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으라

요한복음 443-54

 

예수님은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전하시고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여기서 갈릴리란 갈릴리바다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갈릴리지역을 말합니다. 갈릴리 지역 중에 이미 2장에서 혼인잔치가 있었던 가나에 이르셨습니다. 이 때 갈릴리 상부에 위치한 가버나움에서 왕의 신하가 예수님께서 가나에 계시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왔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찾은 것은 자신의 아들이 죽게 된 것을 인함이었습니다. 예수님께 자신의 아들이 죽게 되었다고 말하며 같이 가셔서 살려달라고 청하였으나 주님은 가지 않으시고 그의 아들이 살았다고 말씀으로만 하셨습니다. 이에 그 신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돌아가다가 집에서 온 종과 만났는데 자신의 아들이 살았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래서 그 나은 시간을 물으니 예수님께서 살았다고 말씀하실 때였다고 말하였고 이 일로 그와 그의 온 집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43절부터 45절까지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이틀이 지나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며 친히 증언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 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

 

예수님은 사마리아에서 이틀을 유하시며 복음을 전하시고 예수님께서 자라신 갈릴리 지역으로 가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환영받지 못할 줄 알면서도 갈릴리로 가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고향에서는 환영받지 못할 줄 아셨지만 그곳에서도 복음을 전하셔야 했습니다. 그들이 환영하던지 하지 않던지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당신을 나타내 보이시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했고 그 선택과 그것에 따른 결과가 어떠하든지 주님은 당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이루시는 것에만 집중하신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이 말씀은 자신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게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복음을 전하다가 잡혀서 고난을 당하거나 죽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고향에서 환영을 받지 못했던 것처럼 그들도 자신들이 살아가고 있는 세상 속에서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11장에서 사탄이 마흔두 달 동안 성전마당을 밟을 동안 성도들은 천이백육십일 동안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하며 그 결과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죽으셨든 세상에서 죽어야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성도들이 박해받던 상황 속에서 바울도 디모데에게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통 받는 초대교회 성도들만 이런 상황에 처한 것이 아니라 예레미야도 에스겔도 그들이 나가 말씀을 전할 대상들이 자신들을 환영하지 않을 뿐 아니라 전갈과 가시같이 괴롭힐 것이라고 말씀하셨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시대 우리 주의 백성들이 복음을 들고 나가지만 세상에서 환영받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갈릴리에서 환영받지 못할 것을 아시면서도 들어가셨던 것처럼 우리도 복음 들고 세상으로 나가야 합니다. 우리를 환영하지 않는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것은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했다는 것입니다.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한 이유를 본문에서 밝혀 주는데 그것은 그들이 예루살렘 내려갔다가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이란 요한복음에서만 찾으면 성전을 정화하신 사건이었습니다. 이 외에도 많았을 것이라 보여지는데 그들은 명절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행하신 것을 보고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지금까지 몇 부류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났고 반응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행하심을 보면서도 믿지 않았고 사마리아 사람들은 표적과 기사가 없었지만 여인의 간증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본문의 갈릴리 사람들은 예수님의 행하심을 보고 영접했습니다. 사실 보지 않고 믿는 것이 가장 좋다고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지만 본문의 갈릴리 사람들처럼 예수님의 행하심을 보고서라도 예수님을 영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곳에서 두 번째 표적을 행하셨습니다.

46절과 4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오셨다는 것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그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지역 중 한곳을 찾아가셨습니다. 그곳은 첫 번째 표적이 있었던 가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르셨을 때 이 소식을 듣고 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본문에서 그를 소개하기를 왕의 신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로보건데 그는 나름 높은 지위를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그가 예수님을 찾아 온 이유는 이유를 알 수 없으나 그의 아들이 죽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찾은 이유, 그것은 결핍과 간절함 때문입니다. 이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는 종류가 다를 뿐 결핍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 결핍의 문제를 예수님께 가지고 나온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조차도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기웃거리고 잔머리를 굴려 해결하려고 합니다. 본문의 왕의 신하는 누가 진정으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줄 이인 줄을 제대로 안 것입니다.

 

문제가 있어서라도 주님을 찾는 것은 은혜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의 신앙은 문제가 신앙의 열심과 관심을 좌우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문제가 있으면 열심인 성도로 변하고 문제가 없으면 다시 나태해지는 자들이 아니라 문제의 유무와 상관없이 언제나 하나님 앞에 있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께 와서 말하기를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그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이 신하의 위기는 아들이 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죽을지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이대로 두면 반드시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기 전에 오셔서 살려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요한복음 11장에서 마르다가 자신의 오라버니가 죽은 지 사흘이 되어서야 도착하신 예수님께 당신이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라고 한 말과 같은 것입니다.

