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선지자와 참선지자

예레미야 28

 

21세기인 오늘날에도 자신을 선지자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실 주의 백성들은 모두 선지자입니다. 세상을 향하여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는 모두 선지자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자신만 미래의 일에 대해 알고 있는 선지자라고 말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지난해 홍혜선이란 여자가 1214일 새벽 430분에 전쟁이 일어날 것이며 국민의 절반이 죽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일은 일어나지 않았음에도 그는 자신의 말에 대해 사과하기는 커녕 "전쟁 취소는 없다"면서 14일 오전 430분 자신이 예언한 정확한 시간에 전쟁이 이미 시작했다고 주장합니다. 국민들이 전쟁이 이미 났음에도 모르고 있는 것은 종북 세력이 정부와 언론을 장악했기 때문이랍니다. 그는 구체적으로 전쟁에 대해 말했는데 14일 이전부터 20만 명의 북한군이 제2롯데월드를 포함한 지하 땅굴로 침투해 있다가 새벽을 기점으로 남한 내에 들어왔답니다. 그러면서 홍씨는 사람들에게 "2롯데월드나 청와대에 가서 직접 확인해 보라"고 당당하게 말합니다. 이 여자는 거짓 선지자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말로 자신의 말과 바람을 포장하여 사람들을 미혹하는 이들이 아주 많습니다. 노골적으로 드러난 거짓 선지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정통교회 안에 숨어 거짓 선지자 짓을 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은 한국교회의 슬픔이고 아픔입니다.

 

오늘 말씀은 이 거짓 선지자와 참 선지자의 모습에 대해 말하며 그들을 구별하는 법과 그들이 얻을 최후의 결과가 무엇인지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주께서 주시는 말씀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1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 해 곧 유다 왕 시드기야가 다스리기 시작한 지 사 년 다섯째 달 기브온앗술의 아들 선지자 하나냐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제사장들과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본문은 시드기야가 다스린지 4년 째 되는 해에 주어진 말씀입니다. 그런 것으로 보아 27장의 말씀은 시드기야가 다스리기 시작했을 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레미야는 시드기야가 즉위 할 때 메기 시작했던 멍에를 4년 동안 메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민족이 바벨론의 멍에를 메고 살아가야 할 날들을 자신의 행동을 통해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4년의 세월 동안 그는 조금도 변함없이 민족의 미래에 대해 외쳤던 것입니다.

 

그러던 중 거짓선지자가 등장하여 예레미야의 활동에 제동을 걸었습니다. 그는 기브온 출신의 앗술이란 사람의 아들이었습니다. 그가 기브온 출신이라는 것은 여호수아 이후에 기브온 사람들은 성전에서 물 깃고 나무하던 자들이었다가 다윗 때에 나단 선지자를 배출했던 지역 출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도 나단선지자처럼 선지자 역할을 하였는데 그의 선지자 사역은 바르지 않았습니다.

 

그의 이름을 하나냐라고 하고 있는데 이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자비하시다라는 말입니다. 비록 하나냐가 잘못된 신앙을 가졌긴 하였으나 이 이름은 유다가 곧 회복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던 자신에게 어울리는 이름이었습니다. 그는 그의 이름에 용기를 얻었는지 아니며 그 이름이 말하고 있는 대로 하나님의 자비는 자신들의 행동이 어떠하든지 간에 용납해 주실 것이고 믿었는지 모르지만 그는 그의 이름에 근거하여 이스라엘이 잘 될 것이라고 외친 자였습니다.

그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를 통해 전해졌던 말씀과는 전혀 같지 않았습니다.

2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일러 말씀하시기를 내가 바벨론의 왕의 멍에를 꺾었느니라

 

예레미야가 바벨론의 멍에를 멜 것이라고 예언했던 것과는 달리 하나님께서 바벨론의 멍에를 꺾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가 이 말을 얼마나 확신 있게 했는지 1절과 5절의 말씀을 보면 여호와의 성전에서 제사장들과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말했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칭 선지자로서 자신이 여호와와 교통하고 있고 또 그로부터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말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것을 믿게 하기 위해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란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일반적으로 선지자가 하나님의 예언을 전파할 때 그 메시지의 신적 권위를 강조하기 위해 사용한 표현이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냐도 이 표현을 사용함으로 자신의 거짓 예언을 은폐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하는 말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들은 것처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란 표현을 사용하였을 뿐 아니라 여호와의 성전에서 제사장들과 모든 백성이 보든 앞에서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서두에서 전 국민을 상대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했던 홍해선이란 여자처럼 말입니다. 이는 양의 탈을 쓴 늑대와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7:15-16)

 

이렇게 확신 있게 말하면 믿음이 연약한 자들과 종교성이 강한 자들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성도들은 항상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말씀을 연구하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26:41).

