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도의 굴혈을 만들지 말라

마태복음 21장 13절

예레미야 7장 1절 - 11절

요즘 주께서 주시는 소원이 있습니다. 그것은 엄청난 부흥도 우리들의 경제적 부요와 성공도 아닙니다. 오직 회개입니다. 그 이유는 먼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주님과 거룩으로 하나 되어야 한다는 마음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 모든 것을 저절로 따라 오는 것이라는 분명하고 당연한 이유 때문입니다.

설교를 준비하다가 인터넷에 오늘 제목과 관계하여 떠돌고 있는 글을 보았습니다. 그 글을 잠시 소개하고 말씀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왜 강도의 굴혈이 되었는가?

굴혈이란 곧 산적의 산채(山寨)나 도둑놈들의 본거지란 말과 유사하니 그 떼거리들이 거기에 기생함이라

그럴싸한 명분을 앞에 세웠으나 실상은 그 배후에 이익을 깔고서 다 자기 배를 위해서 수고함이니

실상은 장사하여 이윤을 남김이라.

그럴듯한 제사 행위를 전면에 세워 제물에 쓰는 양과 비둘기와 염소들을 사고팔며 그 전대를 위해 시끄럽고

번잡하게 장사를 하는 행위들이다.

오늘날도 그럴듯한 종교의 탈을 쓰고 이익을 위해서 수법(手法)을 가리지 않고 이 모양 저 모습으로 열심을 내게 되면 주께로부터 꾸중을 듣지 않을까 염려된다.

사실 장사하는 사람에게 이익은 필수다 누가 수고하고 그 열매를 따 먹지 않을까?

수고하고 땀 흘린 청부(淸富)는 참으로 귀하다. 적당하게 하고 분수에 맞을 때는 괜찮다.

문제는 너무도 지나치게 이익을 챙기게 될 때 강도의 굴혈과 같은 현상이 생기지 않을까?

마땅히 크리스천들은 정도(程度)에 맞게 하고 분수와 사리에 합당할 때 멋진 청지기가 된다.

예수님 당시에도 이렇게 강도의 굴혈이 된 것으로 인해 책망 하신 사건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역의 초기와 말기 두 번에 걸쳐 성전을 정화하셨습니다.

이 두 번의 사건은 평소에 너그럽고 용서가 풍성하신 예수님의 온화하신 모습은 간데없고 거칠고 폭력적으로 변하신 모습은 보여 주고 있습니다. 당시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도 놀랐을 것입니다. 평소에 성질도 좀 내고 괴팍하게 행동하셨다면 이해하기 쉬웠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으시던 분의 분노는 제자들을 놀라게 하는데 충분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사복음서 모두는 이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사역의 초기에 다른 세복음서는 사역의 후기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분노하신 이유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듯이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올라가실 때마다 성전에서는 변함없이 장사가 이루어졌습니다. 제물로 쓸 비둘기나 양을 팔았고, 성전세를 이스라엘 돈으로 내야 했기에 외국에서 온 사람들을 위해 환전이 이루어졌고, 온갖 필요한 물건들을 팔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행위를 향해 진노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외적으로 드러난 이런 행위보다 더 중요한 것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의 내면입니다.

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은 장사꾼들과 결탁하여 제물을 팔게 했고 이익의 많은 부분을 가로챘습니다. 그러면서 합리화하기를 백성들이 제사를 드리는데 어려움이 없게 하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반대로 백성들은 그러한 행위를 비판하기 보다는 자신의 편의와 형식적 제사를 드리는 마음을 합리화 했습니다. 온전치 못한 제물을 드려도 그것이 성전에서 파는 것이었기에 거리낄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한 것들을 팔아도 제사장들이 인정해 준 것이기에 거칠 것이 없었습니다.

주님은 이러한 중심을 보시고 더 화가 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은 예수님의 사역 시에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구약에서부터 성전을 강도의 굴혈로 만드는 일들이 있었고 그것에 대하여 책망을 받았습니다.

예레미야 7장 11절을 보면 예레미야는 성전에 드나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하기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적의 굴혈로 보이느냐.’라고 하였습니다.

