, 제비도 “얻고, 얻었나이다” 그러건만 자신은 “얻지를” 못하고 있다는 탄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인이 참새와 제비를 들먹이는 것은 이런 하찮은 존재들도 주의 제단에서 제집을 얻고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은 것처럼 자신도 그렇게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아담의 범죄로 에덴에서 쫓겨난 존재입니다. 그런 존재들에게 본능적으로 사모함이 있는 것은 다시 에덴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종과 민족들은 나름의 절대자와 안식을 찾아 헤매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런 인간들 중에 우리를 택해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여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은혜로 하나님을 알게 된 사람은 시편기자가 42편 2절에서 고백했던 것처럼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라고 탄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시인이 원하는 복을 말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읽은 대로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셀라)”라고 한 것입니다.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생각해 보면 시인은 “고라 자손”입니다. 그들은 성전에서 찬양하는 일을 맡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말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육체가 거하는 것이 아니라 온 맘과 영혼이 주님과 깊은 교제가 있기를 열망하고 있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라기서를 보면 말라기선지자는 백성들에게 “돌아오라”고 외칩니다. 이에 백성들은 “어떻게 돌아가냐”고 묻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물은 것은 자신들은 성전에서 예배하는데 돌아오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마음은 없고 몸만 와 있던 것입니다.
여기서 시인이 말하는 복은 히브리어로 “에셰르”라는 말입니다. 히브리어에 복이라는 단어는 대표적으로 “바라크”라는 말과 “에셰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라크는 하나님이 긍휼로 인간에게 주시는 복을 말하고 아셰르는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가질 때 주어지는 보상으로 내려지는 복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말한 복인 “에셰르”는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주시는 바라크의 복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얻을 수도 있고, 얻지 못할 수도 있는 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인이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다고 한 것은 그가 주의 성전을 사랑하고 그 안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자이기에 주님께서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복되도다”라는 에셰르의 복을 받기 위해 사람들은 어떤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복 있는 사람”, 곧 복된 사람은 “똑바로 가거나 걷는” 사람입니다. 말하자면 올바로 행하는 사람이 복을 받는 것입니다. 여기서 올바로 걷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여 그 안에 거하는 자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복을 구체화하여 본문을 말해 주었는데 5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4절에서 주의 집에 거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했는데 그 일의 시작을 본 절에서는 “주께 힘을 얻고”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의 집에 거하기 위해서는 주님께서 주시는 힘을 얻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그 결과 그의 마음에는 시온의 대로가 있습니다. 개역개정 성경에는 “시온의 대로”라고 하고 있지만 원어 성경에는 “시온”이란 말이 없습니다. “메실라”라는 히브리어로 단지 “대로”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왜 개역개정이나 몇몇 번역본에서 시온의 대로라고 했을까요? 그것은 성전을 향하여 난 길을 가기 때문에 시온의 대로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대로”라고 한 “메실라”라는 단어는 “쌓아 올리다”란 뜻인 “살랄”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이 “대로”는 자연적으로 다져진 길이 아니라 인공적으로 만든 길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성전을 향해 나아가는 자들에게 적용하면 그들은 성전으로 나아가기 위해 온갖 방해와 어려움을 극복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작부분에서도 성전을 사모하여 마음의 병이 생길 정도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이렇게 방해가 있다는 사실을 시인은 6절에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
시인은 성전으로 가는 길이 결코 순탄하지 않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그 길을 가리켜 “눈물 골짜기”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눈물 골짜기”는 히브리어로 “베아메크 하바카”라는 말로서 “바카의 골짜기”란 뜻입니다. 바카는 “울음”을 뜻하기도 하고 건조한 지역에서 자라는 발삼나무를 뜻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바카 골짜기란 말은 거칠고 물이 크게 부족한 곳임을 나타내줌과 아울러 고통스러운 곳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온으로 가는 길을 걷는 이들을 필연적으로 눈물 골짜기를 걷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주님도 그 길을 표현하시기를 “좁은 길”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마태복음 7장 14절에서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땅에서 주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길은 시인의 고백대로 “눈물 골짜기”입니다. 바울의 입을 빌리면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는 삶”인 것입니다. 다윗은 이 길을 시편 23편 4절에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 앞에는 평탄한 길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도리어 “눈물 골짜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할 각오를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사도행전 14장 22절에서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도의 길은 세상권세 잡은 사탄의 요구에 반대로 가기에 눈물 골짜기를 만날 수밖에 없는 길입니다. 그런데 너무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가 읽은 대로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라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의 길에 샘을 준비하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삼손이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목이 말라 죽을 위기에 있을 때 하나님은 샘을 터트려 목마름을 해결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나 광야를 지날 때 반석을 쳐서 물을 내 주신 분이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에 대로가 있는 자”는 어렵고 힘든 상황 속에서도 주님께서 샘처럼 솟아나는 은혜를 주심으로 기쁨과 생기가 넘치는 상황으로 변화시킨다는 사실입니다.
