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막 5:1-20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가버나움과 게네사렛의 어느 곳에서 말씀을 전하시고 밤새 갈릴리 바다를 건너 건너편인 거라사에 도착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도착하셨을 때 그곳의 무덤 가운데서 살아가던 미친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왔고 주님은 그를 고쳐 주시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사건을 보면서 본문을 통해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먼저 이 사건이 기록된 장소가 기록됩니다.

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러"

거라사 지역은 이방인의 땅이었습니다. 로마가 지중해 동쪽을 정복하고 나서 요단강 서쪽에 벧산 하나와 요단강 동쪽에 아홉개의 도시를 건설합니다. 지금의 시리아의 수도 다메섹으로부터 요르단 수도 암만까지 퍼져 있는 도시들의 연합체였는데 그 도시들을 가리켜 데가볼리라고 합니다. "데카 폴리스", 열 개의 도시라는 뜻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오늘 예수님께서 가신 거라사입니다. 이 거라사는 로마인들이 살았습니다. 그래서 본문에 등장하는 돼지를 키웠던 것입니다

 

본문을 근거로 거라사를 살펴보면 유대인들은 도저히 살 수도 없었고 갈 수도 없는 도시였습니다. 그 이유는 거라사에는 유대인들이 부정하다고 하는 것들로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무덤이 있었고 부정한 짐승인 돼지가 있었으며 이방인들이 거했고 더러운 귀신에 완전히 붙들린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름 거룩하다고 여기는 유대인은 도저히 갈 수 없는 땅이 거라사입니다. 그런 곳에 주님께서 가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주님의 신분과 어울리지 않는 곳에 가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님 뿐 아니라 이 땅에 오신 것도 그렇습니다. 죄를 싫어하시고 거룩하신 주님께서 하늘 보좌 버리시고 낮고 천한 땅에 오신 것은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거라사에 가셨고 오늘 우리에게 찾아오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거라사에 가시는데 편하게 가신 것이 아닙니다. 전날 피곤할 정도로 말씀을 가르쳤고 해가 저물었을 때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건너가셨습니다. 종종 갈릴리 바다에 광풍이 부는데 그날 광풍이 심하게 불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주님은 제자들과 건너가신 것입니다. 인간적으로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목숨 걸고 건너가신 것입니다. 왜 주님은 그렇게 하신 것일까요?

 

주님께서 거라사에 가신 목적은 딱 하나입니다. 거라사 광인을 만나시기 위함입니다. 주님께서 로마의 장군을 만고 싶으셨던 것도 아닙니다. 이방의 화려한 문화나 볼거리를 얻고자 하신 것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 광인을 만나고자 하심이었습니다. 귀신들려 자신의 삶이 완전히 황폐화 된 한 인간을 위해 그 모든 것을 이기고 가신 것입니다. 한 영혼에 대한 주님의 놀라운 사랑의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태초에 저와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의 이름을 불러 구원해 내셨다는 말씀처럼 주님은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셔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이 광인에 대해 본문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2절로 5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다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나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 이는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저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지르며 돌로 제 몸을 상하고 있었더라"

 

 

먼저는 더러운 귀신이 들렸고

무덤 사이에 거했으며

아무도 제어할 수 없고

자신의 몸에 해를 가하는 자였습니다.

15절을 근거로 보면 옷도 벗고 있던 자입니다.

 

 

이 광인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한 이유는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상실한 인간 실체를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백성은 사단에게 사로잡혀 사망에 거하며 자신의 죄성을 통제할 수 없고 자신의 영혼에 해가 되는 행위를 하며 의의 옷이 없이 죄로 가득한 자신의 모습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드러내며 살아갑니다.

 

 

이를 하나씩 살펴 봅시다.

 

 

먼저 광인은 귀신이 들려 있었습니다.

주님께 광인이 찾아왔을 때 주님은 그에게 이름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이에 그가 주님께 대답하기를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는 로마시대의 군대란 군단을 의미하는데 약 6,000명 정도로 구성됩니다. 귀신이 6,000마리가 있다기 보다는 많은 귀신이 그 속에 들어 있다는 표현인 것입니다.

 

 

이 사람만이 그 속에 수많은 귀신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시대 하나님이 없는 백성들의 심령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8장 44절은 불신자를 가리켜 마귀의 아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많은 사람은 사단에게 붙들려 사단이 원하는 일을 합니다. 음란의 영, 거짓의 영, 쾌락의 영, 미움의 영 등 온갖 사단의 장난에 놀아나고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이 이렇게 사는 것이 생명의 삶이 아니라는 것은 그가 거하는 땅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그것은 무덤 사이에 거한다는 표현입니다. 무덤 사이, 즉 죽음의 자리, 사망의 땅입니다. 죽음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과 관계없는 삶을 성경은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단절’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단절된 삶, 그것은 죽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5장에서 말씀하시기를 아버지는 농부, 당신은 나무, 제자들은 가지라고 말씀하시면서 붙어 있어야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주님과 단절된 것은 죽음, 붙어있는 것은 생명이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없는 삶은 죽음입니다.

