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 1장 13~16절 (마음의 허리를 동이라) - 하림교회 황규관목사







마음의 허리를 동이라

벧전 1:13-16

 

베드로는 성도를 향하여 나그네라고 정의하고 본문을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나그네로 사는 주의 백성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삶의 자세에 대해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나그네인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먼저 1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우리가 읽은 본문은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하는 말은 앞에서 했던 말과 관계가 있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앞에서 무슨 말을 했을까요? 그것은 성도는 나그네로서 이 땅을 살고 그러는 중에 고난을 당하지만 주님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는 영혼의 구원을 받는 것에 대해 말씀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그러므로영혼의 구원을 받았으므로라는 뜻으로 이해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영혼의 구원을 받은 자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느냐? 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후에 주어지는 말씀에 대해 오해하면 안 되는 것은 우리의 영혼의 구원을 우리의 행위에서 찾으려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말씀은 영혼의 구원을 받은 자들에게 주어진 삶의 방식을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이후에 주어진 말씀은 구원의 조건이나 자격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은 자들에게 마땅히 따라야 할 삶의 방식을 강한 어조로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구원에 대한 생각을 조금하고 넘어가야 할 듯합니다. 구원이란? ‘이동입니다. ‘자리 옮김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이끄신 것처럼 영혼의 구원이란? 세상에서 하늘나라로 이동한 것입니다. 단지 교회 밖에서 교회 안으로 자리를 옮긴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몸이 교회로 이동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의 상태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고 했고 성도는 이미 하늘에 앉힌바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기에 구원받은 자가 여전히 이 땅에 마음을 두는 것은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고기 가마 곁을 사모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또한 하늘나라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이 힘겨울 때 세상을 돌아보고 세상적인 것을 얻기 위해 세상의 방법으로 살아가는 자들은 애굽으로 돌아가려는 자와 같고 소돔을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된 롯의 처와 같은 자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들은 내게 합당치 않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이미 이동함을 당한 자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우리를 나그네라고 한 것입니다. 이 땅에서 하늘나라로 가고 있는 자인 것입니다. 이렇게 나그네로 살아가는 자들은 13절 후반의 말씀처럼 은혜를 온전히 바라보아야 합니다.

 

여기서 은혜를 바라라는 말은 21절에서는 소망이란 말로 대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그네가 본향이 아닌 타향에서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힘은 소망에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소망은 그리스도께서 임하실 것에 대한 소망입니다. 영혼의 구원을 얻는 것에 대한 소망입니다. 애굽에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가장 큰 소망은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마찬 가지로 이 땅에 사는 성도의 가장 큰 소망은 영혼의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영혼의 구원에 대한 소망을 가진 사람들의 자세는 어떠해야할까요?

 

베드로는 첫 번째로 마음의 허리를 동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허리를 동이다라는 말에서 동이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아나존뉘미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다시라는 뜻의 아나졸라매다, 띠를 띠다라는 뜻의 존뉘미라는 말의 합성어입니다. 그러니까 본문에 동여매라는 말은 이미 동여맸던 허리를 더 단단히 동여매라는 뜻의 말입니다.

 

그리고 마음의 허리라는 말에서 마음은 감정이나 의지 뿐 아니라 생각과 가치관을 말합니다. 베드로가 마음의 허리를 동이라고 한 것은 마음은 육체를 제어하는 것보다 더 힘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잠언은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4:23)이라고 하였습니다.

 

왜 베드로는 영생의 소망을 품고 사는 사람들에게 마음의 허리를 동이라고 한 것일까요? 생각이 모든 것을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생각하고 사느냐에 따라 행동이 결정됩니다. 마치 배를 움직이는 것이 작은 키인 것처럼 우리의 삶을 움직이는 것이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일천번제를 드린 후에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을 물으셨을 때 듣는 마음을 구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마음의 허리를 동여맸으나 그것에서 만족한 자가 아니라 느슨해질 때마다, 아니 느슨해지지 않도록 계속해서 동여 매야 합니다. 이를 예수님을 비롯한 사도들은 깨어 있으라는 말로 대신했습니다. 그 이유는 사탄이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소망이 있는 성도들은 먼저 마음의 허리를 동이는 자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영생에 대한 소망이 있는 성도의 두 번째 자세는 근신하는 것입니다.