 

하나냐는 계속해서 거짓예언을 합니다.

3절과 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이 이 곳에서 빼앗아 바벨론으로 옮겨 간 여호와의 성전 모든 기구를 이 년 안에 다시 이 곳으로 되돌려 오리라 내가 또 유다의 왕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니야와 바벨론으로 간 유다 모든 포로를 다시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니 이는 내가 바벨론의 왕의 멍에를 꺾을 것임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시니라

 

하나냐는 바벨론의 멍에를 꺾었다고 하면서 그 결과로 이 곳에서 빼앗아 바벨론으로 옮겨 간 여호와의 성전 모든 기구를 이 년 안에 다시 이 곳으로 되돌려 오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말함은 포로들보다도 성전 기구를 먼저 말함으로서 당시 사람들의 지지를 끌어내려 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외식하는 제사장들이 하나님보다도 성전 기구 자체를 지나치게 중요시했기 때문입니다. 거짓 선지자 하나냐는 그 때의 시대정신에 아부하여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또한 유다의 왕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니야와 바벨론으로 간 유다 모든 포로를 다시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하나냐는 성전의 기물들과 더불어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간 여고니야, ‘여호야긴왕과 백성들이 함께 귀환할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여호야긴은 현 유다의 왕인 시드기야의 조카로, 즉위 3개월 만에 폐위되어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간 왕이었습니다.

 

그런 그의 복귀를 말함은 당시 시드기야 왕은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옹립된 왕이기에(대하 36:10) 유다 백성들의 민심을 사지 못했고 백성들은 여전히 여호야긴, 즉 여고니야를 합법적인 통치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냐는 이것을 간파하여, 여호야긴 왕의 귀환을 예언하여 백성들의 민심을 사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이에 백성들은 유다의 죄악과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한 예레미야보다는 희망에 가득 찬 예언을 하는 하나냐를 더 신뢰하였던 것입니다. 이는 영적 분별력을 상실한 유다 백성들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전해지는 책망의 말씀보다는 인간적인 기대를 만족시켜주는 복된 말을 전해주길 원하고 듣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미가는 그의 책 211절에서 사람이 만일 허망하게 행하며 거짓말로 이르기를 내가 포도주와 독주에 대하여 네게 예언하리라 할 것 같으면 그 사람이 이 백성의 선지자가 되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책망의 말씀에 대하여는 그들이 말하기를 너희는 예언하지 말라 이것은 예언할 것이 아니거늘 욕하는 말을 그치지 아니한다(2:5)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선포한 하나냐의 말에 대해 예레미야의 반응이 있습니다.

6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선지자 예레미야가 말하니라 아멘, 여호와는 이같이 하옵소서 여호와께서 네가 예언한 말대로 이루사 여호와의 성전 기구와 모든 포로를 바벨론에서 이 곳으로 되돌려 오시기를 원하노라

 

예레미야는 하나냐의 예언에 하나냐의 예언대로 되기를 원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이렇게 반응한 것은 예레미야가 진짜 그렇게 믿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레미야도 하나냐의 예언대로 되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동안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생각해 보면 절대로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바로 예레미야 자신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이렇게 반응한 것은 정말로 그렇게 되기를 자신도 바란다는 의미와 함께 하나냐의 예언에 대해 빈정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 주의 종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이 모두 잘 되길 원합니다. 주의 백성들은 어떠한 짓을 저질러도 나가도 복을 받고 들어가도 복을 받길 바랍니다. 그렇다고 책망의 말씀과 경고의 말씀을 전하지 않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을 맡은 자들의 고민인 것입니다.

 

하나냐의 말에 비아냥거린 예레미야는 7절에서 9절을 통해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7절부터 9절까지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나 너는 내가 네 귀와 모든 백성의 귀에 이르는 이 말을 잘 들으라 나와 너 이전의 선지자들이 예로부터 많은 땅들과 큰 나라들에 대하여 전쟁과 재앙과 전염병을 예언하였느니라 평화를 예언하는 선지자는 그 예언자의 말이 응한 후에야 그가 진실로 여호와께서 보내신 선지자로 인정 받게 되리라

 

예레미야는 하나냐에게 자신의 말과 하나냐의 말 중에 누구의 말이 참인지는 시간이 지나면 알 수 있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이렇게 참과 거짓의 구별에 대해 말하면서 참선지자들의 메시지 내용과 거짓 선지자들의 메시지 내용의 차이를 말해 줍니다.