 

이렇게 죽음 가운데 있는 생명들은 자신을 제어할 힘을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본문에서도 광인의 상태를 말하기를 쇠사슬도 끊고 고랑도 깨뜨렸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가 얼마나 자신을 제어할 수 없는 상태인지를 알려주는 것이 그 속에 군대 귀신이 들려있다는 것입니다. 자연인의 상태가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붙들어 주지 않으시면 인간은 절대로 통제되지 않습니다. 그것을 가리켜 죄성이라고 합니다. 이 죄성은 인간의 절제와 결단을 언제나 비웃습니다. 인간의 타락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남겨주신 양심의 씨앗은 자신을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살게 하려 하지만 죄성은 언제나 그것을 비웃고 넘어지게 합니다.

 

출애굽기를 보면 하나님은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셨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 오해합니다. 하나님은 바로를 강퍅하게 하시고 그를 치신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이 강퍅이란 말의 뜻을 이해하면 오해하지 않습니다. 이 강퍅이란 말은 "내어버려 두심"이라고 달리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에서도 하나님께서 버린 사람들을 표현하기를 "내어 버려두셨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마치 군사가 활시위를 당기고 있다가 놓은 상태를 말합니다. 이를 인간에게 적용하면 사람은 언제든지 죄를 향해 달려갈 준비가 되어 있는 강력한 죄성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심으로 그 죄를 향해 달려가려는 마음이 통제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 활을 놓는 것을 강퍅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의 죄 된 마음은 죄성으로 가득합니다. 그리고 기회만 있으면 죄를 지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우리 중에 나는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그렇지 않습니다. 나름 자신은 죄짓지 않고 살았다고 하는 사람들은 죄지을 환경에 노출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이러한 예를 성경에 또 기록해 놓으셨습니다. 예수님께 어느 날 부자 청년이 찾아와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물었던 청년에게 주님을 십계명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어릴 적부터 다 지켰다고 말했고 주님은 그에게 있는 모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고 자신을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그 청년은 근심하고 돌아갔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에서 부자 청년이 나름 율법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부자는 울타리 안에서 죄지을 환경에 노출되지 않았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죄의 강력한 유혹으로부터 지킬 수 없는 존재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는 인간은 그 해를 타인에게 끼치는 것 같으나 실제로는 자신에게 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의 광인은 동네에 피해를 끼쳤습니다. 소란스럽게 했을 것이고 때로는 마을을 공포에 몰아넣기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광인의 미친 행동의 가장 큰 피해자는 자신이었습니다. 본문도 말하기를 “돌로 자기 몸을 해치고 있었더라”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미친 본능의 가장 큰 피해는 우리 자신입니다. 현대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망치며 살아갑니다. 자신을 통제할 수 없는 상태에 있기에 자신도 어찌 할 줄 모릅니다. 알콜에 사로 잡혀 살고, 쾌락에 사로 잡혀 삽니다. 도박에 중독되어 살고 음란물에 중독되어 자신을 망치며 살아갑니다. 재물에 미쳐있고 명예와 권력의 노예가 된지 오래입니다. 주변의 사람들이 그로인해 피해를 보지만 사실 가장 큰 해는 자신에게 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현대인들은 특별히 그러합니다. 지식이 하늘을 찌르고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시대, 우주까지 자신들의 발명품을 날리고 인간이 만든 기구로 우주 속에 천국이 있을까 싶어 구석구석 찾아내는 과학의 시대, 지식의 시대에 살아가고 있지만 인간의 미침병은 그것과 비례하여 더욱 많아짐을 알고 있습니다.

 

사실 오늘 본문의 거라사는 지식이 탁월한 곳이었답니다. 그런 곳에 아주 강력한 귀신 들린 자가 거했듯이 현대의 과학 문명 속에 사단의 역사는 더욱 강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남자 약 80%, 여자 약 60%가 술을 먹는데 국민 한 사람당 평균 소주 123병을 마신답니다. 맥주는 372병, 양주는 46병, 그러니까 일인당 합이 541병을 마신 것입니다. 우리나라 인구 열 명 중 한 명은 알콜 중독자입니다.

제일 잘되는 의사는 정신과 의사이고 그 의사들도 환자들의 많은 숫자를 감당 못해 사설 상담소에 줄을 서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군입대하는 청년들의 50%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하고 국민 중 35%가 넘는 사람들이 자살하고 싶어한답니다.

미디어는 온통 벗고 벗기고 있는 이 타락한 문화, 미친 세상 속에서 정신을 온전히 차리고 살아간다는 것은 기적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주님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렇게 미친 사회는 부끄러움을 모릅니다.

 

본문의 광인이 옷을 벗고 살았고 주님을 만난 후에 옷을 입고 있듯이 사단에게 속아 온갖 죄와 거짓된 가치관에 속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하는 행위에 조금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습니다. 자신의 죄를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죄를 마치 훈장 달고 다니듯이 자신의 거친 행동과 언어, 음란한 말과 행동, 욕심에 끌려 재물을 모으고 다른 사람의 눈에서 눈물 흘리게 하는 행위들을 조금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도리어 자랑인양 떠벌립니다. 심지어는 이웃에게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기까지 합니다.

