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드 한 옥합

요한복음 121-11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님은 베다니에 가셨습니다. 그곳은 11장에서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가 살던 곳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모시고 잔치를 벌였습니다. 이 때 나사로는 사람들 사이에 앉아 있었고 마르다는 쉬지 않고 잔치를 위해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마리아는 예수님께 다가와 예수님의 발에 나드 한 옥합을 부어 드리고 자신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겨드렸습니다. 이 일로 인해 방 안 가득 나드 향이 퍼졌고 이를 본 가룟 유다는 마리아를 책망하며 이르기를 이것을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면 좋았을 뻔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유다의 말을 들으신 예수님은 마리아의 행하는 일을 가만히 두라고 하시며 이는 자신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간직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가난한 자들을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에 대제사장들은 나사로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 것을 시기하여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했다고 본문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예수님은 유월절 엿새 전에 베다니에 가셨다고 요한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때는 예수님께서 죽으시기 엿새 전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유월절을 며칠 앞두고 베다니에 가신 것은 이제 당신의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의 위협이 여전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3km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찾아가셨습니다. 사실 11장에서 나사로가 죽었을 때 찾아가셨던 것보다 더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그 사건의 현장에 다시 가신 것입니다. 10절의 말씀처럼 대제사장들은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할 정도였는데 그 장소에 다시 가셔서 당신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하심은 당신을 유월절 어린양으로 인식하셨고 이제 이틀 후에 유월절 어린양으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베다니에 가셨을 때 사람들을 예수님을 위하여 잔치를 열었습니다.

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그들이 이렇게 잔치를 연 것은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려 주신 것에 대한 감사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이 때 나사로는 사람들 사이에 앉아 있었고 마르다는 일을 하고 있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마르다는 언제나 열심이었지만 본문에서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오라비를 살려주신 그 은혜로 인하여 진심을 다해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성도들의 섬김이 이와 같아야 합니다. 누군가는 마리다의 신앙을 격하시키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누가복음 1038절로 42절까지의 말씀 때문입니다.

 

나사로 사건 이전에 예수님께서 그 집에 가신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때 마리아는 예수님 발 앞에 앉아 말씀을 들었고 마르다는 그 때도 음식을 준비하느라 분주했습니다. 이에 마르다는 예수님께 나아가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으로 인해 사람들은 마리아의 믿음과 마르다의 믿음이라는 말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마르다의 행위를 하찮은 것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마르다에게 일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우선순위에 대한 말씀을 하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봉사와 수고보다 말씀이 우선이라는 것을 말씀하고자 하심이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마르다의 모습이 회복되어야 할 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발 앞에 앉아 말씀을 듣기를 좋아하지만 그 다음에 실천인 수고와 섬김, 헌신과 봉사는 없습니다. 이제 웬만한 목사들은 성도들의 성경적 지식 앞에 판단을 당하고 부끄러움을 당할 정도로 성도들은 말씀을 많이 알지만 헌신은 너무 적습니다. 헌신과 수고를 요구하면 머리를 굴리며 손익을 따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선진들이 적은 지식을 소유했음에도 많은 수고를 아끼지 않은 것과는 너무나 대조되는 현상이 지금 우리 한국교회의 모습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마르다의 헌신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마리아의 헌신이 있습니다.

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마리아의 이 모습은 파격적이라고 밖에는 할 말이 없는 모습입니다. 마리아의 행동을 보면 그녀는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은 것입니다.

 

이 행동을 하나씩 봅시다. 먼저 나드 한 근을 가져와 부었습니다. 한 근은 340g입니다. 나드는 이스라엘에서 나는 향료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동인도에서 나는 향료인데 나르도스타스자타만시라는 식물에서 채취하는데 해발 3,000미터 이상의 고산지대에서 자라는 식물의 뿌리에서 채취합니다. 그 양이 아주 적었기에 그 가격이 상당했습니다. 적은양이라 이동과 보관이 용이했고, 때문에 현금화하기가 쉬워 투자가치까지 있었습니다.

 

또한 나드향유는 여자가 시집을 갈 때 지참품목 중 하나였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시집을 갔고 오랜 동안 그 향을 남편과 귀한 손님들을 위해 조금씩 사용했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께 부어드린 나드는 자신의 결혼을 위해 귀하게 준비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귀한 나드를 마리아는 예수님께 부어 드린 것입니다. 그가 이렇게까지 한 것은 예수님을 극히 존경했으며, 자기 오라비를 다시 살리신 그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가득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의 가장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향유를 그의 발에 붓는 헌신을 하였던 것입니다. 마리아의 이 행동은, 예수님을 경배하는 의미와 존귀히 여기는 의미를 가진 것입니다.