 

왜 사람들은 이렇게 죽게 된 것이 문제일까요? 죽지 않아야 영광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사실 예수님은 당신은 실패처럼 보이고 패배처럼 보이는 죽음을 통해 이기셨는데 우리들은 죽기 전에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죽기 전이란 말을 우리에게 적용하면 사업에 문제가 생기기 전에, 병이 더 악화되기 전에, 문제가 꼬이기 전에 해결해 달라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사업이 망하거나 건강이 악화되거나 문제가 꼬이면 하나님은 더 이상 안 계신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나 버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에게 법궤를 빼앗겼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로 법궤가 이스라엘로 돌아왔지만 아무도 관심 갖지 않고 아미나답의 집에 쳐 박아 두었습니다. 그 세월이 70년 이상이었습니다. 다윗이 왕이 되어서야 성안으로 모시고 들어왔는데 왜 그렇게 한 것일까요? 그것은 법궤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 때문입니다. 법궤에 더 이상 능력이나 복은 없었습니다. 법궤만 있으면 이길 줄 알았던 전쟁에서 무참하게 패배했습니다. 또한 돌아온 법궤의 뚜껑을 열다가 수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생각할 때 법궤는 능력도 없으면서 성질만 부리는 존재였던 것입니다. 더 이상 자신들이 원하는 이김과 복은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복은 주시지 않고 조금만 잘못해도 벌을 내이시는 분처럼 여겨지기에 하나님을 멀리하고 그런 하나님은 원치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이김만을 주시길 바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달리 내게 손해를 끼치거나 고통을 준다면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닌 것입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이처럼 이기고 잘되고 세상적 부와 명예가 있어야 하나님을 인정하게 된 것일까요? 그것은 사람들의 가치관과 관심이 이 땅에 얽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모습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푯대가 하늘에 있고 시민권이 하늘에 있기에 이 땅에서 잘되고 이기고 부와 명예가 높아지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배설물처럼 여겼습니다. 도리어 그는 살고 죽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의미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죽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라면 죽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실패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실패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이기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지심으로 이기셨고 그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도 지는 것으로 이겼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죽는 것, 이기는 것, 잘 되는 것이 항상 선이거나 이김이 아닌 것입니다.

 

어찌되었건 그는 가버나움에서 가나까지 달려왔습니다. 그 거리가 34km정도 되었음에도 그는 한 걸음에 달려왔습니다. 그렇게 한 것은 조금 전에도 말씀 드렸듯이 아들이 죽게 된 위급한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죽게 되었음이라라고 하였고 49절에서도 신하가 이르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라고 한 말처럼 이미 일반적인 소망을 끊어진 상태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은 일반적인 소망이 끊어진 사람들인 것입니다. 살아있으나 산 것이 아니라 에베소서 21절의 말씀처럼 이미 죽은 자들인 것입니다. 더 이상 살 소망이 없는 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소망 없는 우리들을 살려 주신 분이신 것입니다.

 

50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예수님의 선포가 있습니다. 그것은 네 아들이 살아 있다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아직 죽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죽어가고 있었던 것 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살아 있다고 한 것은 목숨 줄이 붙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신하의 아들의 생명이 놀라운 모습으로 회복 된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장차 그렇게 될 것이라는 것이 아니라 현재 그렇게 되었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 증거는 이 말씀을 듣고 돌아가던 왕의 신하가 길에서 마주 오던 자신의 종을 만나서 아들이 살았다는 소식을 듣고 그 시간을 물었더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그 시간이었다고 하는 것을 통해 이 말씀의 현재성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도 이 말씀을 선포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살아 날 것이다가 아니라 살았다고 표현하시는 성경의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이미 살려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표 기도자들이 기도할 때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살리시고란 말은 맞지 않는 말씀인 것입니다. 에베소서의 말씀처럼 죽었던 우리를 살리시고라고 해야 옳은 것입니다. 이미 산 것입니다.

