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 1장 17~21절(두려움으로 지내라) 하림교회 황규관 목사







두려움으로 지내라

베드로전서 117-21

 

베드로는 주의 백성들이 나그네로 살아가면서 삶을 어떻게 살아야하는지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보았던 13절부터는 사욕을 본받지 말고 거룩하게 사는 자가 되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오늘 말씀에서 두려움으로 지내라고 하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이어 오늘도 본문 말씀을 통해 말세를 나그네로 사는 자인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1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베드로는 나그네로 사는 성도의 삶을 13절에서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그리스도께서 가져다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14절부터 16절에서 온전히 바라는 자세에 대해 첫 번째로 성도를 부르신 하나님처럼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두 번째로 주께서 주실 은혜 즉, 영혼의 구원을 바라는 성도의 삶의 자세에 대해 오늘 본문을 통해 말씀해 주었는데 그것은 나그네로 있는 동안 두려움으로 지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 구절은 빌립보서 212절의 말씀과 함께 종종 오해를 일으키는 구절입니다.

 

빌립보서 212절은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17절에서도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라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두 구절은 성도가 자신의 구원을 완성하는 존재인 것처럼 생각하게 하고 바르지 못한 어떤 행실은 종말의 때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심판을 받고 그 결과 구원을 얻지 못할 것처럼 인식되었고 가르쳐졌습니다. 하지만 이 구절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두 구절은 구원받기 위해 바르게 살아야 할 것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에 대해 강조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는 사람들의 자세를 언급하면서 첫째로 거룩에 대해, 두 번째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에 대해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거룩한 삶을 살기 원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세상의 방해와 공격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두려워 세상에 무릎을 꿇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거룩하게 살려고 하는 자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자가 누구인지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자신을 따르지 않는 성도들을 협박합니다. 자신의 요구대로 살지 않으면 이 땅의 부요와 형통은 없을 것이라고 위협합니다. 그러기에 성도에게는 그 요구가 두려움으로 다가 옵니다.

 

