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아닌 행동으로

1:19-27

 

속담에 입으로 떡을 하면 조선 사람이 다 먹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말로야 무슨 말인들 못하겠느냐는 뜻일 것입니다. 입만 열면 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행동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서 말로 천하를 쥐고 흔드는 사람입니다.

 

말과 행동이 같은 사람에게 언행이 일치한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을 공자는 군자라고 했고 야고보는 32절에서 온전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온전한 성도의 바른 삶의 모습을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믿을 만한 사람을 가리켜 신실한 사람이라고 하고 하나님의 언약이 반드시 성취할 것에 대해 표현할 때 신실하신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신실하다고 할 때 신실은 믿음직스럽고 진실함이라고 사전은 정의합니다.

여기서 자는 믿을 신()입니다. 믿을 ()’자를 살펴보면, ‘사람()’말씀()’이 합쳐져서 믿을 ()’자가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믿음이란 사람의 하는 말이란 뜻이고 사람의 하는 말이 곧 믿음이란 뜻일 것입니다. 그래서 말에 진실함이 없는 사람은 신실하지 못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즉 믿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신실한 사람이란 말을 서두에서 했던 말로 하면 언행일치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성도는 그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께서 그런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15절에서 여인의 후손을 통해 구원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시고 아브라함과 다윗 등의 선진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시겠다고 예언하신 분은 말씀하신대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말씀하신 바를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하나님처럼 행동해야 합니다. 그들을 가리켜 신자라고 합니다. 무엇을 믿는 사람입니까?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어떤 하나님입니까? 바로 신실하신 하나님, 약속을 지키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이 에 대해 많은 말을 했습니다.

왜 야고보는 그의 편지에서 말에 대해 많은 말을 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신자, 성도라고 하면서 말과 행동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야고보는 그런 그들에게 성도로서의 바른 삶인 언행일치의 삶에 대해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야고보는 누구이며 어떻게 살았기에 이렇게 말하는 것일까요?

야고보서의 저자는 예수님의 동생입니다. 사도 야고보는 초대교회가 생길 때 헤롯에 의해 첫 번째로 순교를 당했고 오늘 본문을 기록한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으로 예루살렘교회를 지도하던 자였습니다.

 

그는 당시 초대교회 사도들과 성도들이 모두 예루살렘을 떠날 때도 끝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교회를 지키고 복음을 전했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를 유대교도들도 존경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 외에는 그의 삶을 흠잡을 때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유대교지도자들은 야고보를 죽이고 싶었지만 그의 삶이 바르고 유대교 율법에 흠이 없었기에 그를 어찌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로마총독 벨릭스가 로마로 돌아가고 새로운 총독 베스도가 발령받아 오는 중에 예수님을 죽였던 대제사장 안나스의 아들 아나누스 대제사장이 율법파괴자라는 죄명을 씌워 백성들을 선동하고 돌로 쳐 죽였습니다.

 

그런 야고보가 살아 있는 동안 성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오늘 본문의 말씀인 것입니다.

 

야고보는 성도들을 보면서 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거룩한 삶이 없을까?”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원인이 온갖 시험을 당하는데 그 시험을 이기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시험 중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말만 있고 행동이 없는 성도의 모습을 본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고보가 하고 싶은 말은 말의 성도가 아니라 행동의 성도가 되라는 것입니다.

 

먼저 19절과 20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야고보는 우리에게 듣기와 말하기를 대조해서 말합니다. 야고보는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말하기를 빨리하고 듣기는 게을리 합니다. 특별히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속히 해야 합니다. 제가 신학생들과 대화를 하다보면 의외로 성경읽기와 그 말씀 배우기를 게을리 합니다. 그 이유는 다 안다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신학정도 하는 사람이라면 열심히 좀 있었겠죠? 그리고 신학을 하면서 주워들은 말을 자신이 성경을 안다고 착각하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성경 읽으러 오라고 하면 바쁘답니다. 왜 바쁘냐면 쏟아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쏟아내고 주변 사람들에게 쏟아냅니다. 아주 훌륭합니다. 하지만 쏟아낼 만큼 채우질 않고 있다는 것이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러니 재밌는 예기, 간증, 예화 등으로 그 공백을 채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졸업하고 삼년만 하면 바닥난다고 할까요? 그 무궁무진한 하나님의 말씀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 말씀을 듣고 배우는데 게으릅니다. 그리고 쏟아내는 데는 주저함이 없습니다.

