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맛단의 아들 스바댜와 바스훌의 아들 그다랴와 셀레먀의 아들 유갈과 말기야의 아들 바스훌이 예레미야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는 말을 들은즉 이르기를

2.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 성에 머무는 자는 칼과 기근과 전염병에 죽으리라 그러나 갈대아인에게 항복하는 자는 살리니

   그는 노략물을 얻음 같이 자기의 목숨을 건지리라

3.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이 성이 반드시 바벨론의 왕의 군대의 손에 넘어가리니 그가 차지하리라 하셨다 하는지라

4.이에 그 고관들이 왕께 아뢰되 이 사람이 백성의 평안을 구하지 아니하고 재난을 구하오니 청하건대 이 사람을 죽이소서

   그가 이같이 말하여 이 성에 남은 군사의 손과 모든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나이다

5.시드기야 왕이 이르되 보라 그가 너희 손 안에 있느니라 왕은 조금도 너희를 거스를 수 없느니라 하는지라

6.그들이 예레미야를 끌어다가 감옥 뜰에 있는 왕의 아들 말기야의 구덩이에 던져 넣을 때에 예레미야를 줄로 달아내렸는데

   그 구덩이에는 물이 없고 진창뿐이므로 예레미야가 진창 속에 빠졌더라


누구를 의식하고 사나요?

예레미야 381-6

 

37장에서 시드기야와 그 백성들의 신앙상태에 대해서 듣지는 않을래 기도는 해줘라는 제목으로 생각해 보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소리에는 관심이 없었었습니다. 오직 자신들에게 닥친 위험을 해결하는 데만 관심이 있었을 뿐입니다. 그런 그들의 죄를 책망한 예레미야는 그들에게 고난을 당하였습니다. 37장 후반을 보면 예레미야는 친척 하나멜에게서 산 땅을 받으려고 고향인 아나돗으로 가려했으나 이를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탈출하여 바벨론에 항복하려는 것으로 오해해 잡혀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시드기야 왕이 찾아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예레미야는 시드기야가 바벨론의 손에 넘겨질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감옥 뜰에 갇혀 있는 신세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렇게 잡혀 있을 때 주어진 말씀이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주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음성을 듣는 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1절부터 3절까지 같이 읽겠습니다.

맛단의 아들 스바댜와 바스훌의 아들 그다랴와 셀레먀의 아들 유갈과 말기야의 아들 바스훌이 예레미야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는 말을 들은즉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 성에 머무는 자는 칼과 기근과 전염병에 죽으리라 그러나 갈대아인에게 항복하는 자는 살리니 그는 노략물을 얻음 같이 자기의 목숨을 건지리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이 성이 반드시 바벨론의 왕의 군대의 손에 넘어가리니 그가 차지하리라 하셨다 하는지라

 

예레미야는 시위대 뜰에 갇혀 있었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아 이러한 상황에 처했다고 말할 뿐만 아니라 자신과 다르게 유다는 망하지 않는다고 외치고 백성들에게 평안을 외쳤던 선지자들이 어디 있느냐고 묻는 등(37:19)의 메시지를 계속 전하였습니다. 그러기에 관리들에게 더욱 핍박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한 중에 오늘 말씀에 몇 명의 관리들이 언급되고 있는데 그들이 예레미야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읽은 대로 1절에 언급된 맛단의 아들 스바댜와 바스훌의 아들 그다랴와 셀레먀의 아들 유갈과 말기야의 아들 바스훌이라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시드기야의 신복들이고 당시 유력한 실력자들이었습니다. 그다랴는 예레미야를 때리고 착고에 채운 바스훌(20:1-3)의 아들이었으며, 유갈은 37장에서 시드기야왕이 기도하여 달라고 예레미야에게 보냈던 여후갈(37:3)과 동일인입니다. 그리고 말기야의 아들 바스훌과 맛단의 아들 스바댜도 시드기야의 특사로 예레미야를 찾아가 자신들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해 달라던 자입니다(21:1, 2).

 

이들이 예레미야가 백성들에게 한 말을 들었습니다. 그들이 들은 내용은 우리가 이미 읽은 대로 2절과 3절의 내용입니다. 이 말씀은 한마디로 바벨론에게 항복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자만이 목숨을 건지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예레미야의 이 말은 관리들의 반발을 사기에 충분했습니다. 이유는 그 당시 사람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반국가적 소요를 야기 시키는 선동적 발언으로 간주되었으며 그 결과 반역적 패배주의자로 보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두 부류였습니다. 당연히 한 부류는 예레미야의 말을 듣고 바벨론에 가서 항복하는 자들이고(38:19) 다른 한 부류는 예레미야에게 분노하는 부류입니다. 본문 1절에 언급된 자들은 당연히 두 번째 부류에 속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한 가지 행동을 취합니다.

