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은 생명의 빛이십니다.

요한복음 81-20

 

예수님께서 초막절에 성전에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라고 말씀하신 일로 인해 유대인들의 미움을 사고 죽음의 위기를 겪었습니다. 이 일로 유대인들 사이에 예수님에 대해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이 일 후에 사람들은 모두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 예수님은 감람산으로 가셨습니다. 그 다음 날 아침에 예수님은 감람산에서 나와 성전으로 들어가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이 때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올무에 넣기 위해 현장에서 간음하다가 잡힌 여자를 데리고 왔습니다. 그러면서 묻기를 모세의 율법에는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하였는데 당신은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몸을 굽히시고 땅에 무엇인가 쓰시다가 일어나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라고 말씀하신 후에 다시 몸을 구푸려 땅에 무엇인가 쓰셨습니다. 이렇게 하시는 동안 여인을 고발하였던 사람들은 하나 둘씩 떠나가고 아무도 남지 않았습니다. 이에 예수님을 일어나셔서 여인에게 물으시기를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이에 여인이 모두 갔다고 했고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유명한 이야기를 통해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도록 합시다.

 

먼저 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는 감람산으로 가시니라

 

원래 원문에는 라는 헬라어가 있습니다. 이는 그러나라는 단어인데 우리 번역에서는 빠졌습니다. 그러나가 붙은 이유는 다른 이들은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갔는데 예수님은 감람산으로 가셨다는 것입니다. 자라신 곳이 갈릴리신 예수님이 명절에 예루살렘에 오셨지만 마땅히 묵으실 곳도 없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오실 때마다 감람산은 예수님이 종종 머무시던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인자는 머리 둘 곳조차 없다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편안한 잠자리도 없이 빡빡하게 공생애 사역을 감당하셨던 예수님의 고단한 모습을 사도 요한은 떠올렸던 것 같습니다. 더불어 예수님께서 감람산으로 가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기도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셨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밤이 산에 가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새벽에도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중요한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기도라는 본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완전한 사람이기도 했지만 완전한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우리에게 기도의 본을 보이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 오르셨다가 내려오신 후에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셨습니다. 그 일이 있던 밤에 제자들은 예수님께 묻기를 자신들은 왜 못했는지를 물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시대 성도의 삶과 사역에 반드시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반드시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은 경험이나 자신의 능력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와 능력은 기도를 통해 더 풍성해지고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자신의 감람산을 만들고 하루를 시작하고 마치는 일을 기도로 해야 할 것입니다.

 

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더니

 

예수님은 성전에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전날 유대인들이 자신을 죽이려 했음에도 예수님은 뒤로 물러서지 않고 사람들에게 나아와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신 이유는 자신이 죽을 때가 점점 다가오고 있는 것을 아셨고 영혼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생명의 말씀을 하나라도 더 전하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조급하신 모습은 이 후에 제자들과 그 뒤를 따르는 이 땅의 모는 주의 일꾼들의 자세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사형 언도를 받은 상태에서 디모데에게 유언하며 명하기를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딤후2:2)라고 하였고,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4:2)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의 모습과 믿음의 선진들의 삶을 본 받아야 할 것입니다. 주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힘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다가 방해를 받고 어려움을 당해도 주저하지 말고 전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레미야와 에스겔에게 말씀을 증거 하라고 하시면서 그들이 듣지 않을 것이며 도리어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를 치고 박해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하신대로 사람들의 공격과 방해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심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다시는 말씀을 전하지 않으려고 마음먹었으나 가슴이 불붙듯 하여 전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습니다.

 

이 시대 말씀을 맡은 우리들의 자세입니다. 우리가 전하고 우리의 후손들이 전하고 그 후손들이 전하여 주께서 찾으시는 영혼들을 찾아 내여 주의 구원의 은혜를 입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본 절을 다른 차원, 즉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오셨을 때 백성들이 다 나아와 말씀을 들었다고 하는데 그들의 사모함이 본문에 드러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앉으셔서 백성들을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의 집,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전에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오셔서 당신의 백성들을 가르치시는 이 모습은 정말로 아름 답니다. 전에 들어본 적 없는 진리의 말씀에 깊이 빠져든 백성들이 얼마나 행복하고 만족스러웠으면 이른 시간부터 예수님 앞에 턱을 괴고 앉아 말씀을 듣고 있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주의 백성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을 때만큼 그 심령을 기쁘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가물어 메마른 땅에 단비가 내려 생명을 살리듯 우리 영혼이 말씀으로 인해 살아나고 생명력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서들을 보면 사람들이 음식 먹는 것조차 잊고 예수님을 쫒아 다녔던 것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이 시대 주의 백성들도 이런 생수인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사모하는 은혜가 있길 바라고 그 위에 주께서 넘치는 천국의 기쁨의 은혜를 부어주시기를 소원합니다.

