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를 사랑하라
데살로니가전서 4장 9-12절
지난 시간에는 “거룩하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면서 그 내용으로 음란을 버리는 문제에 대해 다루었습니다. 오늘을 그 말씀에 이어 “형제를 사랑하라”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사실 오늘의 주제도 거룩하라는 큰 제목 아래 포함된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성도들에게 거룩하게 행하라고 한 것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음란을 버리는 것이고 또 하나는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음란을 버리라고 하신 말씀은 자신에게 주어지는 것이 우선이라면 오늘 주제인 형제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타인을 우선하여 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형제사랑, 우리도 예배 중에 서로에게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럴 때마다 언제나 한결같은 모습을 봅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없는 우리들의 모습, 그 모습은 어색함입니다. 어색함의 알파와 오메가가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럼에도 계속하는 이유는 그렇게라도 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고 서로에게 사랑을 고백하여 우리가 형제임을 인식하고 성도의 마땅한 바인 사랑을 하게 하고자 함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들어갑시다.
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들 자신이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바울이 거룩한 성도의 삶에서 두 번째로 말하고 있는 것이 형제사랑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형제사랑이라는 말을 잠시 생각해 보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본문에서 형제사랑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필라델피아”입니다. 이 단어는 “형제지간의 사랑”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을 말할 때는 “아가페”, 우정을 말할 때는 “필레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듯 하는 본능적 사랑은 “스톨게”입니다.
이 네 가지 사랑이란 단어 중에 성도간의 사랑을 말할 때 자연스러운 것은 우정을 뜻하는 “필레오”나 무조건적인 사랑을 뜻하는 “아가페”가 어울릴 듯합니다. 하지만 본문에서 바울은 “필라델피아”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이 필라델피아란 단어는 피를 나눈 형제들 간의 사랑, 혈연으로 맺어진 형제간의 우애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왜 바울은 굳이 필라델피아란 단어를 사용하여 성도를 사랑해야 한다고 한 것일까요? 그것은 바울이 성도 간의 사랑을 형제사랑으로 말한 것은 함께 살아가고 있는 믿음의 사람들을 피를 나눈 형제를 대하듯이 사랑하라는 의미입니다. 하긴 우리 모든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피를 나눈 형제들입니다. 주님은 최후의 만찬에서 포도주를 주시면서 “받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피를 마신 우리 모두는 형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피를 나눈 형제라는 것을 머리로만 이해할 뿐 가슴으로 이해하고 삶으로 증명하지 못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성도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저는 육신의 피를 나눈 형제는 없습니다. 하지만 주변의 부모로부터 한 피를 받은 형제들을 보면 피를 나눈 형제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습니다. 다투다가도 어려움이 오면 서로 돕는 것을 보았습니다. 형제가 위기를 겪으면 자신의 일처럼 마음을 쓰고 돕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이 형제사랑이라고 압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은 오늘 말씀처럼 “형제”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은 형제란 말보다 더 강력한 단어로 우리를 묶고 있습니다. 그것은 “지체”라는 단어입니다. 우리는 형제요 지체입니다. 이러한 대상을 사랑하는 것은 상대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철저히 자신의 문제입니다. 지체가 아프면 몸 전체가 아픕니다. 그런 차원에서 지체를 위하는 것은 자신을 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형제를 사랑합니다.
이렇게 형제를 사랑하는 행위를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잘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특별히 쓸 것이 없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 사랑에 대해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아 한 것”이라고 말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가르침이란 사도들을 통해 배운 그리스도의 사랑, 성령의 감동으로 알게 된 행동인 것입니다.
이 형제 사랑은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첫째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둘째가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갈라디아서 5장은 성령의 열매로 사랑을 말했고 고린도전서 13장에서는 가장 좋은 은사로 사랑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함을 말씀하시기를 로마서 5장 5절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라고 하셔서 사랑의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에게 주어졌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교인들은 이미 이렇게 사랑하며 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환란과 핍박이 있었음에도 그들은 형제사랑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랑의 행위가 자신에게 가까운 사람들에게만 한 것이 아님을 본문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0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가 온 마게도냐 모든 형제에 대하여 과연 이것을 행하도다 형제들아 권하노니 더욱 그렇게 하고”
형제 사랑의 행위가 데살로니가를 중심하여 온 마게도냐의 모든 형제에 대하여 했다고 하고 있습니다. 모든 형제가 가지고 있는 말은 차별 없이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그가 가난한 사람이건 병든 사람이건, 자신과 친한 사람이건 자신을 핍박하는 사람이건 구별이 없이 모든 형제를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대단한 교회입니다.