근신한다는 말을 우리말 성경은 정신을 차리고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말은 헬라어로 네폰테스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의 뜻은 술 취하지 않다, 정신 차리다, 근신하다, 침착하다입니다. 그러니까 근신하라는 말은 적극적으로는 근신을, 소극적으로는 술 취하지 않은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술 취하지 않다는 말은 단순히 술이 아닙니다. 술을 대표로 하여 우리의 신앙적 이성을 잃게 만드는 세상의 모든 것을 말합니다.

 

그것에 중독되게 하여 신령한 것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돈이든, 쾌락이든, 명예든, 도박이든 무엇이든 간에 신앙적 이성을 잃게 하고 세상과 짝하게 하는 것들입니다.

 

이것들은 우리의 신앙적 이성을 마비시킵니다. 영적인 경성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성도들을 죄에 빠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의지를 너무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말하면 술을 절제하여 마실 수 있답니다. 적당히 즐길 정도만 도박을 한답니다. 많은 돈이 주어져도 하나님의 청지기로 살 수 있답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우리가 세상에 취하지 않을 수 있다고 자신합니다. 그러나 제가 본바 대부분의 사람들의 절제력은 그것들을 이기지 못하고 넘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레위기 10장을 보면 아론의 두 아들 아답과 아비후가 다른 불을 사용하여 제물을 드리다가 그 불에 타죽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불이 아닌 다른 불을 사용하여 제물을 드렸던 이유를 본문에서는 술을 먹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가는 모든 제사장들은 포도주와 독주를 금하라는 규례가 추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라고 하신 이유는 옳고 그름을 분별하게 하기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영생에 대한 소망이 있는 자들은 이 땅의 것에 취하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가 그것에 취하도록 하고 있다는 슬픈 현실입니다. 궁극적인 복이 하늘에 있음에도 우리의 강단은 이 땅의 복을 보게 하고 그것을 더 얻기 위해 제단을 더 쌓게 하는 것입니다. 신앙적 열심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이나 주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이기적인 욕심을 채우는 수단이 되게 하는 설교를 복음이라 포장하여 성도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근신하라고 하는 말씀에 정면으로 대치되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백성들은 정신을 차리고 우리가 추구해야 할 신앙이 무엇인지 분별해야 하는 것입니다. 강단에서 흘러나오는 말씀이라고 다 말씀이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분별해야 합니다. 그 말씀이 우리의 눈을 하늘로 향하게 하는지 아니면 이 땅에 것에 집중하게 하는지를 보면서 그것이 복음인지 복음을 가장한 취하게 하는 술인지를 분별할 줄 아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기에 본 절 마지막에 온전히 바라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온전히 바라라는 것은 앞에서 설명했듯이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는 자세로 끝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 온전히 바라는 자세를 이어지는 14절부터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먼저 1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베드로는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라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욕이란 사적인 욕심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사욕이란? ‘사악한 욕심을 말합니다. 그래서 NIV‘the evil desires'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렇다면 사욕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의 육적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것입니다. 그것 자체로는 부정한 것이 아니지만 그것을 소유한 자의 마음에 따라 그것은 사악한 것이 되기도 하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특정한 어떤 것이 아니라 이 땅의 모든 것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 명예, 자녀, 평안 등입니다. 이 모든 것은 그것 자체로는 죄가 아니나 그것을 소유한 자의 마음이 그것은 더럽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 것은 제물 자체가 아니라 가인의 사악한 심령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인과 그 제물을 받지 않으셨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우리들이 추구하는 것들이 사악한 것이 되지 않도록 힘쓰며 자신이 그것을 원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항상 생각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 사욕을 설명하기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것이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기 전과 후에 우리의 삶의 목적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베드로는 본서 42절과 3절에서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바울도 로마서 61,2절에서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사욕을 따르지 말하고 하면서 전제한 표현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순종하는 자식처럼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선 전제된 말은 하나님은 아버지시고 우리는 그 자녀라는 말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이고 하나님은 성도들의 아버지가 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아들은 아버지를 닮는 것처럼 성도는 하나님을 닮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세상과는 구별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기 전의 상태를 요한복음 844절에서 너희 아비 마귀라고 했고 그를 따랐기에 거짓말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으로 하나님의 모습을 닮아 우리 속에서 끊임없이 솟구쳐 오르는 사욕을 따르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도의 마땅한 바입니다. 소망을 하늘에 두고 살아가는 자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온전히 바라는 자의 자세는 15절에서 말씀해 주는 방식입니다.