나아가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른 비는 10-11월에 내리는 비로써 밭의 파종과 경작을 가능케 하며 흔히 하나님의 은택으로 상징되어 사용되었습니다(신11:14; 약5:17). 그러니까 이 말씀은 하나님의 은총을 힘입어 복된 삶을 살게 될 것을 약속하고 있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렇게 비를 주시는 하나님은 때를 따라 열매를 맺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눈물의 골짜기를 지날 때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죽으시기 전날에 제자들에게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기신 주님께서 보혜사로 우리 속에 임하여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는 길이 눈물의 골짜기라도 두려움 없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눈물 골짜기를 지나는 자들의 결론을 7절에서 말씀해 주십니다.
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주의 전을 향하여 가는 자들은 그 길을 완성하는데 자력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힘을 얻고, 더 얻어”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길을 가는 자들은 주께서 주시는 힘을 한 번 얻은 것으로 부족한 것입니다. 위로부터의 계속적인 공급이 받아야 끝까지 갈 수 있고 보좌를 둘러서서 하나님의 얼굴을 뵙게 되는 것입니다.
계시록 7장에는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계 7:9-10) 라고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의 백성은 한번 은혜 받았다고 만족하면 안 됩니다. 주의 백성의 길은 매일 매 순간 주의 은혜를 받아야 갈 수 있는 길입니다. 말씀을 통해, 기도를 통해, 성도의 교제를 통해 은혜를 계속해서 공급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 길을 가고 주의 보좌 앞에서 큰소리로 찬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놀라운 영광을 바라고 있는 시인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8절과 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야곱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이소서 (셀라) 우리 방패이신 하나님이여 주께서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 보옵소서”
본 절에서부터는 기자의 간절한 간구가 시작 된다.
시인은 먼저 자신의 기도를 들어달라고 합니다. 그 기도는 당연히 여호와의 전에 거하는 것입니다.
또한 “야곱의 하나님이여”라고 한 것은 야곱은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다른 말로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 속에서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부르며 자신의 기도에 귀를 기울여 달라고 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시인은 하나님을 자신의 “방패”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신이 하나님의 전에 가는 길에서 만날 모든 환란과 어려움, 그리고 공격을 막아 주시는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백은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시면서 하신 표현을 인용한 것입니다.
그리고 시인은 “주께서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 보옵소서”라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기름 부음 받은 자란? 문맥상 성전을 사모하여 시온의 대로에 서있는 자를 가리키는 말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8절과 9절에서 한 기도는 자신을 도와주어 주의 전에 거하는 복을 달라는 것입니다.
시인이 이토록 성전을 사모하는 이유를 10절부터 말해주고 있습니다.
10절부터 12절까지 같이 읽겠습니다.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그것은 주 안에 거하는 것이 세상에서 영화를 누리는 것보다 낫다고 중심에서부터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주 안에서 주의 뜻대로 사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않고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1절에서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라고 시작한 오늘 말씀은 12절에서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하는 말씀으로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미 우리 앞에는 시온으로 가는 대로가 열려있습니다. 이제 그 길을 주저하지 말고 담대히 걸어가면 되는 것입니다. 시인의 고백대로 주께 힘을 얻고 더 얻어 이 길을 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말씀을 가까이 대하고 기도에 열심을 내고 힘써서 말씀대로 사는 자들이 되길 바랍니다. 그것이 복이 있는 자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복이 있는 자는 장차 하나님과 얼굴과 얼굴을 대하는 복을 얻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