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의 환란
데살로니가후서 1장 1-9
데살로니가전서를 가지고 갔던 디모데가 돌아오고 그들에 대한 소식을 바울이 들었습니다. 데살로니가교인들의 신앙에 대해 전서에서 칭찬했던 바울은 그들의 바르지 못한 신앙생활에 대해 바로 잡아야 할 필요를 느껴 후서를 써서 보낸 것을 우리가 읽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먼저 전서와 비슷한 인사를 하고 있습니다.
1절과 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여기서 실루아노는 실라를 말합니다. 인사말에 대해서는 데살로니가전서 강해 첫 시간에 했기 때문에 넘어가겠습니다.
이어서 바울은 데살로니가교인들 위해 하나님께 항상 감사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니"
바울은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라는 말을 현대어성경은 “형제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에 대해서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데살로니가교인들을 생각하면 하나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본 절에서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믿음이 더욱 자라고 각기 서로 사랑하는 것이 풍성하기 때문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믿음이 더욱 자랐다는 말은 헬라어로 “휘페라욱사노”라는 단어로 “풍성하게 성장하다, 한계점에 이르기까지 성장하다, 엄청나게 증가하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데살로니가교인들의 신앙이 다른 사람들의 신앙성장과는 비교할 수 없이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신앙 성장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역자들도 동일하게 성도의 신앙성장을 보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신앙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을까요?
그것은 다음절부터 말하고 있는 환란 속에서 믿음을 지키는 신앙입니다.
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하노라”
데살로니가교인들은 환란을 당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내로서 믿음을 지켰다고 칭찬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교인들은 핍박으로 유명합니다. 네로가 기독교를 박해하기 전까지 최고의 박해가 이곳에서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비록 예루살렘에서 스데반과 야고보가 죽고 루스드라에서 바울이 돌에 맞았지만 예루살렘에서는 유대인과 유대교의 문제였고 루스드라에서는 바울 개인에게 행한 박해였다면 데살로니가 교회의 핍박은 바울을 공격하는 것을 넘어 데살로니가교인들을 핍박하였고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죽하면 바울도 3주밖에 견디지 못했고 그 후에 들어가서 격려하고 싶었지만 그렇지 못했다고 할 정도입니다.
데살로니가교인들은 계속된 박해로 힘이 든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믿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아니 잃지 않을 정도가 아니라 더욱 깊어졌고 폭풍성장을 했던 것입니다. 이에 바울은 칭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는 환란과 박해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10장 30절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바울도 디모데에게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1:8)라고 하였습니다.
본문에서 환란이라는 말은 “들립시스”라는 헬라어인데 이 말의 어원은 무거운 돌에 가슴이 눌려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데살로니교인들은 매일 매일의 신앙생활이 긴장과 억압과 두려움으로 지내야 했고 그 속에서도 믿음을 지켰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을 세상에 보내시면서 “너는 비록 가시와 찔레와 함께 있으며 전갈 가운데에 거주할지라도 그들을 두려워말라”(겔2:6)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전제하고 있는 말은 하나님의 사람이 살아가며 복음을 전해야 할 환경은 환란과 박해가 있는 곳이란 말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성도가 복음을 전하다가 죽는다고 했는데 그 장소를 가리켜 말하기를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며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계11:8)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따르는 성도가 이 땅에서 박해를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긴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사람들을 삼가라 그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그들의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또 너희가 나로 말미암아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가리니 이는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10:17-22)라고 하셨으니 성도라고 불려지는 순간 박해를 받는 운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의 삶은 매일매일 죄와 싸우고 세상의 가치관으로부터 눌림을 당하는 삶인 것입니다. 바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분별하며 세상의 가치에 지지 않기 위해 매일매일 말씀으로 싸우는 삶이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현재 한국교회성도들은 정치적이고 육체적인 박해는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믿지 않는 가족들에게 박해를 받는 사람들은 있겠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 성도를 향한 박해는 외형적인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영적인 박해입니다. 쾌락, 재물, 명예, 정욕의 유혹은 육체적 박해보다 더 심하게 다가오고 무섭습니다. 왜냐하면 육체적 박해는 도리어 믿음을 강화시키지만 영적 박해는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서서히 죽게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견딘다'는 말은 현재 시상으로 핍박과 환난이 과거의 일로 지나간 것이 아니라 바울이 편지 쓰고 있는 현재에도 계속 진행되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환란과 핍박을 받은 데살로니가교인들의 믿음은 인내였습니다. 이미 전서에서도 “소망의 인내”로 그들이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인내했습니다. 여기서 인내란 헬라어로 “휘포모네”입니다. 이는 억지로 참아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휘포모네는 기대하며 참아내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전서에서 소망의 인내라고 한 것입니다. 마치 배고픈 아들이 주방에서 음식하는 엄마의 도마소리를 들으며 맛있게 먹을 것을 기대하고 배고픔을 참는 것 같은 것입니다.