그렇습니다. 형제사랑의 지경은 한계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느니라(눅6:32)”하셨습니다. 또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주님은 사랑의 한계를 없이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본문에서도 그 사랑의 행위를 더욱 많이 힘쓰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만하면 되었다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고 또 하고 사랑하고 또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더욱 그렇게 하고”라고 하였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은 우리에게 형제사랑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서로 짐을 지라고 하고 있을 것을 보게 됩니다. 형제들의 삶의 짐을 자신의 짐처럼 여기고 함께 지라는 것입니다. 또한 선한 일을 하되 믿음의 가정들에게 하라고 하면서 선을 행하되 낙심치 말지니 때가 되면 이루겠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심은 형제를 사랑할 때 항상 좋은 일만 있는 것이 아님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선을 행했는데 돌아오는 것이 악일 수 있습니다. 선을 행했는데 상대가 알아주지 않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을 행하면 때가 되면 그 열매를 거두게 됨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어서 1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또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조용히 자기 일을 하랍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일까요? 입 다물고 일하라는 것일까요? 데살로니가교인들이 시끄러워서 그렇게 말한 것일까요? 이 말은 배경이 있습니다.
그것은 데살로니가교인들이 그리스도의 강림을 기다리는데 요란하게 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속히 오시겠다고 하신 말씀을 지금 오신다고 잘못 받아 들였습니다. 그런 관계로 그들은 화장실도 가지 못했고 잠을 잘 때도 옷을 벗지 못했습니다.
몇 년 전에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았던 다미선교회처럼 직장도 그만 두고 흰옷입고 기도하며 그리스도의 강림을 기다린 것입니다. 그들도 일은 하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가 다 되었다고 소란을 피웠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를 시끄럽게 했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에게 피해를 끼쳤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도 자신들과 같이 그리스도의 강림을 기다리게 하기 위해 환상을 보았다는 둥, 사도바울이 편지를 보냈다는 둥의 소리를 해댔습니다. 그들은 일을 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강림을 기다린 관계로 당장 생활에 필요한 돈을 구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집 저집 다니며 음식을 얻어먹었고 결국 성도들 간에 갈등을 빚고 말았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조용히 자기 일을 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아가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고 하고 있습니다.
조금 전에도 말씀 드렸지만 그들은 일하지 않았습니다. 이웃집을 돌아다니며 음식을 얻어먹었지만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자신들처럼 그리스도의 강림을 기다리지 않고 일상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나무라고 책망하며 믿음이 없는 자라고 말하고 다녔습니다.
이런 그들을 향해 말하고 있는 구절이 11절과 12절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룩하라고 하며 형제를 사랑하라고 말하는 바울은 교회 내에 두 부류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으며 일상의 삶을 열심히 사는 자들과 반대로 그리스도의 강림을 기다린다는 이유로 일하지 않으면서 이웃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모든 자들에게 이 말씀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성도들은 종종 자신들에게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지 않고 주변 탓을 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던 갈라디아서 6장은 성도사랑에 대해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6:2)고 했는데 여기 짐이라는 헬라어는 “바로스”라는 단어입니다. 이는 화물을 뜻하는 말입니다. 형제의 삶의 짐을 대하는 자세에 바울은 화물처럼 대하라는 것입니다. 그 의미는 화물을 혼자 들 수 없으므로 같이 져 주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 바울은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갈6:5)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짐은 조금 전에 말씀드렸던 짐이라는 단어와 다른 단어입니다. 이는 “프로티온”이란 말로 개인의 봇짐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앞의 짐이라는 단어의 뜻은 화물이고 뒤에 이어지는 문장에서 짐이라는 단어의 뜻은 봇짐을 의미하는데 이렇게 다른 뜻의 단어를 쓴 이유가 있습니다. 앞에서 짐은 상대의 짐을, 뒤에서 말하는 짐은 자신의 짐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풀어 말씀드리면 형제의 짐은 화물로 여기고 자신의 짐은 형제들에게 부담을 주지 말고 자신이 져야할 개인봇짐이라고 여기고 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 교인들 중에는 반대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짐은 화물로, 상대의 짐은 개인 봇짐으로 생각하여 형제의 삶의 문제를 대할 때는 “본인이 해결해야지 왜 교회에 짐을 지워”라고 말하고 자신의 삶의 문제에 대해서 성도들과 교회가 신경을 쓰지 못하면 교회가 사랑이 없다고 시험에 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짐은 자신이, 형제의 짐은 함께 져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 6장에서 이 두 가지 짐에 대해 말하고 나서 보상을 약속합니다. 말씀하시기를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6:7,8)”라고 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게으름을 믿음으로 포장해서는 안 됩니다. 종종 믿음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땀 흘려 일하기를 힘쓰지 않으면서 하나님께서 부어주시기를 기대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낮아지기는 싫고 땀 흘려 일하기도 싫고 그러면서 자신이 그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부어주실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절대로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습니다.