 

얼마 전에 어떤 박사과정을 공부하는 사역자가 통독집회가 끝나고 제게 고백하기를 자신은 성경을 많이 안다고 생각했답니다. 하지만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제게 배우면서 자신이 성경을 얼마나 모르고 있었는지 깨달았답니다.

 

그러므로 듣기를 속히 해야 합니다. 세상 소리 말고 주의 말씀을 듣기를 속히 해야 합니다. 그 말씀을 듣는 일은 뒤로 할 수 없습니다. 솔로몬이 일천번제를 드리고 난 후 하나님께서 무엇을 줄까하고 물으셨을 때 레브 쇼메아’ '듣는 마음을 달라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소리, 백성의 소리를 듣는 마음을 달라고 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야 합니다. 주일 날 교회 한번 오는 것도 아주 귀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배우고 들어야 이 험한 세상에서 믿음을 잃지 않고 승리하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본문을 보면 말하는 것을 더디 하고 성내는 것도 더디 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성내기를 더디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이미 본문에 답이 나와 있습니다. 바로 듣기를 속히 하고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의지로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묵상하면 하나님의 영이 우리 속에서 성내고 싶은 우리를 절제시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차치하고서도 화내기 전에 상대의 말을 먼저 들으면 실수하지 않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 구절을 보면 듣는 것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2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야고보는 듣기 위해 두 가지를 해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는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버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이 듣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악한 생각과 욕심, 더러운 정욕의 욕구가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여 받아들이게 하기 때문입니다.

 

본문 15절부터 8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이 말씀은 시험을 당했을 때 하나님께 그 시험에서 이기는 지혜를 구하면 응답하시겠다는 말씀인데 이 때 주께서 주신 응답을 거부하고 자신의 욕심과 생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네 가지 밭의 비유에서 가시밭을 말씀하실 때 싹이 나고 열매를 맺지만 결실하지 못하는 이유가 세상에 대한 염려와 재리에 대한 욕심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의 욕심 때문입니다. 재리에 대한 욕심과 육신의 쾌락을 추구하는 자신의 넘치는 욕구가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못하게 합니다. 강단에서 아무리 외쳐도 성경을 수없이 읽어도 삶이 변하지 않는 것은 자신의 욕심이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하고 가리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믿음이 성장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고 그대로 살아볼 때 성장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듣기 위한 두 번째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는 것입니다.

 

여기서 온유함이란 말은 플아위테스라는 말입니다. 이는 인간의 한 기질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이 그리스도와 연결되고 그의 형상과 일치될 때에 생겨나는 것으로 훈련되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온유한 사람은 천성적으로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련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훈련되어진 사람인 것입니다. 본문에서 온유함으로 말씀을 받으라고 한 것은 자신의 생각과 고집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는 자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온유함으로 받으라는 말씀은 20절에 나오는 성내는 것’(올게)와 대조하여 사용되었습니다. 이 온유함은 가르치는 사람에 대하여 분노를 터뜨리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려는 겸손한 자세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처럼 설교 말씀을 사람의 말로 들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13절입니다.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설교단에서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말씀을 사람이 하는 말로 듣고 토를 달면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사람 말로 들리면 무시하기에 말씀이 역사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신앙생활이 힘이 없고 기적도 체험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아멘하면서 받아들일 때 운동력 있는 말씀이 되어 역사가 일어납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듣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고집, 욕심, 정욕 등을 모두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주어지는 대로 아멘으로 받아 그 말씀대로 사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2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여기서는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자를 가리켜 자신을 속이는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이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이 됩니다. 자기 자신을 속인다는 것은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말씀을 왜곡하여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기는 들어도 자신에게 적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 자기를 속여서 복을 받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습니다. 만약 앞으로 남은 평생 동안 자기를 속인다면 복도 일평생 받지 못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자신을 속이는 자는 사탄의 좋은 표적이 됨을 알아야 합니다. 사탄을 이런 사람을 너무 좋아합니다. 그들은 자신만 사탄의 노리개가 되지 않고 다른 사람들까지도 사탄의 수중에 들게 하는 자들이 됩니다.

 

이런 사람들을 본문은 또 달리 표현합니다.