 

이렇게 말씀을 증거하고 계실 때 유대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왔습니다.

3절부터 5절까지 같이 읽겠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이 여인을 끌고 오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현장에서 잡혔다면 잡힌 현장에서 처리하면 될 것이었습니다. 힘들여 성전까지 끌고 들어올 일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간음한 여인을 성전으로 끌고 들어온다는 것이 당시 성전문화를 생각해 볼 때 얼마나 어색한지 모릅니다. 성전을 오를 때부터 그들은 마음을 조아렸습니다. 그래서 성전에 오르는 계단을 만들 때 넓은 것을 하나 놓고 다음에 좁은 것을 하나씩 놓는 식으로 번갈아가며 놓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여인을 잡아 오면서 그런 마음은 모두 사라졌고 오직 하나의 생각뿐이었습니다. 이 여인이라는 미끼를 던져 예수님을 올무에 걸 생각만을 하고 왔던 것입니다. 그 증거가 그들의 손에는 돌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긴 성전 앞에서 사람을 죽일 수 없으니 안 가져 왔을 수도 있었겠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나아와 묻습니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묻고 있는 유대인들은 스스로 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돌로 쳐 죽이라는 모세 율법이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번거로운 일을 만드는 것은 율법을 몰라서가 아니라 6절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하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말씀을 나누며 행복했던 성전의 분위기는 술렁이기 시작했고 이 난관을 예수님께서 어떻게 헤쳐 나갈지에 대한 궁금함으로 변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돌로 치라고 하면 평소에 용서와 사랑을 가르쳤던 자신의 가르침에 반하는 것이었으며 용서하라고 하면 율법을 어긴 것이 되어 자신 앞에서 말씀을 듣던 이들까지 적으로 변할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질문하는 그들에게 예수님은 어떤 행동과 말씀을 하셨습니다.

6절부터 9절까지 같이 읽겠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예수님은 그들의 물음에 즉답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몸을 구푸려 땅에 무엇인가 쓰셨을 뿐입니다. 그리고 잠시 후 몸을 일으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라고 말입니다. 그리고는 다시 몸을 구푸려 땅에 무엇인가를 쓰셨습니다.

 

혹자는 예수님께서 땅에 쓰신 글이 여인을 고소하기 위해 끌고 온 사람들의 이름과 그들의 죄목을 적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말고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 행동과 말을 통해 그들의 죄를 깨닫게 하고자 함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처음에 몸을 구푸려 땅에 무엇인가를 쓰신 것은 흥분한 그들을 진정시켜 이 후에 하실 말씀을 들을 준비를 시킨 것이었고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신 것은 그들이 자신을 돌아 볼 수 있게 하신 것이며, 다시 몸을 구푸려 무엇인가 쓰신 이유는 그들이 자신들의 숨겨진 죄를 돌아보게 하려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분노할 때 하나는 보이는데 어떤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먼저 것은 상대의 허물이고 나중의 것은 자신의 허물입니다. 어떤 일로 인해 흥분을 하면 자신이 그 일을 당하게 원인을 제공한 상대에 대한 분노로 그 사람의 죄와 허물만이 보이게 됩니다. 이러한 때 사람들의 특징은 정죄를 잘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언제나 옳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과는 대화가 되지 않습니다. 아니 인간관계가 오래 지속되지 못하게 됩니다. 자신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주변에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해서가 아니라 필요해서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노의 시간이 흐르고 이성을 찾았거나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자신도 온전하지 못한 존재임을 알게 됩니다. 아니 알게 되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은 더 심한 죄인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사람들도 숨겨진 죄를 드러내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하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인해 자신을 돌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말씀은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정말 유명합니다. 이 말씀으로 인해 유대인들은 자신을 돌아보아야 했고 자신의 무죄를 증명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시간을 주었고 그 시간동안 죄 많은 자신을 보았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하나씩 자리를 떠났습니다.