1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거룩하다라는 말은 헬라어 하기오스라는 단어입니다. 이 말은 원래 봉헌된, 구별된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모든 행실은 구별되어 봉헌된 것이라는 인식을 하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일에 모여 예배드릴 때만 거룩한 자세와 모습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이 그러해야 하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그러해야 합니다. 직장에서 그러해야 합니다. 아무도 보지 않을 때도 그러해야 합니다. 그러한 모습이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일 예배에 가지고 올 예물은 물질의 헌금을 넘어 삶의 헌물을 가지고 와야 하는 것입니다. 14절에서 사욕을 본받지 말아야 하는 것을 순종하는 자식처럼 하라고 했다면 본 절에서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는 것은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도를 부르신 하나님이 성도가 추구해야 할 거룩한 삶의 기준인 것입니다. 에베소서 413절의 말씀처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입니다. 그러기에 성도는 바울의 고백처럼 날마다 자신을 쳐서 복종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기준을 높게 정하신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세상에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을 고린도후서에 성도는 그리스도의 향기,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표현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에서 성도를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고 하시고 빛은 성도들의 착한 행실로 들어나며 세상이 성도들 착한 행실을 통해 그리스도를 보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성도는 거룩해야 합니다. 구약의 제사장에게 엄격한 규례가 주어졌던 것은 그 제사장이 그리스도의 그림자였기 때문에 온전해야 했던 것처럼 만인 제사장주의를 말하는 신약의 성도들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그림자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거룩해야 하는 이유는 16절에서 다시 강조해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레위기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레위기는 1144절에서 192절에서 성도가 거룩해야 할 이유로 하나님 자신이 거룩하기에 당신의 백성들도 거룩해야 한다고 한 말씀을 베드로가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거룩한 삶의 명령을 주는 베드로의 말 속에 놀라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거룩한 삶은 성도들만의 특권이라는 것입니다. 15절에서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라고 한 구절입니다. 거룩은 하나님의 절대적 속성입니다. 그것은 세상에 속한 자들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성도들 속에만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도에게 요구되는 거룩한 삶은 특권입니다. 마치 어릴 적 반장이 선생님의 심부름을 하지만 그 심부름은 반장의 특권인 것과 같습니다. 그러기에 노예처럼 율법을 준행하는 자가 아니라 아들의 특권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자가 되었음을 기쁘게 여기고 기꺼이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14절부터 16절까지 우리에게 알려주는 중요한 성도의 삶의 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빨리 크고 싶어 합니다. 빨리 부자가 되고 싶고 빨리 성공하고 싶어 합니다. 저는 목사로서 빨리 부흥하고 제가 이끌고 있는 단체도 빨리 자리를 잡길 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관심은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속도규모가 아니라 방식어떻게방향어디로에 관심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할까요? 그것은 13절에서 언급했듯이 마음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추구하는 삶의 방식도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6:7-10)라고 하였습니다.

 

본문에서 방식거룩하게이고 방향영혼의 구원의 때인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것을 벗고 하나님 앞에 설 때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푯대를 향하여 간다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성도인 우리들도 방향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속도가 아닙니다. 느려도 바르게 가야 합니다. 바울은 디모데후서에서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하지 않으면 상을 얻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진리라는 사실은 저와 여러분은 이미 잘 알고 계실 줄 압니다. 그런데 잘 알면서도 왜 방향이 아니라 속도에 집착할까요? 그것은 남들보다 더 낫고 싶고, 남들보다 더 높고 싶고, 남들보다 갖고 싶어 하는 우리들의 패역한 사욕 때문입니다. 이 땅의 것에 절대적 가치를 두고 살아가는 자들의 한계인 것입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우리에게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1:17)라고 하여 이 땅에 것은 좋지 않고 오직 주로부터 오는 것만이 좋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방향을 분명히 하고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에 중요한 몇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구원은 자리 옮김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하늘로, 지옥에서 천국으로, 사탄에 속한 자에서 하나님께 속한 자로 옮겨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삶의 방식도 바뀌었고 기쁨과 슬픔의 이유도 세상에서 느끼는 것들과는 다른 자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고 얼만 큼이 아니라 어떻게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오늘 제목처럼 마음의 허리를 동하고 근신하여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미국에 조니 에릭슨 타다라는 척수장애 화가가 있습니다. 그는 소녀일 때 장애를 입고 방황 중에 하나님을 만나 장애우들을 섬기며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육체에 있는 잠깐의 시간은 하나님을 위해 살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며 기회입니다라고 말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주어진 단 한번 주어진 삶, 잠시 살다가 영원한 나라로 가야할 과정인 삶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의 방식으로 힘을 다해 사는 우리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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