예레미야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활동하던 시기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 가장 슬픈 시기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남유다가 멸망하던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가 태어날 때는 남유다의 가장 극악한 왕인 므낫세가 한참 악정을 베풀 때였습니다. 므낫세가 남유다의 왕으로 55년이나 다스렸습니다. 그는 성전 예배를 파괴했고 온갖 우상 숭배를 성전에서 시행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제사장은 사라지고 마술사와 매춘부들이 그 자리를 대신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사라지고 짐승과 괴물모양의 형상들이 그 자리를 채웠습니다.

순결과 절제는 흔적을 찾을 수 없이 사라졌고 온갖 정욕과 탐욕이 성전과 사람들의 심령에 넘쳐났습니다.

우상숭배의 백화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을 뿐 아니라 이사야 선지자를 톱으로 켜 죽이고 그의 자식을 몰렉에게 산채로 드리는 짓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도 잊혀 졌습니다. 온갖 악행이 왕실부터 백성들에게 이르기까지 만연했습니다.

이렇게 악이 승하던 므낫세 통치 45년경에 예레미야는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제사장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복중에서 악과 싸웠고 태어나 자라면서 온갖 죄와 불경건의 영향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했을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열 살 때 므낫세는 죽고 그의 아들 아몬이 왕이 되었지만 보고 배운 것이 악이었기에 그도 악을 행했습니다. 보다 못한 신하들은 그가 왕위에 오른 지 2년 만에 그를 죽이고 여덟 살짜리 어린 요시야를 왕위에 앉혔습니다.

누구에게도 거룩한 영향이라고는 받은 바 없던 요시야는 성전을 정화하고 예배를 회복했습니다. 성전을 정화하던 중 힐기야라는 제사장이 신명기 두루마리를 발견하여 그 말씀을 요시야에게 읽어주었고 그의 신앙의 개혁은 힘을 얻었습니다.

전국의 모든 산당은 파괴했고 무너졌던 예배를 회복했습니다.

57년간의 암흑의 묵은 때를 걷어내고 이전에 하나님께서 지시하셨던 예배를 회복시켰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성전을 청소하셨던 것처럼 요시야는 성전에서 매춘부와 마술사들을 쫓아냈고 온갖 우상의 잔재와 장사치들을 몰아냈습니다. 예수님께서 채찍을 만들어 치셨던 것처럼 성전에 있던 모든 우상들을 부수어 가루로 만들었습니다.

요시야의 종교개혁은 외형적으로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의 삶에 57년간의 죄악의 뿌리는 쉽게 뽑히지 않았습니다. 외적 예배는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더 이상 외형적 우상숭배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중심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예레미야 4장 3절에서 외쳐 이르기를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 속에 파종하지 말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어지는 4절에서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행악을 인하여 나의 분노가 불같이 발하여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하던 때는 요시야가 종교개혁을 한창하고 있을 때입니다. 겉으로는 성공한 개혁이지만 속은 여전히 썩어 있었습니다. 마치 봄철에 풀의 뿌리는 제거하지 않고 윗부분만 낫으로 벤 들판과 같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왕이 주도하고 있는 개혁으로 인해 자신들이 정결케 되었다고 착각했습니다. 아니 자신들은 전혀 변하지 않고 성전에 와서 예배하는 행위 하나만 바꾸었으면서 자신들이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가 맺어졌다고 스스로를 속였습니다.

그러기에 예레미야는 예레미야 7장에서 스스로 속이고 속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예레미야 7장 4절을 찾아서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이 말씀은 예레미야가 성전의 입구에 서서 모든 사람들에게 선포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성전이 성전이 아니라는 말씀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성전이 성전 되지 못하게 하는 원인은 성전 자체가 아니라 성전에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앞뒤 구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3절에서는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곳에 거하게 하리라.’라고 했고,

5절부터 7절에서는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공의를 행하며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말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을 좇아 스스로 해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이곳에 거하게 하리니 곧 너희 조상에게 영원 무궁히 준 이 땅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바르지 않은 행실이 성전이 성전되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11절에서 ‘성전을 도적의 굴혈로 만들었다.’고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도적의 굴혈’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강도의 굴혈’은 같은 의미입니다.