 

참선지자는 전쟁과 재앙과 전염병을 예언하였고 거짓선지자들은 평화를 예언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참선지자는 재앙만을 말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위로와 회복도 예기하나 죄에 대해서도 분명히 지적하는 말씀을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거짓선지자는 그 백성의 죄를 지적하지 않고 오직 복과 평안만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거짓선지자는 사람들의 회개를 목적으로 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만 합니다. 그러나 참선지자는 사람들의 회개를 위하여 장차 임할 심판을 서슴치 않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거짓선지자들은 늘 혈육에 속하여 움직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사로잡혀 생각하거나 말할 줄 모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말만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 선지자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혈육을 거스립니다. 그러기에 사람을 즐겁게 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을 즐겁게 하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혈육에 얽매인 것 즉, 이 땅의 것은 온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1:17)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참선지자와 거짓선지자가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의 회의에 참여한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차이입니다(23:18, 22). 이것은 분명하고 엄청난 차이입니다. 한 사람은 여호와의 회의에 참석했었던 반면에 다른 한 사람은 그러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백성은 말과 행동을 하기 전에 여호와의 회의에 참여해야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 땅의 사역자들은 더욱 그러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의 생각에서 나온 말을 하지 않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말을 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나아가 이 둘의 또 다른 차이는 주님의 말씀에 어떻게 반응하느냐하는 것입니다. 한사람은 여호와의 무서운 심판의 메시지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반면에 다른 한 사람은 아전인수격으로 하나님의 뜻을 곡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안전인수격으로 곡해한다는 것도 과분합니다. 그들은 아예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자들입니다. 그래서 마음에서 지어낸 말을 하는 것입니다.

 

또한 두 사람의 극명한 차이는 특권의식의 유무입니다. 한 사람은 이 백성의 거룩하고 겸손한 순종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분명한 청사진을 가지고 있었지만 다른 한 사람은 이스라엘의 선민으로서의 특권만 내세우고 그 특권이 왜 있는가 하는 책임과 의무에 대해서는 무지하였습니다.

 

이런 엄청난 잘못은 소위 경건하고 믿음이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도 범하여 왔던 비극입니다. 그들은 바로 이 하나냐와 같이 자신들의 신앙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고 혼동해 버리곤 합니다. 진정한 신앙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고 참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언했던 선지자들의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는 당시에는 말씀에 온전히 붙들리지 않은 자들에게 혼동을 줄 수 있으나 시간이 흐른 후에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말이 응한 후에야 그가 진실로 여호와께서 보내신 선지자로 인정받게 되리라라고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참선지자와 거짓 선지자의 부인할 수 없는 기준은 그의 예언 성취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신명기 1822절에서 만일 선지자가 있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제 마음대로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하지 말지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예레미야의 말을 들은 하나냐는 자신의 말이 확실함을 보여 주기 위해 아주 강력한 행동을 하였습니다.

10절과 1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선지자 하나냐가 선지자 예레미야의 목에서 멍에를 빼앗아 꺾고 모든 백성 앞에서 하나냐가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이 년 안에 모든 민족의 목에서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의 멍에를 이와 같이 꺾어 버리리라 하셨느니라 하매 선지자 예레미야가 자기의 길을 가니라

 

하나냐는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예레미야의 목에 있는 멍에를 빼앗아 꺾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말이 옳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기 위해 거친 행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평화에 대해 반대의사를 말하는 예레미야의 말과 행동이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극단적인 행동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멍에를 꺾는 행동을 하면서 정확한 기한을 정하였습니다. 그것은 2년 안에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 것은 70년간 유다가 바벨론의 지배하에 있게 될 것이라는 예레미야의 예언에 대해 정면으로 공박하기 위해 자신도 구체적인 기간까지 제시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예언은 반바벨론 동맹과 반역을 꾀하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큰 위로와 격려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냐가 이렇게 생각하고 사람들이 이 말을 믿었던 이유는 당시 바벨론 내의 혼란한 정세와 국제적으로 반바벨론 정서가 한창 무르익던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말씀 보다는 상황과 자신들이 원했던 것에 대해 반응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반응하고 말하는 하나냐에게 예레미야는 더 이상 아무 반응도 하지 않습니다. 단지 자기의 길로 갈 뿐이었습니다. 그곳을 피했습니다. 그는 더 이상의 논쟁은 무의미하며 하나님께서 장래의 구체적 사건을 통해 예레미야 자신의 메시지의 진실성을 입증해주시리라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도 바른 말씀을 전하는 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은 거짓선지자들의 말이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으나 반드시 승리하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 없이 전하고 듣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가 성도들에게 요구하는 그 요구에 굴복하여 사는 자들이 아니라 세상이 싫어하고 어리석다고 말해도 말씀이 요구하는 삶을 사는 자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참선지자와 거짓선자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이어지는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2절부터 17절까지 같이 읽겠습니다.