 

 

얼마 전 라디오에서 모 정치인이 자신의 당에서 공천에서 배제된 것에 대해 프로그램 진행자와 말하면서 어느 정치인이 실수하지 않고 어느 정치인이 흠이 없냐고 자신 정도면 괜찮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남들도 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괜찮고 심지어 그렇게 못하고 손해나 보고 살아가는 사람은 바보처럼 여겨지는 미친 세상에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면 바뀌는 것이 몇 있는데 그 중에 지식이 변합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3장 10절은 말하기를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만나고 나면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분명히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사회적 윤리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계셔서 죄에 대하여 책망하고 의에 대하여 격려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가치관이 바뀌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 사람을 로마서는 말하기를 “죄를 지을 수 있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처참하게 무너진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한, 아니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사라진 사람에게 주님께서 찾아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만나시고 그 속에 있는 미침병의 근원인 사단을 내어 쫓아 주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본문의 광인과 같았던 우리에게 찾아 오셔서 우리를 고치시고 하나님의 사람 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 놀라운 사건 다음에 벌어지는 일은 우리를 당황하게 합니다. 그것은 마을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귀신이 돼지 떼에 들어가 바다에 빠져 죽은 소식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께 달려 왔습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반응은 메시야를 만났으니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자신들의 영적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해야 맞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전혀 반대의 반응을 보입니다. 그것은 마을에서 나가달라는 부탁입니다.

 

 

17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저희가 예수께 그 지경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마을 사람들의 반응도 이해는 됩니다. 왜냐하면 돼지 2,000마리의 가격이 엄청났을 테니까요.

그들은 마을 사람들 모두를 고치려면 마을이 거덜날수도 있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이렇게 돼지의 가치에만 마음이 집중되어 있던 사람들에게는 광인의 변화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직 돼지로 대변되는 “쩐”, “물질”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자신들 앞에 와 계신 메시야를 못 알아보고 떠나가 달라고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대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만나 자신이 변하고 진정으로 가치 있는 삶을 사는 것에 대한 관심은 별로 없습니다. 아니 도리어 그 변화 때문에 잃어버릴지 모를 재물로 인해 변화를 거부하고 자신에게 멀리 떨어져 계실 것을 요구합니다. 또한 이런 모습이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변화시켜 주실 뿐 아니라 재물을 지켜 주셔야 합니다. 아니 그 재물을 더 많은 불려 주셔야 합니다. 그래야 메시야입니다. 만약 나를 변화시키기 위해 재물에 손해를 주신다면 언제든지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 우리일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을 온전히 만나지 못한 사람들의 주 관심은 돼지입니다.

미친 사람 하나를 위해 우리 주님은 돼지 이천 마리를 희생시켰지만,

돼지 몇 마리를 위해서도 생사람 이천을 희생시킬 수 있는 것이 오늘의 세상입니다.

현대인에게 귀한 것은 영혼이 아니라 돼지입니다. 돈이고 쾌락이고 명예입니다.

현대 인간에게 왜 사느냐 물어 본다면, 가장 솔직한 대답은 “돼지 치는 재미에 산다”, "돈 모으는 재미에 산다" 일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진정 무엇을 원하십니까? 고침입니까? 돼지입니까?

 

 

고침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돼지가 줄 수 없는 부요와 행복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 행복이 얼마나 큰지 본문 18절로 20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귀신들렸던 사람이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으나 허락지 아니하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친속에게 고하라 하신대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신 것을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기이히 여기더라”

 

고침을 받은 자는 주님을 따르겠다고 말합니다. 주님을 그에게 일어난 변화를 친속에게 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그는 나아가 친속을 넘어 데가볼리에 전파하였습니다.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마리아여인이 그랬습니다.

뽕나무 위에서 예수님을 만난 여리고의 세리 삭개오가 그랬습니다.

사도 바울도 말합니다. 주님을 만난 이후의 삶에 대해 모든 것을 분토와 같이 여긴다고 말입니다.

 

 

우리 주님은 저와 여러분을 위해 돼지 이천 마리 정도가 아니라 당신의 목숨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갈릴리 바다와 폭풍 정도가 아니라 하늘의 높고 귀한 자리를 버리시고 낮고 천한 인간의 몸을 입으셨습니다.

우리 자신은 세상 가운데 미미한 존재지만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저와 여러분에게 오셨습니다.

세상에 미치고, 물질에 미치고, 쾌락에 미쳐 날뛰면서 자신이 죽는 것도 모르고 살던 우리들을 주님께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본문의 광인이 영적으로 죽어있던 데가볼리의 전도자가 되었던 것처럼 우리도 영적으로 죽어있는 이 시대와 사람들에게 나아가 복음을 전해야 할 것입니다.

 

 

기억합시다.

주님을 만나야 됩니다.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면 여전히 죽어있고 미쳐있고 자신을 죽이는 존재일 뿐입니다.

교회 안에 있다고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심령에 노크하시며 부르시는 주님께 마음을 열고 모셔 들여 인격적으로 만나는 자만이 변화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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