굴혈이란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바위나 땅 위에 깊숙하게 팬 굴.’입니다. 같은 의미로 ‘소굴’이란 의미가 있습니다.

굴혈을 다른 말로하면 강도나 도적들의 은신처입니다. 강도가 으슥한 곳에 숨어 기다리다가 행인들 쳐서 상하게 하고 가진 것을 취하여 자신만의 은신처로 돌아와 안식을 얻는 것입니다. 도적이 남의 집을 털고 돌아와 그것을 쌓아놓고 행복해 하는 장소입니다. 더 이상 자신은 들키거나 잡힐 위험이 없다고 여기는 장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예레미야는 위선적인 예배자들을 향해 말하기를 ‘성전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주 단순하고 명료합니다.

자신들의 행실은 상관없이 자신들이 성전에 있으므로 안전하다고 여기며 자신을 속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온갖 나쁜 짓을 다하고 다니면서 성전에 와서 하나님을 부르고 예물을 드리면서 그 죄가 주는 형벌을 모두 피할 수 있다고 여기는 행위를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삶은 죄로 가득한데 교회에 와서 앉아있는 것만으로 자신은 안전하다고 여기는 행위를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주간 내내 하고 싶은 짓을 다하고 주일날 면죄부를 사는 마음으로 한시가 예배당에 앉아 예배드리고 봉투에 헌금을 담아 드리는 행위를 꼬집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형제를 사랑과 용서하며, 어렵고 힘든 사람들에게 베풂과 선행을 하고, 이웃을 축복하고 격려하는 삶은 살지 않고 다른 사람을 이용해 먹고 약한 자를 착취하고 자신과 맞지 않는다고 저주하며 비판하고 비난하는 삶을 살았으면서 주일날 1분의 참회의 기도로 자유를 얻는 행위를 답답해하는 말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앉아 있는 행위만으로 심리적 안정감을 얻습니다. 그러나 온전한 그리스도인은 그것에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도리어 예배를 통해 죄를 지적받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예배하며 새로운 결단과 각오로 예배당은 나서고 한 주간 동안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수십 년 신앙생활하면서도 삶이 전혀 그리스도인답지 못하다면 오늘 이 시간에 자신이 교회를 도적의 굴혈로 삼고 있지 않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너무 오랫동안 세상의 방식대로 살아서 그 뿌리가 깊은 것을 이해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스스로 뽑지 않으면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뽑아 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죄는 여전한데 예물을 드리며 소원의 기도만을 드리고 있지 않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남의 돈을 떼먹고 하나님께 물질의 복을 구하는 도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형제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자신에게 평강을 달라고 구하는 강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자신보다 낮은 자를 자신의 우월적 지위를 이용하여 억압하면서 자신을 힘들게 하는 어떤 상황과 사람을 해결해 달라고 하는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인간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 모든 행위가 교회와 우리의 신앙을 강도의 굴혈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마태복음 7장 12절에서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라고 하셨고,

마태복은 5장 23절과 24절에는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은 하나님의 백성이고 일 년에 세 번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하기 안전하다고 여겼습니다. 그것만으로도 모든 불행과 위험으로부터 구원을 보장해 준다고 믿었습니다.

우리들도 그럴 수 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이니까, 나는 매주일 교회에 다니니까 안전하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이제 이런 안일한 신앙생활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세례요한은 요단강에서 세례를 주면서 외쳤습니다. 누가복음 3장 8절에 기록되기를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 우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성도라는 것은 특권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의무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특권과 동시에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크고 유명한 교회에 속한 것이 우리를 삶을 보장해 주지 못합니다. 동시에 교회 내에서 어떤 직분이나 지위가 안전을 보장해 주지도 않습니다.

단지 목사, 장로, 권사, 집사이기에 형통할 것이라는 착각은 버려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직분이나 소속한 교회를 보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심령이 강도의 굴혈이 되어있지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강도의 굴혈이란 도둑이 물건을 훔쳐다가 쌓아놓는 장소입니다.

강도의 굴혈은 주님을 온전히 모시지 못하는 마음의 장소입니다.