 

다음으로 볼 그녀의 행동은 나드를 예수님의 발에 부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귀한 손님이 집에 오면 식사가 절정에 이를 때 그 손님의 머리에 한 방울을 떨어 뜨려주었습니다. 이렇게 나드를 부어 드린 사람은 그 날 그 집의 잔치에 주빈이라는 표시였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자신의 가족이 잔치할 수 있게 해준 분임을 분명히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에 잔치를 베풀어 주신 분이 우리 주님이십니다.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시고 절망에서 소망을 품게 해주신 분이 주님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에게 향유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신 것입니다.

 

이렇게 머리에 부을 기름을 마리아는 발에 부어 드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겨 드린 것입니다. 사실 부어드린 것보다 더 파격적인 모습은 여인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겨 드렸다는 것입니다. 당시 손님의 발을 씻기는 일은 노예가 하던 일이었고 여인이 머리털을 푸는 일은 창녀가 하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아가 그렇게 한 것은 마리아의 예수님을 향한 사랑과 감사가 얼마나 큰지를 행동으로 고백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것으로 인해 방안에는 나드 향이 가득했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마리아의 이 행동으로 인해 방안 가득 향유 냄새가 진동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마리아의 행동을 칭찬하셨는데 마가복음 149절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라고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한 여인의 헌신으로 방안 가득 향이 퍼진 것처럼 그 여인의 이 헌신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기억되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한국교회와 세계 교회사 속에는 아름다운 헌신을 했던 사람들의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그 헌신과 수고로 교회는 성장하고 복음은 강력하게 전파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칭찬과는 반대의 모습이 있습니다. 그것은 가룟 유다의 말입니다.

4절부터 6절까지 같이 읽겠습니다.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예수님은 그의 헌신을 길이 기억될 것으로 말씀하셨다면 가룟 유다는 마리아의 헌신을 아무 가치 없는 행위라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말하기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니 아니하였느냐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사실 제자들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고 요한은 가룟 유다만을 언급했습니다. 마태복음 268절에 보면 제자들도 가룟 유다 못지않았습니다. 기록되기를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고 했습니다.

 

제자들의 이러한 모습은 세상 생각으로만 계산하는 그릇된 생각에서 일어난 불평입니다. 이 불평은, 한 영혼이 예수님에게 사랑을 붓는 것이 천하보다 귀한 줄 모르는 어두움에 기인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마리아의 헌신을 허비했다고 했던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본문에서는 가룟 유다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가는 자이기 때문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사실 요한이 가룟 유다를 언급하고 있지만 마태의 진술로 하면 모두 그런 심정이었고 가룟 유다가 좀 더 했던 것입니다.

 

이들은 마리아의 헌신의 가치를 돈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마리아가 드린 나드의 가격은 본문에 삼백 데나리온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일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인 것을 생각하면 노동자가 일 년을 벌어야 모을 수 있을 정도의 비싼 물건이었습니다. 하지만 마리아의 헌신은 삼백 데나리온으로 살 수 없는 가치의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룟 유다와 제자들은 그것의 가치를 따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영적인 가치를 경제적 가치로 바꾼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수고와 헌신, 특별히 헌금을 돈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은 재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의 고백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고백,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해 주신 은혜에 대한 보이는 고백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고백을 드리면서 아까워하고 주판알을 튕기고 있는 것은 진정한 고백이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고백이 아니라 종교적 행위를 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종교적 행위란 신을 섬기는 사람으로 그에게 복을 받아야 하고 최소한 벌은 받지 않아야 하기에 어쩔 수 없이 하는 행위가 종교적 행위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헌금과 헌신은 그러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판알을 튕기는 순간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것은 영적 가치를 잃어버리고 경제적 가치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 경제적 가치는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분이 천지의 주인이신데, 이 땅의 모든 것이 그분의 것인데 우리가 얼마를 드려야 그분을 감동시킬 수 있는 것입니까? 그분을 감동시키는 것은 경제적 가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을 감동시키는 유일한 가치는 영적 가치, 즉 고백인 것입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헌금함 곁에 계셨습니다. 그 때 한 여인이 두 렙돈을 드렸습니다. 현재의 가치로 환산하면 천원에서 이천원 정도입니다. 이것을 보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12:43,44) 라고 하였습니다.