요한계시록 13장에서 땅에서 나온 짐승은 바다에서 나온 짐승을 섬기라고 강요하는데 만약 섬기지 않으면 666표를 받지 못하고 그것을 받지 못하면 거래도 할 수 없어 궁핍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에 성도들이 두려워하여 그 표를 받으려 할 때 14장에서 강하게 말하기를 이 표를 받지 않은 자, 반대로 어린양의 표를 받은 자만이 새 노래를 배우게 될 것이라고 하며 하나님만 경외하고 그 표를 받지 말라고 합니다. 이렇게 받지 않으려면 인내가 필요하고 심지어는 죽을 수도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세상적 가치관은 사람들을 두렵게 합니다. 만약 그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세상에서 소외를 당하고 핍박을 받으며 결과적으로는 세상에서 실패한 인생이 될 수 있다고 겁박을 합니다. 그러기에 세상 사람들 뿐 아니라 연약한 성도들도 세상 권세 잡은 마귀를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잠시 생각을 해 보면 누구를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로운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본문에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라고 표현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무슨 말일까요?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를 아시고 심판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사탄은 우리를 잠시 곤란하게 하고 궁핍하게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심판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1028).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1029-31). 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대 누구를 두려워해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19장을 보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19:4-6). 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날개로 업어 구원해 주셨고 온 세계가 당신의 것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이는 누구인가요? 위협만할 줄 아는 세상인가요? 온 세상의 주인이시고 심판자 되시는 하나님이신가요? 당연히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이 땅의 수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오해해서 그렇겠죠.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을 오해해서 이웃집 아저씨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분은 어차피 남인지라 우리를 징계하지 않습니다. 지나가다가 호통한번 치시고 혼 내준다고 협박하고 마는 아저씨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본문을 보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 아버지는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분이라고 부연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공의로 심판하시고 죄를 보면 참지 못하시는 분이 우리의 아버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지 방관자가 아니십니다. 이 시대 사람들은 사랑과 용서를 말하면서 하나님보다 더 관대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요즘 세상은 사람들에게 무엇이든지 용납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가르칩니다. 다른 것 뿐 아니라 틀린 것도 받아들이라고 요구합니다. 죄인을 용서하고 용납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죄까지도 용납하라고 강요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를 이용가치로 판단하고 받아들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바르지 않지만 이용가치가 있으니 참아주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로 받아들이신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들을 바르지 않은 삶 가운데 영원히 내어버려 두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히브리서 12장의 말씀처럼 자녀에게는 징계가 따르고 징계가 없으면 사생자라고 했던 것처럼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심판하십니다. 이 심판은 종말론적 심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심판받지 않습니다. 심판받지 않는 이유는 18절부터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본문에서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신다는 말은 종말론적 심판 즉,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심판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시는 징계가 있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성도를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하셨고 결과적으로 완성시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완전해 져서 성도 된 것이 아니라 성도가 되었기에 온전한 주의 백성답게, 주의 자녀답게 만들어 가시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는 자를 만듭니다.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두려워하느냐에 따라 선택이 달라지고 그 선택은 그의 미래를 결정하게 됩니다. 그래서 칼빈은 모든 신앙의 기초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초대교회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잃어버릴 때 한 사건을 통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다시 생기게 됩니다. 사도행전 5장의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입니다. 그들은 땅을 팔아 모두 바친 바나바가 칭찬을 받자 사람들의 칭찬을 기대하며 헌금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땅 판 값의 일부는 땅에 묻어 두고 드렸다가 성령을 속였다는 죄목으로 죽었습니다. 사도행전은 이 사건을 통해 교회에 새로운 변화가 생겼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아는 성도가 됩시다. 하나님은 속지 않으십니다.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으시는 분임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심은 성도를 성도답게, 하나님의 자녀를 하나님의 자녀답게 만드시려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그네로 있을 때에그렇게 하라고 하십니다. 나그네로 있다는 것은 본향에서 받을 칭찬과 영광을 기대하며 오늘을 살라고 한 것입니다. 여행지에서 긴장이 풀려 바르지 않은 행위를 하였다가 본향에서 부끄러움을 당하는 자가 아니라 여행지인 이 땅에서 바르게 행하고 본향에서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칭찬받을 것을 기대하며 오늘을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바랍니다. 바라기는 하나님을 두려워합시다. 그래야 우리의 삶과 신앙생활이 바를 수 있습니다.

 

18절과 1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제가 17절을 말씀 드리면서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것이 종말론적 심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 것의 이유를 18절에서 말씀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18절의 말씀을 보면 우리가 구원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함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을 얻은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18절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이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해야 할 이유는 지옥에 갈까봐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훈육에 대한 두려움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두려움으로 지내라는 말도 소극적인 의미에서 혼나지 않으려고 두려움으로 지내라고 하셨다고 한 것보다는 적극적인 차원에서 두려움으로 지내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본 절을 시작하면서 너희가 알거니와라는 말로 시작한 것입니다.

 

너희가 알거니와란 우리가 나그네로 있을 동안에 두려움으로 지내야 할 이유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이 금이나 은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한 마디로 하면 그 구원이 정말로 값진 것이기에 구원에 합당한 자로 살라고 하는 강한 요구인 것입니다.

 

여기서 대속이란 말이 있는데 이 말은 개역성경은 구속이라고 번역했는데 헬라어는 뤼트로오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속전으로 자유롭게 하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노예를 돈으로 해방시킬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속하셨다또는 구속하셨다란 말은 대가를 지불하고 우리를 구원해 내신 것입니다. 노예에서 자유인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겨주셨는데 그것을 위해 예수님의 피를 대가로 지불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두려움으로 지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두려워함이란 공포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신앙적으로 두려워함이란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기인하여 생기는 두려움입니다. 배우자를 사랑하기에 그가 싫어하는 일을 하지 않는 두려움입니다. 누군가를 존경하기에 자신의 생각을 자제하고 그가 원하는 일을 행하는 두려움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감사하기에 하나님께서 원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것에서 오는 두려움입니다.

