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4장 1-16절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는 교회) 하림교회 황규관 목사 www.storybible.kr -성경통독원-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는 교회

에베소서 41-16

 

오늘은 우리 하림교회가 설립된 지 15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그 동안 어려움도 많았지만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15년을 이어왔고 우리 교회를 통해 많은 영혼들이 주님을 만나며 많은 사역자들과 성도들이 말씀으로 훈련받고 나가 자신이 섬기는 자리에서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들의 15년간의 수고와 애씀은 의미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이런 의미 있는 날에 우리는 교회는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교회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일명 교회론이라고 말하는 성경인 에베소서를 보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집니다.

 

에베소서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주제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교회의 구성은 누구이며 그 구성원들은 어떻게 교회를 유지하고 성장시키며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합니다. 교회는 헬라어로 에클레시아라고 합니다. 이 뜻은 밖으로 불러 모은 자라는 뜻입니다. 세상 밖으로 끌어내어 모아 놓은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 있는 공동체, 두 사람 이상이 모이면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건물이 교회가 아닌 것이죠. 교회란 성도들의 모임입니다.

 

그런데 이 성도들은 어떤 존재일까요? 성도들은 1장에 성부의 예정하심과 성자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어주심과 성령의 보증하심으로 주의 백성이 된 자들을 성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도가 된 존재들에 대해 2장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데 성도는 죽었던 존재였으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살아난 자라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는 죽었던 존재였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자가 아니라 죽었던 존재가 맞습니다.

그런데 왜 죽었을까요? 그것은 죄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의 삯은 사망(6:23)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무슨 죄가 있는 것일까요?

 

먼저는 아담과 하와의 범죄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원죄라고 합니다. 그 범죄로 인해 인간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들은 저주를 받아 고통이 임하게 되었고 인간은 에덴에서 쫓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죄인이 에덴에 들어올 수 없도록 화염검을 두어 지키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인간 스스로는 천국을 찾을 수도, 얻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모든 민족들이 종교를 갖고 있는 것은 그들 속에 남아 있는 종교성, 절대자를 찾는 마음 때문입니다. 고립된 지역에 사는 사람도 종교를 갖고 있습니다. 심지어 자신은 무신론자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지만 절대자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타락한 인간의 본성 속에도 하나님을 찾고자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에덴에서 쫓겨난 인간을 성경은 죽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아담의 범죄와 자신이 지은 죄로 인해 죽은 자입니다. 제가 전도사 때 알고 지내던 사람 중에 한 성도는 말하기를 자신은 죄가 없답니다. 그런데 교회만 가면 목사님이 우리는 죄인이라고 하는데 이해 할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정말 그분은 욕도 안하고 사회 윤리적인 면에서도 흠잡을 때가 없는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그분과 예기 할 때는 항상 이 문제를 가지고 논쟁을 벌였는데 그랬던 그분이 어느 날 제게 내가 죄인인 것을 알았다고 하는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죄 문제로부터 자유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로마서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3:9)고 했고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3:23)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옛 사람에게 말 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5:21,22)라고 하셨고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5:27,28)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죄를 지은 자들인 것입니다. 큰 죄, 작은 죄는 없습니다. 세상의 법으로는 살인과 살인미수가 다르고 은행을 턴 것과 구멍가게서 과자 하나를 훔친 것은 분명 경중이 나누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이 모든 죄를 그냥 죄라고 합니다. “하말티아라는 단어 하나입니다. 우리의 기준으로 그것이 크든 작든 모든 불법은 죄입니다. 예로 들어 볼까요? 바위도 물에 가라앉고 모래도 물에 가라앉습니다. 똥물에 빠진 것도 더럽고 똥물이 조금 튄 것도 더럽습니다. 죄는 죄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 대가는 사망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죄를 선행으로 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착한 일을 많이 하면 극락이나 천국에 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가르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을 하나 말하지 않습니다. 선행을 얼만 큼 해야 하느냐? 입니다. 그래서 연옥이라는 말이 나왔고 윤회라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22년 전에 열반하셨던 성철스님은 마지막 남긴 열반송에서 자신이 이승에서 지은 죄업이 얼마나 많은지 수미산을 넘치고 있다 했습니다. 그렇게 고행과 수행을 했지만 자신의 죄를 씻을 수 없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어떠한 노력으로도 죄의 대가를 지불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영혼의 문제 중에 가장 큰 문제는 우리의 죄를 속하기 위해 우리 자신이 대가를 지불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의 생명을 내어놓는 순간 그것으로 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명이 두 개도 아닌 하나이니 죄의 대가로 하나 밖에 없는 생명을 지불한다면 그 뒤는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는 것은 예수님이 신이시라거나 예수님이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는 것 이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위해 대신 죽어주심으로 우리에게는 더 이상 죄를 물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한 것이지만 형벌이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21절은 우리를 허물과 죄를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다고 하고 있습니다.

