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다는 것은 아는 것이다
사람에게 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인체의 눈을 통해서 어떤 사물을 보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의 사물을 보면서도 내가 너가 달리 보인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래서 단순히 눈을 통해서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관심(觀心)이라는 마음의 작용을 통해서 보는 것이다.
내가 무엇에 대하여 관심이 있느냐? 가 결과적으로 내가 보는 전부이고 뿐만 아니라 내가 아는 전부이다. 그런 관계로 “내가 안다“는 것은 전부의 부분만 아는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전부를 아는 것같이 과장(誇張)하는 것은 무식(無識)이다.
옛날 옛적에, 세 명의 맹인들이 숲속을 걷다가 코끼리에 부딪혔다. 앞서가던 모우(Moe)는 코끼리의 코를 만지게 되었다. “촉수가 있네”라고 그는 말했다. “우리가 대왕 오징어를 한 마리 발견한 것 같아!”
래리(Larry)는 코끼리의 옆구리에 부딪혔다. “이것은 벽이야. 아주 크고 뻣뻣한 벽” 뒤에 있던 컬리(Curly)는 꼬리를 만졌다. “걱정할 것 없어. 이것은 그냥 길거리에 매달린 밧줄일 뿐이야.”
이글토시(Eagletosh)는 이 틈을 이용해 나무 밑의 그늘에 앉아 쉬었다. “나의 심사숙고된 의견으로는,” 그는 말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깃털 을 가지고 있다네. 여러 색을 띈 진주 빛의 아름다운 깃털들 말일세.”
그래서 생긴 말이 맹인모상 (盲人模像)이다. 코끼리 한 마리를 놓고 맹인들의 코끼리 실체는 각각 달랐다. 성한 눈을 가진 사람이 볼 때는 너무 웃기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맹인들이 아는 코끼리는 저들이 만져본 전부이다.
지금 같으면 한 마리의 코끼리를 놓고 왈가왈부(曰可曰否)했을 것이다. “내가 옳아?” “아니야, 내가 옳다고?” 저들의 세계에서는 분명하고 확실한 정의가 있을 수 없다. 효녀 심청(深靑)같은 딸을 만나 심 봉사가 눈을 뜬 것같이 개안(開眼)이 되면 비로소 알게 될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누구나 보이는 것만큼 생각하고 성장한다. 따라서 보는 것이 배움이다. 더 많이 보고자 하는 사람은 훨씬 앞에서 걸어 갈 것이고, 보이는 대로만 따라가는 사람은 점점 느려지다 어느 순간에 멈추고 말 것이다.
우리의 선친들은 이런 대계(大系)를 알았기에 “사내자식을 낳으면 경성(京城)에 보내고 말을 낳으면 탐라(耽羅)에 보내라.” 하였다. 여기서 경성이란 넒은 세상을 의미함이요, 탐라는 좁은 세상을 의미함인데, 말(馬)이라는 짐승은 오직 제 주인만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성장하려면 이처럼 많이 보고, 많은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이를 먹어도 언행이 유치(幼稚)해 질 수밖에 없다. 도량(度量)이 좁고, 고집(固執)이 억세풀 같아 꺽혀질 듯 하면서도 나부끼기만 한다.
옛 성인들은 10년 대계, 100년 대계를 이야기했다. 그만큼 먼 훗날을 생각하며 살았기에 언행이 빠르지 않고, 자유롭고, 여유로웠다. 그런데 요즈음 사람들은 그러지 못하다. 무엇에 내쫓기듯 마냥 달음질만 하고 산다.
전동차(電動車)의 문이 열리자 말자 사람들이 잰걸음으로 달리는 모습은 늘 상보는 모습이다. 그리고 옆 사람에게 손이 닿기만 해도 신경질이다. 이것은 단순히 생존경쟁의 아귀다툼이라고 보기보다는 배움이 약한 탓이다.
일상이 자고, 밥 먹고, 직장에 나가고, 학교에 가고, 그런 정도이니 많이 볼 수 있는 기회가 없다. 겨우 휴가철에 나들이를 간다고 해도 근처를 맴돌 뿐이니 넒은 세상에 다양한 것들을 보고 산다는 것은 힘든 것이다.
이런 탓으로 성질이 험악해지는 것 같다. 일본 순사에게 쫓기는 독립투사도 아닌데 그렇게 사는 것 같이 느껴진다. 자동차를 오래 타는 비결이 있다면 급속(急速)이나, 과속(過速)을 하지 않고 최대 80km 정도를 유지하여 운행하는 것이라 한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무엇이든 과욕(過欲)은 불급(不及)이다.
많은 것을 즐겁게 볼 수 있는 계절이 가을이다. 본격적으로 산천에는 단풍이 물들기 시작한다. 집 근처 산에만 가도 아름다운 오색의 단풍을 볼 수 있으니 고마운 계절이다. 이때에는 아무리 바빠도 배움을 얻기 위해 산행을 해 보는 것이 내 신상에 좋으리라 본다.
그 일이 무가치한 일이 아니라 나를 한층 성장케 하는 동력이라 생각하면 일상의 일을 멈추고 홀가분하게 떠남이 좋으리라. 돈의 여유(餘裕)를 따지면 아무 것도 못한다. 나 같은 경우에는 카메라 한 대 어께에 메고 가면 된다.
보면서,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알아가는 재미는 꿀맛 같다. 그 달콤한 맛이 내 삶에 베일 때 마음이 여유로워지고, 사람을 대함에 선량(善良)해 지리라 본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소명하여 여럿 곳을 옮겨 살게 하였다.
본다는 것은 아는 것이다. 그렇다고 색깔을 끼고 보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본다면 앎이 많아 질 것이고, 그러면 누구와도 편벽(偏僻)함이 없이 자유롭게 만나, 소통하는 성현(聖賢)의 삶을 누리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