 

이 놀라운 말씀을 들은 왕의 신하의 반응이 본문에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갔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이방인이었는지 유대인이었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하지만 그는 표적만을 바라던 사람들과 비교하여 볼 때 놀라운 믿음인 것은 확실합니다. 그는 말씀을 믿고 갔습니다. 그가 처음에 왔을 때는 예수님을 모시고 가려고 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의지하고 가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한나가 엘리 제사장의 말씀을 듣고 얼굴에 수색이 없이 집으로 돌아갔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마치 베드로가 밤새 고기를 잡지 못했지만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그물을 내리고, 금방이라고 삼켜 버릴 것 같은 파도치는 바다로 예수님의 오라는 말씀에 의지하여 발을 내 딛었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이 이 시대 성도들에게 필요한 믿음인 것입니다. 언제부터인가 한국교회는 표적신앙이 되고 말았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고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더 놀라운 신비적인 현상 앞에 신앙적 이성을 내려놓고 그것을 하나님처럼 섬기는 어리석음이 우리 속에 있습니다. 말씀만을 붙들고 자신에게 일반적인 어떤 기적이 일어나지 않아도 하나님만을 섬기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한국교회의 위기는 교회의 재정도, 사람들의 숫자도, 건물의 있고 없고도 아닙니다. 지금 한국교회의 심각한 문제는 말씀의 부재입니다. 성경을 일 년에 한번 읽는 사람의 숫자는 아무리 많이 잡아도 열 명 중에 한명도 되지 않습니다. 정기적으로 성경을 공부하는 사람은 그것보다 더 적습니다. 열 명 중에 아홉 명은 주일날 단 30분 목회자의 설교만 가지고 일주일을 살아가는 말씀 결핍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이 좋다 안 좋다고 평가하는 기준이 은사의 유무와는 상관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표적이 드러나면 그가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신앙, 참 영성은 말씀에 근거한 거룩한 삶임에도 불구하고 말씀대로 사는 삶은 실패자의 모습처럼 보이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공한 사람은 능력 있는 사람, 하나님이 함께 하는 교회라고 생각하는 이 세대야 말로 48절의 책망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48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못한다고 말씀하신 주님의 책망은 우리들이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신하가 예수님께 와서 자신의 아들의 병을 고쳐 달라고 간청했을 때 주님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이때 너희는 단수가 아니라 복수입니다. 이 말씀은 왕의 신하 한 명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당시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모든 사람들과 이 글의 일차 대상자였던 초대교회 성도들, 나아가 우리들에게 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표적과 기사를 보지 않으면 도무지 믿지 않는다는 말씀은 표적이 없으면 믿지 않는 자들에게 대한 책망이며 표적과 기사가 없어도 말씀만으로도 믿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우리들에게 믿음을 주기 위해 표적과 기사를 행하시며 당신에 대한 믿음을 갖기를 요구하고 이를 통해 생명으로 이르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표적 때문에 생긴 믿음에 대해 낮게 평가합니다. 가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고, 예루살렘에서 이런저런 표적을 행한 후 많은 사람들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습니다.(2:23)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마음을 두지 않으셨습니다.(2:24)

 

심지어는 표적을 보고 믿은 자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임금 삼으려 함을 알고 홀로 산으로 떠나셨습니다.(6:14,15) 그 이유는 그들의 믿음이 일시적인 믿음일 뿐 온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표적을 보고 믿은 사람들은 주님의 능력과 힘과 권력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그런 것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요한복음은 오히려 보지 않고 믿는 것의 귀함을 역설합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이 어떠한 기적도 행하지 않았지만 그의 말씀을 듣고도 믿는 자가 더욱 많아졌습니다.(4:41,42) 의심 많은 도마에게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20:29) 말씀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본문의 말씀처럼 표적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는 보고라도 믿으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래서 의심하던 도마에게 말씀하시기를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20:27)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 없는 연약한 자들에게 주신 이 표적으로 주님은 당신이 원하는 결과를 얻으셨습니다.

51절부터 53절까지 같이 읽겠습니다.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아 있다 하거늘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일곱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그의 아버지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아 있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

 

예수님의 살아 있다는 말씀을 듣고 가는 길에 하인들을 만났고 아이가 살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따져보니 예수님이 말씀하신 때였습니다. 그리고 그 표적의 결과는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었다는 것입니다.

이 표적을 듣고 읽는 유대인들은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살려낸 사건(왕상17:17~24)이나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려낸 사건(왕하4:8~37)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엘리야와 엘리사는 유대인들에게는 가장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아있는 선지자들입니다. 특히 엘리야는 죽지 않고 하늘로 승천했고, 유대인들은 구약에서 예언한 엘리야가 다시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4:5)

 

요한복음은 이 표적을 통해 예수님이 엘리야, 엘리사 같은 선지자이며 메시야라는 것의 표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믿음으로 생명에 이르도록 초청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 믿음이 표적이나 기사에 흔들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내 삶에 내가 바라는 표적이 일어나지 않아도 도리어 예수님 때문에 손해와 핍박이 와도 내게 주어진 재물과 건강과 명예가 죽은 것과 같은 현실에 부딪쳐도 오직 말씀을 믿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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