22절부터 5절까지 같이 읽어 볼까요?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라는 말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구약 제사제도에서 양을 제물로 가져온 자의 죄를 양의 머리에 안수함으로 모두 전가시켜 죽임으로 제물의 주인의 죄가 모두 사하여 진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모두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었으나 하나님께서 사흘 만에 다시 살려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믿는 모든 자는 그와 함께 생명의 부활을 얻은 것입니다.

 

이렇게 생명을 얻은 자들은 이제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된 것입니다.

에베소서 213절부터 18절까지 같이 읽겠습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먼데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순간 인종과 민족과 배경을 초월하여 한 형제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내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형제, 자매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가 된 우리들을 향하여 요구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4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하나님을 우리를 생명으로 부르시고 부르신 우리들에게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합당하게에 해당하는 헬라어 악시오스는 문자적으로 다른 들보를 하나 더 세운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들이 삶 속에서 어떤 기준을 세워야 함을 의미 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삶을 살아가는 자로서의 삶의 기준 뿐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의 삶의 기준을 하나 더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게 되면 이전과는 다른 삶의 기준을 세우고 그것을 지키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2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는 것에 대해 구체적인 요구는 먼저 용납하는 것입니다. 국어사전은 이 말은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잘못이나 입장, 형편 따위를)너그러이 받아들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헬라어로는 아네코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들어 올리다. 지지하다. 버티다. 견디다. 너그럽게 보아주다. 관대히 다루다. 묵인하다. 자제하다등입니다.

 

그러므로 용납한다는 것은 상대를 너그럽게 보아주고 그의 실수와 악행에 대해 견디거나 묵인하고 그를 향한 분노를 자제하며 나아가 그를 지지해 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용납하는데 그 자세에 대해 말해줍니다. 그것은 우리가 읽은 대로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입니다.

 

먼저 겸손이것은 자신의 부족과 무가치함을 깨닫고 자신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마음 자세입니다(2:3). 당시 겸손은 비열한 마음과 노예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미덕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친히 낮아지시는 모범을 통해 겸손의 미덕을 보여주셨기 때문에(2:6-11; 벧전5:5)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성도들에게 요구 되는 것입니다.

 

이어서 온유입니다. 이 말은 헬라어로 프라위테스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프라위스라는 말에서 파생되었는데 그 뜻은 길들여 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성도에게 요구되는 온유는 말씀으로 훈련되어 진 상태를 말합니다. 예수님처럼 훈련된 상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그러기에 교회가 사람들을 용납할 때 온유해야 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보이신 방법을 본받는 것입니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은 향하여 하신 행동을 보고 그것을 본받는 것이 온유입니다.