 

4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이에 그 고관들이 왕께 아뢰되 이 사람이 백성의 평안을 구하지 아니하고 재난을 구하오니 청하건대 이 사람을 죽이소서 그가 이같이 말하여 이 성에 남은 군사의 손과 모든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나이다

 

그들은 왕에게 나아갔습니다. 그리고는 예레미야를 죽이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이렇게 죽이라는 이유를 본문은 뭐라고 합니까? 자세히 보면 그들이 예레미야를 죽이라고 한 이유는 백성의 평안을 구하지 아니하고 재난을 구했기 때문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가요? 정말 예레미야가 재난을 구했나요? 아닙니다. 재난을 구한 것이 아니라 재난을 선포한 것입니다. 어이없지만 재난을 구한 것은 자신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삶과 행동이 재난을 부른 것입니다. 그들이 악한 행동과 불순종으로 재난을 구했다면 예레미야는 재난을 선포함으로 재난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들도 우리들의 현실에 대해 이들과 같은 생각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자신들에게 닥친 환란의 원인을 자신들의 악한 행동과 불순종에서 찾으려 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보임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잊으려합니다. 원인을 현세의 복을 선포하지 않는 목사에게서 찾으려합니다. 우리 목사는 매번 회개에 대한 말씀만 전한다거나 평안을 구해주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런 것일까요? 진정한 평강을 구하는 이는 현재 사람들이 듣고 싶은 말을 해 주는 사람이 아닙니다. “훈련 때에 흘린 땀은 전쟁에서 피를 대신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군에 있을 때 독사라는 별명을 가진 원사님이 있었습니다. 그분의 별명이 독사인 것은 그분이 교관으로 병사들을 훈련시킬 때 독사같이 무섭게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분을 개인적으로 만나면 언제 독사였나 싶은 분이었습니다. 그는 진정으로 병사들을 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분이었습니다.

 

예레미야의 재난 선포는 그들이 말한 것처럼 재난을 구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비난하듯이 재난을 구한 것이 아니라 진정한 평안을 구하는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귀를 간질이는 소리를 너무 좋아하지 마십시오.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책망의 말씀을 사모하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예레미야를 죽이라는 신복들의 말에 시드기야의 반응을 봅시다.

5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시드기야 왕이 이르되 보라 그가 너희 손 안에 있느니라 왕은 조금도 너희를 거스를 수 없느니라 하는지라

 

예레미야를 죽이라는 간신배들의 말을 들은 시드기야의 반응은 우리가 읽은 대로 책임을 떠넘기는 것입니다. 그는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너희 손 안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말한 것은 방백들이 예레미야를 자기 마음대로 처분해도 된다 것을 의미했습니다. 시드기야는 이렇게 말함으로 그가 그들의 조언대로 시행할 것임을 간접적으로 밝힌 셈이 된 것입니다. 시드기야는 왜 이렇게 유약한 왕이 되었을까요? 그의 일련의 행동을 보면 예레미야와 그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왕권으로 제지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않았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 본문은 왕은 조금도 너희를 거스를 수 없느니라라고 말한 시드기야의 말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시드기야는 신하들을 통제하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당시의 실세는 왕이 아니라 방백들이었으며, 이들은 왕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그런 위치에 있었습니다(25-27).

 

물론, 시드기야의 등극 자체부터가 이미 정통성을 상실케 하였습니다. 즉 그는 여호야긴이 포로로 붙잡혀가고 난 다음 느부갓네살에 의해 왕위에 오른 꼭두각시 왕이었으며, 또한 국민 대다수에 의해서 진짜 왕으로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바벨론으로 끌려간 시드기야의 조카 여호야긴이 돌아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시드기야의 이런 모습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빌라도를 보는 것 같습니다. 그도 백성들을 무서워하여 자신의 의지대로 하지 못하고 예수님을 죽음에 내어 주었던 것입니다. 그는 손을 씻으며 예수님의 죽음과 자신은 상관이 없다고 했지만 우리들을 사도신경을 통해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았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함은 빌라도도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시드기야도 백성들에게 책임을 떠넘기지만 그도 책임에서 자유 할 수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책임을 회피한 시드기야의 말을 들은 자들은 곧 자신들의 생각을 실천에 옮겼습니다.