열매는 오직 땀 흘려 일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복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도 세상 사람들과 동일하게 심고 가꾸고 거두는 원리로 살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말라기 3장 11절과 12절에서는 성도들이 받는 복은 초현실적인 기적이 아님을 말씀하는데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메뚜기를 금하여 너희 토지소산을 먹어 없애지 못하게 하며 너희 밭의 포도나무 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모든 이방인들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라고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들도 땀 흘려 일해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기적이 성도들에게 매일 벌어진다면 그것은 하나님 스스로 창조원리를 무너뜨리는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들도 열심히 일했습니다. 야곱이 복중에서부터 복을 받았지만 그는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간 성실히 일했습니다. 그의 아들 요셉도 꿈을 통해 복을 약속받았지만 그가 노예로 팔렸을 때도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을 때도 그는 성실하게 일했습니다. 그들은 꿈만 꾸는 자들이 아니라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매일 노력하는 자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저도 제 사무실에 “꿈만 꾸는 자가 되지 않고 꿈을 이루기 위해 오늘도 나는 연구한다”는 글을 붙여 두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의 강림을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일상의 삶을 열심히 살면서 주께서 오시는 날까지 복음을 전하며 사는 삶이되기를 바랍니다. 이곳저곳에서 들었다고 하고 보았다고 하는 소리들에 요동하지 말고 오직 말씀을 붙들고 자신이 처해져 있는 곳에서 성실하게 삶을 사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1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는 외인에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성도들이 이웃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자신의 손을 일하여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본문은 두 가지로 말합니다. 하나는 외인에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 하나는 자신이 궁핍하게 살지 않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여기서 외인이란? 믿지 않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그들 보기에 성도들이 덕스러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단정히’란 “유스케모노스”라는 단어인데 이는 “보기 좋은”, “존경할 만한”의 뜻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비그리스도인에 대해서도 존경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함을 교훈합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들은 자신의 삶이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삶은 그리스도의 거울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항상 인식해야 합니다. 본문에서는 특별히 성실한 삶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성실하게 살 때 세상 사람들의 눈에 존경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성실하게 일하지 않고 매일 놀러나 다니고 빈둥거리며 자신의 가족들을 성실하게 돌보지 않는다면 그것은 바른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닙니다.
그것을 보고 믿지 않는 사람들이 존경할 수가 없습니다. 입술로는 하나님을 말하지만 자신의 삶으로는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성실해야 합니다. 땀 흘려 일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돕지 않는다고 원망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자기 손으로 일해야 하는 이유의 두 번째가 궁핍함이 없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너무 분명한 말입니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실천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잠언에서도 말하기를 “좀 더 자자, 좀 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 더 누워 있자 하면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잠6:10,11)라고 한 것입니다. 때로는 열심히 했는데도 열매가 거두어지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열심히 일하지 않아서입니다.
본문에서 ‘궁핍함 없게’라고 한 말은 원어적으로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표준새번역성경은 “그리하여 여러분은 바깥사람을 대하여 품위 있게 살아가야 하고, 또 아무에게도 신세를 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시편 126편 5절과 6절 말씀도 약속하기를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일하지 않고 거두고자하는 것을 도둑입니다. 자기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는 것이 형제 사랑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형제 사랑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웃을 돌아보며 자신의 삶을 성실하게 사는 것이 형제 사랑이라고 하고 있는 것을 기억하여 우리도 우리의 이웃을 돌아보며 자신의 삶을 성실하게 사는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본을 보이신 것처럼 우리도 형제를 사랑하는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