 

이어지는 말은 오래 참음입니다. 왜 오래 참으라고 하는 것일까요? 당연히 상대가 오래 참을 수 없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전서 514절은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래 참음은 복수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복수하지 않는 정신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사랑 가운데서서로 용납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타인을 용서하고 용납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사랑입니다. 사랑하면 모든 것이 용납됩니다. 아내를 사랑하면 처갓집 말뚝을 보고도 절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면 그의 모든 것이 아름다워 보이고 긍정적으로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 안에서 하라는 말은 어떤 보상이나 조건을 내걸지 않은 자기희생적이고 무조건적으로 행동하는 모습을 말합니다. 사랑 안에서 서로 용납하는 것은 상대방의 연약함과 결점을 포함한 모든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사랑 안에서 서로 용납하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 성도 그리고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는 주께서 보내주신 영혼들을 용납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가 가난한 자건 병든 자건, 그 어떤 형편에 처해있고 어떤 부류의 사람이건 용납해야 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는 것의 두 번째는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것입니다.

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여기서 하나 되라고 하지 않았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하여 하나 된 것은 이미 과거에 완성된 일임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나가 된 것일까요? 그것은 한 성령이 각 사람 속에 거하시는 것으로 하나가 된 것입니다. 이전에는 사탄의 영이 우리 속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순간 우리 속에 성령이 거하게 된 것입니다. 엄격히 말하면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오심으로 믿는 자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한 한 성령인 것입니다. 모든 성도 속에 거하시는 분이 동일하신 성령임으로 하나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4절부터 6절에서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 된 것을 지킬까요? 그것은 평안의 매는 줄로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평안의 매는 줄이란?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원수 된 관계를 화해시키고,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의 장벽을 허물고 화해를 이루셨으며(2:14-18)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 됨을 유지하도록 하기 위해서 평안과 화해의 대리자라는 직분을 주셨습니다(고후5:18). 이러한 평안은 하나님께서 주신 일치가 분열되지 않도록 보호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용납하고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 공동체를 운영하시는 방법이 있습니다.

7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하나님은 지금까지의 교회 전체의 하나 됨이라는 주제에서 방향을 바꿔 이제는 교회 전체를 이루고 있는 각 지체 곧 개인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 공동체를 위해 성도 개인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의 문제를 다룹니다.

 

그러면서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다고 합니다. 여기서 은혜란 말은 헬라어 카리스입니다. 이 은혜라는 말에서 파생된 말은 은사입니다. 그런데 본 절에서는 은혜은사를 동일하게 취급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은사의 다양성은 하나 된 몸을 이루는 각 지체인 성도들의 조화를 강화시키며 촉진시켜 줄 뿐만 아니라 교회의 하나 됨을 충만한 상태로 계속 유지하게 합니다.

 

이렇게 각 사람의 분량대로 은혜를 나누어 주신 이유는 교회가 교회로서 역할을 감당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를 교회의 성장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어제 밤에 아는 목사님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그 분은 아주 힘이 빠진 목소리로 제게 푸념을 늘어놓았습니다. 그 분은 자신이 교회를 개척하지 몇 년이 되었는데도 조금도 성장하지 못했다고 힘들어 했습니다. 그러는 중에도 한 사람의 신앙이 아주 많이 성장해서 위로는 된다고 하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 목사님의 교회는 진정한 의미에서 성장한 것입니다. 우리는 성장을 숫자와 규모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요구하고 바라시는 성장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각 지체인 성도들이 주님을 닮아가며 그 신앙의 깊이를 더 해가고 서로 조화롭게 사랑하는 살아가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장하기 위해 각 성도들에게 분량대로 나누어 주신 것을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0절부터 12절까지 같이 읽겠습니다.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그러니까 우리가 교회 생활을 하며 직분을 맡고 그것을 감당하는 것을 통해 구체적인 성장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25절은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되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23절부터 8절에서도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각 지체의 한 부분으로 살아가면 사역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다 보면 종종 다툼이나 갈등이 생기게 됩니다. 이러한 때를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212절부터 27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몸은 한 지체뿐만 아니요 여럿이니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냐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그런즉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그럴 필요가 없느니라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사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본문 15절과 16절을 함께 읽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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