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들이 예레미야를 끌어다가 감옥 뜰에 있는 왕의 아들 말기야의 구덩이에 던져 넣을 때에 예레미야를 줄로 달아내렸는데 그 구덩이에는 물이 없고 진창뿐이므로 예레미야가 진창 속에 빠졌더라

그들은 예레미야를 구덩이에 던져 넣었습니다. 중동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고대에는, 건조한 여름 날씨에 대비하기 위해 겨울비를 받아둘 웅덩이를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용도로 파 놓은 웅덩이에 예레미야를 던져 넣은 것입니다. 예레미야를 죽이자고 했던 이들이 곧 죽이는 것 대신 구덩이에 던져 넣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레미야를 깊은 구덩이 속에 넣어 저절로 죽게 함으로써 피를 흘리게 하는 죄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것입니다.(37:18,19)

 

한편, 전형적인 구덩이는 석회암을 파내고 만들어졌는데, 이것은 직경 약 90cm 정도의 좁은 입구를 가지고 있었고 물을 많이 가두기 위해 상당히 깊게 만들었습니다. 이곳에서 예레미야를 밧줄을 이용해 집어넣고 꺼내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그 안으로 출입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웠을 것입니다.(13) 그래도 다행인 것은 그 때가 9월경이어서 구덩이의 물은 모두 사용한 후였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덩이에 던져져 죽기만을 기다려야 했던 예레미야가 구원받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10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왕이 구스 사람 에벳멜렉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는 여기서 삼십 명을 데리고 가서 선지자 예레미야가 죽기 전에 그를 구덩이에서 끌어내라

 

악한 자들로 가득한 예루살렘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이방인이었던 에벳멜렉입니다. 그를 가리켜 성경은 구스인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구스는 오늘날 에디오피아를 말합니다. 에벳멜렉은 에디오피아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시드기야의 환관이었습니다. 말 그대로 고환을 거세한 자로서 왕궁에서 궁녀들을 관리하던 자였습니다. 그런 그가 지금 하나님의 사람 예레미야를 살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7절에서 예레미야가 구덩이에 던져졌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런 후에 그는 왕에게 찾아가 예레미야를 살리려는 의사를 전달했습니다.

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내 주 왕이여 저 사람들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행한 모든 일은 악하니이다 성 중에 떡이 떨어졌거늘 그들이 그를 구덩이에 던져 넣었으니 그가 거기에서 굶어 죽으리이다 하니

 

환관이었던 에벳멜렉은 왕에게 두려움 없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레미야에게 행한 모든 일은 악하니이다라고 말입니다. 그가 높은 관리도 아니었고 환관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왕에게 나가 왕의 묵인 하에 이루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 악하다고 말한다는 것은 목숨을 내어 놓아야 할 수 있는 말이었습니다.

 

그는 거세한 환관이었으나 그의 행동은 전장에서 용맹을 떨치는 장군 같았습니다. 그와 비교하여 왕은 가장 높은 권좌에 앉아 있었으나 거세한 환관보다 못한 자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못난 왕은 에벳멜렉의 용기 있는 조언에 힘을 냅니다. 그래서 그에게 명하기를 삼십 명을 데리고 가서 예레미야를 죽기 전에 구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용기 있는 한 사람의 결단은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던 자를 용기 있게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세상의 가치관이 진리처럼 여겨지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이 시대 속에서도 바른말을 하고 바르게 행동하는 진정한 용사가 됩시다.

 