 

이 시대 사람들 누구도 죄 없는 자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보혈의 은혜가 필요하고 누구나 완전한 자가 없기에 정죄할 자가 없는 것입니다. 무언가 남의 잘못이 보이고 정죄하고 싶은 마음이 아직도 있다면 내 죄를 밝히시는 성령님의 조명을 아직 제대로 받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 앞에서 긍휼이 필요한 죄인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한 여인의 죄의 문제를 통해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진리를 선포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렇게 모두 떠난 후에 예수님은 일어나 여인에게 너를 고발하던 자들이 모두 어디 갔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에 여인은 아무도 없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이렇게 여인을 정죄하던 자들이 모두 떠난 후에 예수님은 여인에게 아주 파격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11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예수님은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정말 놀랍습니다. 왜냐하면 여인을 고발하던 자들이 떠난 것은 여인이 죄가 없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죄로 인해 정죄할 수 없어서 떠났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정죄하지 않겠다고 하신 것은 차원이 다른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같은 죄인의 차원이 아니라 심판자로서 여인을 정죄하지 않겠다고 한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스가랴서에서도 죄 많은 여호수아를 사탄이 정죄할 때 하나님은 사탄을 책망하시며 그의 더러운 옷을 벗기고 거룩한 세마포 옷을 입히고 관을 씌워 당신의 오른편으로 옮겨 주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들을 정죄하지 않으십니다. 아니 정죄 정도가 아니라 우리의 모든 죄를 완전하게 도말하셔서 기억도 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나아가 죄가 사함을 입었을 뿐 아니라 생명을 얻은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20장에서 성도는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로서 둘째 사망의 해를 당하지 않는 존재임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정죄하지 않으신 주님의 은혜를 헛되게 하면 되지 않습니다.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구원파처럼 구원받은 이후에는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는 식으로 생각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완전하신 용서는 거룩한 삶의 의무를 동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삶으로 그 은혜를 고백하고 드러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산상수훈을 시작하면 성도들을 복 있는 존재라고 하고 이어서 그 복 있는 존재인 성도는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 기준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보다 더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 시대 우리나라와 민족의 문제는 교회의 문제입니다. 또한 교회의 문제는 경건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디모데후서 35절은 이 문제에 대해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우리가 모두 갖추었습니다. 교회의 외형과 예식, 그리고 조직과 구성원은 경건의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능력을 말하려고 하면 부끄러울 뿐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교회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경건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품성과 인격을 닮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헬라어 경견이라는 단어는 유세베이아라고 하는데 이 말은 하나님과 사람을 존경하는 자세를 뜻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겸비한 마음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경건이라고 합니다.

 

경건은 하나님께 드려지고 바쳐진 삶을 의미합니다. 더 이상 자기 자신의 뜻이나 자기의 방식이나 세상 정신을 따라서 삶을 살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을 뜻을 따라서 삶을 사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경건한 사람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을 생각하고,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고, 모든 일을 주님께 하듯 자기의 일상적인 삶을 거룩하게 구별하는 사람이 경건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경건한 삶을 원한다면 육적이고 지적인 능력을 버리고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복종시켜야 합니다.

 

이렇게 여인에게 말씀하신 주님은 이 여인의 사건을 통해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12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예수님은 어둠 가운데 있던 여인을 사망에서 건지시고 죄 짓지 말고 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바로 당신이 세상의 빛이라고 선언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을 따르는 자는 어둠에 있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본문의 여인과 그 여인을 대표로 이 말씀을 듣고 있던 제자들과 우리 모두에게 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빛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않는다. 왜냐하면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 현장에서 간음하다가 잡혀와 돌에 맞아 죽을 수밖에 없던 존재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의 비난과 율법의 정죄와 사탄의 강력한 억압은 우리들을 소망 없는 존재로 살게 했었는데 주님의 한없는 용서와 격려는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삶을 살게 해 주신 것입니다. 바로 세상의 빛으로 사는 은혜입니다. 이제 그 사명 제대로 감당하여 점점 어두워지고 썩어가는 세상을 돌이키게 하는데 쓰임 받는 우리가 되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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