 

그렇다면 그 두려움은 어디에서 드러나야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본문의 말씀대로 우리가 대속함을 받은 곳에서입니다. 그 곳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입니다. 너희 조상이 물려준 헛된 행실이란 전통과 관습, 우상숭배 또한 악한 행위를 모두 포함합니다. 이 중에서 본문과 관련한 헛된 행실이란 바르지 않은 행위입니다. 세상과 짝하는 행위입니다.

 

15절 말씀에 근거하여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모습이 드러나기는커녕 하나님의 얼굴을 부끄럽게 하는 모든 행위입니다. 17절 말씀에 근거하면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모든 행위입니다. 그 모든 것에서 우리가 구속을 받았다는 것은 다시는 그 가운데 사는 자가 되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 곳에서 나왔는데 다시 들어가는 것은 바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돼지가 그 배설물에 눕는 것과 같고 개가 그 토한 것을 다시 먹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허무한 행위인지 헛된 행실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종교적인 모습 속에도 헛된 행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중심은 없고 종교적 행위만 있는 것이 헛된 행실입니다. 눈멀고 다리 저는 제물을 가져와 하나님께 드렸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온전치 않은 헌신과 사람의 눈치를 보며 하는 신앙적 행위로 하나님 앞에 나온 모습이 헛된 행실입니다. 커다란 예배당과 많은 사람이 모인 것이 부흥이라고 믿고 그것을 추구하는 우리의 모습이 헛된 행실인 것입니다.

 

이 모든 것에서 우리는 해방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치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새롭게 정립되어야 합니다. 이 땅의 가치관인 무엇이든 크고 많고 높고 유명한 것이 성공한 것이라고 하나님과 관계없이 추구하는 모든 것에서 해방되어 크기와 상관없고, 물량과 상관없고, 높고 낮음에 상관없고, 유명해지는 것과 상관없이 오직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에 맞추어 생각하고 행동하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야 할 이유를 우리가 읽은 19절의 말씀이 아주 강하게 말씀하시는데 그것은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란 말씀입니다.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예수님의 피로 구속을 받았으므로 우리도 그 피에 합당하게 흠 없고 점 없는 자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주어진 말씀도 우리가 왜 두려움으로 지내야 하는지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20절과 2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는 창세전부터 미리 알린바 되신 이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바 되었으니 너희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우리의 구원이 어떻게 주어진 것인지에 대해 말하고 결론적으로 말하기를 너희의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라고 맺고 있습니다.

 

우리가 두려움으로 지내야 할 중요한 이유로 본 절은 우리의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신경 써야 할 시기와 장소는 하나님과 그의 나라입니다. 이 땅이 아닌 것입니다.

 

성도가 이 땅에 살면서 성도답지 못하게 사는 이유는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온전히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세상의 부패한 관행을 따르고 허영을 좇아 살며 남보다 우월한 부와 명예를 얻는 것을 자랑으로 삼아 일생을 보내는 것입니다. 참된 가치와 목표를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처럼 푯대가 분명해야 그 달려갈 길을 바르게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사역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회를 한다고 하면서 진리가 아닌 것을 가르치고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부흥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법을 어긴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믿음과 소망을 두지 못한 것의 증거인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들의 평가를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성도는 주님을 얻고 세상을 잃은 사람들입니다. 천국을 얻고 이 땅의 부귀영화를 잃은 사람인 것입니다. 성도는 세상 것 다 잃어도 아무것도 잃은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로 생명을 얻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성도는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여 이 땅의 가치와 세상의 유혹과 날마다 싸우는 자인 것입니다.

 

최초의 인간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얻고 생명을 잃고 에덴에서 쫓겨나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잃었다면 이제 우리는 세상을 잃고 주께서 주신 영원한 생명을 얻고 하나님과의 사랑의 교제를 회복한 자인 것입니다.

 

성도는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10:28)는 주님의 말씀을 항상 기억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능히 살아 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능히 죄와 세상의 유혹을 이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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