주님보다 나의 관심과 우리의 이기적 욕망을 먼저 쌓아둔 장소입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함이 없는 장소가 강도의 굴혈입니다.

열매가 없고 잎만 무성한 장소가 강도의 굴혈입니다.

성도 여러분

저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 회복되기를 원합니다.

저도 저와 여러분의 바르지 않은 삶에 대해 괜찮다고 격려해 드리는 말씀만 하고 싶습니다. 한 주간 동안 지친 여러분의 심령에 용기를 불어넣는 말만 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저와 여러분을 속이는 소리입니다.

성형 수술한다고 운명이 바뀔 수 없고, 화장한다고 다른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처럼 근본이 바뀌지 않으면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회복과 형통은 요원한 말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레미야가 거듭 말하고 있는 심령의 묵은 땅을 갈아엎지 않으면 풍성하고 복된 열매는 기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주일이 되면 바른 장소에 있고, 성도들이 모이면 바른 말을 하지만 우리의 삶과 생각이 올바르지 않다면 그것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제가 요즘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지만 그것을 전하고 들었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근본이 변해야 합니다.

바른 장소와 바른 말은 믿음의 삶이 아니라 믿음의 삶을 위한 기회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도리어 우리의 죄를 가리고 바르지 않은 삶을 합리화하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회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은 오래 참으시지만 영원히 참으시는 분이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외적으로 드러난 종교적 행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일상의 삶이 하나님 보시기에 바라야 하는 것입니다.

일주일에 한번 교회 나와 얼굴을 내밀고 큰 소리로 찬양하고 아멘을 외치는 삶이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고 이웃을 돌보고 사랑하며 감사하고 비난이나 불평의 말을 하지 않는 삶을 대신 할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레미야의 경고를 새겨들어야 합니다.

7장 12절부터 16절의 경고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는 내가 처음으로 내 이름을 둔 처소 실로에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악을 인하여 내가 어떻게 행한 것을 보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제 너희가 그 모든 일을 행하였으며 내가 너희에게 말하되 새벽부터 부지런히 말하여도 듣지 아니하였고 너희를 불러도 대답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실로에 행함 같이 너희가 의뢰하는바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 곧 너희와 너희 열조에게 준 이곳에 행하겠고 내가 너희 모든 형제 곧 에브라임 온 자손을 쫓아냄 같이 내 앞에서 너희를 쫓아내리라 하셨다 할지니라 그런즉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그들을 위하여 부르짖어 구하지 말라 내게 간구하지 말라 내가 너를 듣지 아니하리라.’

결혼식은 쉽지만 결혼 생활은 힘들다는 말이 있습니다. 만약 결혼한 부부가 매일 외치기를 ‘우리는 결혼했어, 우리는 결혼했어, 우리는 결혼했어.’라고 외치면서 날마다 주고받는 사랑이 없고 지속적인 온유함과 경청하는 자세, 헌신적인 희생과 적극적인 축복함, 끊임없는 용서와 무조건적인 수용이 없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저의 회개의 외침과 우리의 외적인 신앙의 행태가 거룩한 삶이 없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이 주님과 결혼했다면 이제 주님과의 깊은 사랑의 관계, 그분이 원하시는 구별되고 성결한 삶을 살아 주님께서 맘껏 복 주시는 삶이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 ?
    세례요한 2017.01.15 07:33
    성전에서 장사해서 강도의 굴혈이 아니라 복음이 없어서(주님이 말씀하신대로 평화에 대해 알지못해서)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강탈해서 자기들보다 100배의 지옥 백성을 만들어서 강도의 굴혈이라 한것입니다. 복음이 없는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져야 복음이 전해지고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듯. 교회가 무너져야 참된 복음이 전해지고 하나님 나라가 세워집니다. 참된 회개는 교회를 강도의 소굴로 만든것을 회개 하는 것입니다. 다른예수. 다른복음. 다른영.예레미야시대와 예수님시대. 그리고 고린도 교회. 지금 교회들.......주님 복음이 아닌 다른것을 전하고있는 교회를 무너뜨려주시고 하나님 나라를 세워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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