선지자 하나냐가 선지자 예레미야의 목에서 멍에를 꺾어 버린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이르시기를 너는 가서 하나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나무 멍에들을 꺾었으나 그 대신 쇠 멍에들을 만들었느니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쇠 멍에로 이 모든 나라의 목에 메워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을 섬기게 하였으니 그들이 그를 섬기리라 내가 들짐승도 그에게 주었느니라 하라 선지자 예레미야가 선지자 하나냐에게 이르되 하나냐여 들으라 여호와께서 너를 보내지 아니하셨거늘 네가 이 백성에게 거짓을 믿게 하는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너를 지면에서 제하리니 네가 여호와께 패역한 말을 하였음이라 네가 금년에 죽으리라 하셨느니라 하더니 선지자 하나냐가 그 해 일곱째 달에 죽었더라

 

하나님의 말씀이 다시 예레미야게 임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예레미야는 민족이 바벨론인들의 지배를 받게 될 것임을 다시 선언하러 하나냐에게 돌아왔습니다. 그는 바벨론의 멍에를 더 강력하게 메게 될 것을 말씀하였습니다. 종전까지는 나무로 된 멍에를 통해 말씀하였으나 이제는 쇠로된 멍에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련의 일들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참선지자는 몽상가나 공상가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재치가 넘치는 정치평론가도 아니며, 더군다나 자신 스스로의 생각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도 아닌 것입니다. 그의 말은 여호와로부터 주어진 것이었으며 전에 그가 전했던 것과 내용이 다른 그 어떤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사용되는 어휘가 더 강경해졌다는 것뿐입니다.

 

하나냐가 나무로 된 상징적 기구를 꺾었다고 한다면, 이제는 꺾이지 않는 쇠 멍에가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쇠 멍에를 메게 하심으로 다시는 그 누구도 그 멍에를 꺾지 못하도록 하여 유다의 심판이 그 누구도 돌이킬 수 없다는 단호한 의지임을 표명하고 계신 것입니다.

 

결국 하나냐의 방해 행위는 하나님의 계획에 아무런 변화도 주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훼방하려는 인간의 노력은 오히려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뿐이었습니다. 하나냐의 행동은 비록 유다 백성들에게 희망을 안겨주는 것이었지만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었기에 개인과 국가적으로 상황만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았을 뿐입니다.

 

거짓선지자들이 악한 이유는 이것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예언을 통해 그들만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말을 들은 백성들을 망하게 합니다. 그래서 거짓선지자는 악한 것입니다.

 

15절을 보면 하나냐에 대해 여호와께서 너를 보내지 아니하셨거늘 네가 이 백성에게 거짓을 믿게 하는도다이라고 합니다.

 

하나냐는 백성들로 하여금 거짓을 믿도록 하였으며 여호와의 뜻과 계획에 정 반대되는 입장에 서서 반역을 범하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백성들은 허황된 희망에만 사로잡혀 자신들의 죄악을 회개하기는커녕 예레미야 선지자를 더욱 핍박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냐는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마지막으로 주신 회개의 기회를 상실토록 하는 중범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이렇게 거짓을 말하고 백성들로 믿게 했던 하나냐에게 엄중한 심판이 임하였습니다. 그것은 금년에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는 여호와의 보내심을 빙자하였습니다. 그래서 여호와는 그를 죽이시겠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거짓 예언하는 것은 죽을죄를 지은 것입니다. 신명기 1820절은 분명히 말하기를 만일 어떤 선지자가 내가 전하라고 명령하지 아니한 말을 제 마음대로 내 이름으로 전하든지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면 그 선지자는 죽임을 당하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냐에 대한 심판과 처벌이 인간의 손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의해 직접 집행될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끊어버리실 것이며, 이 예언은 2년 내도 아닌 바로 금년 내로 성취되고 말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 말씀이 있은 지 두 달 만에 그는 죽었습니다.

 

1절에 따르면 예레미야의 하나냐에 대한 저주 예언이 5월에 전달되었고 죽은 달은 7월이었기 때문에 그의 죽음은 두 달 만에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냐는 2년 내로 유다가 회복되리라고 예언했으나 자신은 두 달 내로 죽고 말았습니다.

 

오늘 말씀은 거짓선지자와 참선지자입니다. 이 시대도 혼란한 정세와 오염된 말씀을 발판 삼아 거짓선지자들이 활동합니다. 바라기는 참선지와 거짓선지자를 구별할 줄 아는 눈이 생기길 바랍니다. 또한 자신이 말씀을 조금 알고 기도를 조금 하는 것을 발판 삼아 거짓선지자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바른 성도의 삶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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