에벳멜렉의 수고로 예레미야는 구덩이에서 나오게 됩니다. 이렇게 구출된 예레미야를 시드기가 찾아옵니다. 그리고 비밀히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없는지를 물었습니다. 이에 예레미야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든지 죽이지 말라는 약속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17절과 18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레미야가 시드기야에게 이르되 만군의 하나님이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만일 바벨론의 왕의 고관들에게 항복하면 네 생명이 살겠고 이 성이 불사름을 당하지 아니하겠고 너와 네 가족이 살려니와 네가 만일 나가서 바벨론의 왕의 고관들에게 항복하지 아니하면 이 성이 갈대아인의 손에 넘어가리니 그들이 이 성을 불사를 것이며 너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이번에도 예레미야는 동일한 말씀을 전했습니다. 동일하게 바벨론에 항복하면 살 것이고 예루살렘도 불사름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항복하지 않으면 성은 불타고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시드기야가 예레미야에게 찾아와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했느냐고 물으며 듣고 싶었던 것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어서가 아닙니다. 그는 이 위기를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넘길 수 있을 것이라는 말씀을 듣고 싶었던 것입니다. 어리석은 인간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생각을 맞추려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욕심을 지지해 주는 말씀을 해주시기를 기대합니다. 이런 신앙의 모습을 버리지 않으면 성장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향해 야고보서 15절부터 8절에서 말했던 사람과 같습니다. 기록되기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두 마음을 품었다는 것은 오늘 시드기야 같은 사람입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존중하지만 한 편으로는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고 하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자신의 욕심을 지지해 주는 말씀이 아니면 응답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온전한 뜻을 알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예레미야의 말을 들은 시드기야의 대답이 있습니다.

1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시드기야 왕이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나는 갈대아인에게 항복한 유다인을 두려워하노라 염려하건대 갈대아인이 나를 그들의 손에 넘기면 그들이 나를 조롱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시드기야 왕에게는 하나님보다 더 두려운 존재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람입니다. 본문에서 나는 갈대아인에게 항복한 유다인을 두려워하노라 염려하건대 갈대아인이 나를 그들의 손에 넘기면 그들이 나를 조롱할까 하노라라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도 시드기야의 우유부단한 성격이 다시 보여 집니다. 그는 예레미야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으나, 이런 저런 이유를 대면서 따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레미야는 이미 바벨론에 투항한 사람들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투항했다가 그들에게 푸대접을 받거나 조롱을 당할까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그는 본장 초반에서는 자신의 신하들을 두려워하더니 이번에는 이미 항복한 자들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아닌 사람들을 너무 두려워하는 자였습니다.

 

이렇게 사람을 두려워하는 시드기야에게 예레미야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20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레미야가 이르되 그 무리가 왕을 그들에게 넘기지 아니하리이다 원하옵나니 내가 왕에게 아뢴 바 여호와의 목소리에 순종하소서 그리하면 왕이 복을 받아 생명을 보전하시리이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복을 받아 생명을 보전하겠다는 것입니다. 이후에 보면 시드기야는 예레미야의 권고를 듣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생각대로 바벨론에 대항하였고 결국 자신이 보는 앞에서 자식들이 죽고 자신은 눈이 뽑혀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비참한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시드기야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시드기야의 모든 두려움의 원인이 여호와께 대한 불신에 있었습니다. 시드기야가 참으로 염려하고 두려워해야 할 것은 다름 아니라 여호와의 소리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 대한 신앙이 결여되어 있었기에 자신이 예상할 수 있는 온갖 두려운 상황의 가능성을 생각하며 염려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누구를 의식하고 살고 계십니까? 하나님이십니까? 세상입니까?

사람들의 평가를 두려워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실지 생각하지 않고 살지는 않습니까?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사람들의 비위를 맞춰 살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분들은 없습니까?

세상 가치관에 맞춰 살아야 성공한다고 여겨 그렇게 살다가 하나님과 멀어지는 어리석은 이들은 없습니까?

 

누구를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일까요?

이런 질문에 주님은 마태복음 1028절을 통해 답을 주셨습니다.

기록되기를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은 우리의 몸만 죽일 수 있는 존재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무도 죽일 수 없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몸 뿐 아니라 영혼까지도 죽이는 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를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이 말씀 한 마디로 답은 나온 것이죠.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요한계시록 11장에도 사탄은 마흔두 달 동안 성전 바깥마당만 밟은 뿐 성전은 해할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사탄은 성도의 몸은 해할 수 없으나 영혼은 상하게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분명한 진리가 있음에도 우리는 왜 하나님보다 사람을 두려워할까요? 왜 하나님보다 환경을 더 무서워할까요? 당연히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주님은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라고 하셨고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28:20)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을 당시 유대인들이 자신을 공격하는 상황 속에서 그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데 집중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말하기를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1:10)라고 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제목이 누구를 의식하고 사십니까?”입니다. 누구를 의식하고 사십니까? 하나님입니까? 사람입니까? 하나님입니까? 세상입니까?

바라기는 오직 하나님만 의식하고 사는 존재가 됩니다. 그러면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도 존귀하게 되는 복을 받을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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