23절로 25절까지 같이 읽겠습니다.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우리는 매일 거울로 자신의 모습을 살펴봅니다. 거울을 보고는 이리 고치고 저리 고칩니다. 얼굴도 고치고 옷차림도 고칩니다. 오늘 아침에도 교회 오시기 전에 수없이 거울을 들여다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거울을 바라보고 잘못된 것을 발견했다면 고쳐야하는데 고치지 않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입술을 잘못 그렸고 속눈썹을 잘못 붙였다면 이것을 보고 가만히 있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반드시 고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거울을 보고는 자기 얼굴과 자기 모습을 잊어버리는 것과 같다고 한 것입니다.

 

반대로 거울에 해당하는 율법, 즉 말씀을 보고 돌아가 잊어버리지 않고 그 말씀대로 실천하는 자는 그 행하는 일에 복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정확하고 뻔한 말씀을 우리는 잘 알고 있음에도 실천하지 않는 이유는 계속해서 말씀드리지만 자신의 욕심 때문이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당신의 자녀들을 책임져 주심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630절은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이라고 말씀하신 것과

마태복음 1029절에서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믿으셔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십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항상 채워주심을 믿으셔야합니다. 마태복음 79절은 말씀하시시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한 아버지시기 때문에 기꺼이 당신의 자녀들에게 모든 것을 내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야고보는 결론적으로 말이 아닌 행동의 성도를 가리켜 경건한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6절과 2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경건이란 말을 본문은 자신의 혀를 재갈물리고 고아와 과부를 환란 중에서 돌보고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이라고 정의 하고 있습니다.

 

옛날에 경건한 사람들은 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자세로 길을 걸어 다니다가 나무에 이마를 부딪혀 피를 흘리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마에 피가 흐르는 사람을 보면 경건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이 말을 듣고 싶어하던 바리새인들이 아예 집에서 나올 때부터 자신의 이마를 벽에 찧어 피를 흘리며 나왔다고 합니다. 그들의 경건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경건은 말을 점잖게 하고 걸음을 천천히 걸으며 옷은 정장을 하고 조용하게 예배드리는 등의 겉모습이 아닙니다. 그것은 삶이 하나님의 말씀에 합한 자가 된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참된 경건은 세상 속에서의 삶과 인간관계에서 드러나는 그리스도인의 자세를 의미합니다. 세상과 하나님의 나라를 이원적으로 분리해서 사는 것은 바른 삶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무엇에든지 참되고 경건하며 옳고 정결하며 사랑할 만하고 칭찬할 만해야 경건한 그리스도인이라 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말이 아닌 행동의 삶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참된 경건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비난하는 말만 하는 성도가 아니라 세상 사람들도 기꺼이 존경하는 행동의 신앙이 되어 하나님의 영화롭게 하고 주께서 주시는 거룩한 은혜를 받아 누리는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
    현숙한 2012.09.14 23:36

    목사님 은혜 받았습니다. 어제 전도서 5장2절 말씀을 묵상하고 말을 통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하기 위해서 말 하기 전에 기도하는 습관을 가져야 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오늘 목사님 글을 읽고... 하나님께서 저의 언어습관에 대해 다시 한번 지적해 주시는 것 같습니다.

    요즘 제가 생각과 말과 행동이 일치가 잘 안되었거든요...

    감사합니다.^^

  • ?
    하림 2012.09.15 17:41

    올만에 집사님의 글을 홈피에서 보내요

    반갑고 감사합니다.

    설교말씀은 저에게 한것이랍니다.

    저도 강단에서 전하는 말씀과 삶에 불일치로 몸부림치기에.....,

    지난 32기 집회 때 참석하신분들이 은혜 받고 기도하는 것을 보다가

    순간 제게 드는 생각이 사도바울의 말처럼

    남은 구원하고 자신은 버림받을까 두려워한다는 말씀이 생각났답니다.

    집회가 끝나고도 몇일 동안 제 맘에서 사라지지 않았어요

    그러던 중 이 말씀이 생각났고 그래서 제게 한 설교랍니다.

    저도 이전보다 더 말씀을 전하는 만큼 행하려고 몸부림치고 살아가요

    집사님도 홧팅이예요

    또한 지금 기도 중이신것도 은혜 가운데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받으시길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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