 

이 여인이 칭찬을 들은 것은 경제적 가치입니까? 아닙니다. 이 여인이 받은 칭찬은 영적 가치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가룟 유다 뿐 아니라 제자들이 모두 마리아의 헌신에 대해 책망한 이유를 요한은 도둑이기 때문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제가 종종 헌금에 대해 말씀드립니다. 그 이유는 우리들 속에 있는 도둑 때문입니다. 그 도둑은 가끔씩이라도 재물에 대한 바른 가치관에 대해 듣지 않으면 아주 담대해져 자신을 품고 있는 주인을 죽이기 때문입니다. 그 도둑은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들을 자신의 것인 줄 알고 자신의 주머니를 채우는 우리들의 악함입니다.

 

사람들은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십의 십,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 중에 일부를 떼어 내어 이 모든 것의 주인이 하나님임을, 우리에게 넘치는 복을 주신 이가 하나님임을 고백하며 드리는 것입니다. 이 고백이 없다면 우리는 가룟 유다와 다를 바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온갖 이유를 붙여 하나님께 드릴 시간과, 수고, 재능과 재물을 자신의 것인 양 착각하며 사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경제적 가치에 물든 도둑의 마음을 가지고 사는 자의 결정적 행위는 자신의 스승을 팔아버리는 행위를 낳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그리스도를 삶 속에서 부인하는 것입니다. 선택의 순간에 주를 버리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에 자신의 목을 메달아 자신을 죽이는 어리석음으로 결론짓는 어리석은 인생이 되고 만 것입니다. 평소에 자신 속에서 자라던 도둑, 즉 탐심이 자라 결국은 자신을 죽이는 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 중에는 이런 어리석은 사람이 없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렇게 도둑의 마음으로 마리아를 책망했던 가룟 유다에게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7절과 8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그 일에서 그것 외에 또 다른 것을 더 보셨습니다. 그것은, 그의 장례를 예비하는 의미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는 것은 향유를 남겨두라는 말이 아니라 그의 향유 붓는 행동을 중단시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행동이 예수님의 장례를 예비하는 의미를 가진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란 말은 헬라어로 테레세인데 이는 과거형으로 마리아가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 계속 보존해 왔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사랑을 입었을 때부터 예수님의 장례를 위하여 준비해 두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그냥 두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교회가 가난한 자들을 언제나 돌아볼 책임이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만 시간적 순서로 볼 때, 그 때에는 예수님의 죽으심의 중요성을 예언적으로 표시하는 의미에서 그 값 비싼 향유를 사용함이 합당하다는 것뿐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예언 행위는, 복음 전파의 행위인 것입니다. 그것은 지극히 귀한 일이며, 따라서 그 일을 위하여 값 비싼 향유라도 소비할만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마리아의 헌신, 나아가 우리들의 헌신은 예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쓰임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보다도 우선인 것입니다. 이러한 본은 먼저 예수님께서 보이셨습니다. 그분은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우리들의 구원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신 것입니다. 그 결과 생명들이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께 헌신하는 여인들과 사람들이 있을 때 예수님의 대적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9절부터 11절까지 같이 읽겠습니다.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보기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유대인들은 예수님과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도 보고 싶어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이것은 또 당국자들의 시기를 살 만한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모의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세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헌신하는 마리아와 마르다를 비롯해 예수님을 믿는 자들과

예수님께 자신들의 것을 드리는 것을 보면 그것의 경제적 가치에 눈이 멀어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던 제자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놀라운 행동과 말씀에도 믿기는커녕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예수님을 죽으려 했던 자들입니다.

 

이 시대도 세 부류로 나뉩니다.

 

예수님을 대적하여 교회와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대항하는 자들이 한 부류이고

다음은 예수님을 온전히 섬기지 못하고 영적 가치를 경제적 가치로 바꾸어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을 통해 경제적 부를 얻으려고 하는 자들이 두 번째 부류이고

마지막은 예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그 분을 믿을 뿐 아니라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드려 헌신하는 부류입니다.

 

바라기는 세 번째 성도가 되어 네게 있는 모든 것을 주를 위해 바치며 순전한 나드 한 근 같은 고백을 담아 삶을 주님께 드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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