또한 인내는 견뎌낼 수 없는 정도의 무게에서도 끝까지 참아내는 자세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인내'에 대해서 핀들레이(Findlay)는 "그것은 고난당하는 자가 수동적인 자세로 체념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용맹스러운 군인처럼 강건하게 서서 버티는 것을 의미 한다"고 정의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인내는 믿음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믿음을 가진 성도는 고난 중에서 굳건한 인내를 발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가 믿음을 지키기 위해 하는 인내는 죽는 날까지 해야 하는 것이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살려주실 것을 믿으며 하기에 의미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이렇게 인내하는 것에 대해 고백하기를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딤후 2:13)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이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성도들의 정체성에 대해 말해주는데 그것은 “나그네”라는 말입니다. 나그네임으로 본향을 향해 가는 길이 비록 불편하고 힘들지만 소망이 있다는 뜻이고 나아가 나그네가 받은 고난은 “잠깐”이라고 해서 성도들의 인내는 끝이 없는 것이 아니라 끝이 있으며 그 결국은 아름다운 것이 예비되어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성도가 인내하는 이유를 다음절에서 밝혀주고 있습니다.
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
성도가 고난을 받는 이유를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게 하려함이고 나아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다고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게 하려한다는 것은 이것이 구원의 조건이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이 말은 성도는 환란과 박해를 받을 때 믿음을 지키게 되고 그것을 하나님께서 구원의 표로 삼겠다는 말입니다. 사실 견디게 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게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사람으로 훈련되어지고 개인적으로는 구원을 얻고 하나님 나라적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자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표준새번역은 “이것은,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의 표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이 되게 하시려고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나라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라는 구절은 현재 시제로서 과거의 고난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성도들에게는 고난이 뒤따릅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1장 29절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하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고난은 그리스도께서도 친히 당하셨으며(벧전2:21-25), 이 편지를 쓰고 있는 바울과 그의 동역자 실라와 디모데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도에게 있어서 고난은 실제적이며 필연적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도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받는 고난은 그들의 죄로 인한 형벌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받은 것이어야 합니다. 성도들이 자신들의 죄 때문에 고난을 받는다면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으며 오히려 부끄러운 일이 되는 것입니다(벧전2:20). 그러나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고난이라면 그것이 정금보다 귀한 것이며 하나님 앞에서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벧전1:7).
성도 여러분, 우리 주되신 예수님도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시고 골고다에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들이 죄 사함 받아 천국을 얻게 된 것입니다.
또한 바울은 자신의 연약함이 그리스도가 드러나기에 은혜라고 했습니다.
성도에게 환란과 박해는 유익합니다.
그래서 로마서에서 바울은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5:4)라고 하였습니다.
잠언 17장 4절에서 환란을 통해 하나님은 성도를 훈련시킴을 말하였습니다. 기록되기를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하고 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성도에게 있어서 환란과 박해는 개인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유익한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이처럼 환란 받는 성도에게는 보상이 따른다고 하고 있습니다.
6절부터 9절까지 읽겠습니다.
“너희로 환난을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환난을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본문에서 말씀하시기를 환란을 받게 하는 자들 즉, 박해하는 자들을 환란으로 갚으시고 환란 받는 성도들에게는 안식을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많은 악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인식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믿는 성도들도 하나님의 공의 심판과 다스림을 믿지 않습니다. 마치 하박국이 악인들의 형통을 보면서 답답해하고 말라기에서 성도들이 악인이 잘된다며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것처럼 현대의 성도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그냥 두지 않으십니다. 단지 오래 참으실 뿐 영원히 참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바울의 말처럼 악인에게는 심판이 의인에게는 안식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안식”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아네신”으로 본래 팽팽하게 당긴 활의 줄을 원래의 상태로 느슨하게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역경에서 해방되다', '수고를 그치고 쉬다'는 휴식의 개념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지금 바울은 그들이 믿음 때문에 무고하게 고난을 당하고 있지만 그 고난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라 결국 참된 안식과 평안을 얻게 되는 과정이라고 위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믿음을 지킨 자신과 모든 성도들에게 생명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다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일곱 교회에 편지하면서 이기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이기는 자들에게 주실 상급을 말합니다. 모두를 정리하면 “이기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며, 둘째 사망의 해를 당하지 않게 하고, 감추인 만나를 주어 흰 돌을 주겠다며 하였고, 만국을 다스릴 권세를 주고, 흰옷을 입을 것이며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지지 않을 것이고,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어 지고, 보좌에 함께 앉혀 주시겠다”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환란과 박해로 인해 예수님을 버리고 유대 공동체로 돌아가려는 사람들을 향해 돌아가지 말라고 하면서 모세와 예수님을 비교하여 말했는데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여 광야로 나왔습니다. 그도 온전하지 못했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순종하지 않음으로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이제 성도들은 온전하신 예수님을 따라 세상에서 나왔으므로 예수님께 온전히 순종함으로 안식에 들어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환란과 박해가 있고 심지어는 죽지만 더 나은 부활을 얻기를 원한다면 예수님으로 인하여 박해를 견디라고 말합니다. 심지어는 피 흘리기까지 싸워보지 않았다고 하면서 믿음의 싸움을 싸우라고 했고 나아가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고 영문밖에 나가 못 박히신 것처럼 우리도 그 십자가 지고 영문 밖, 죽음의 자리로 나가자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4장 12절부터 19절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라고 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의 마지막 고백을 보겠습니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4:6-8)
성도에게 주어지는 환란과 박해는 결코 저주가 아닙니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것임을 인식합니다. 그 후로는 하나님의 안식이라는 보상을 얻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