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막 6:30-44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송하여 전도의 일을 하게 하였고 그 일로 인해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더 퍼져 헤롯에게까지 퍼졌습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헤롯이 죽인 세례요한이 살아났다거나 엘리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런 와중에 제자들이 주님께 돌아왔고 그들은 자신들에게 벌어진 놀라운 일들에게 대해 주님께 고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한적한 곳에 가서 쉴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오고가는 사람이 많아 식사할 겨를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후에 주님은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셨고 이를 안 사람들이 예수님보다 먼저 그곳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오병이어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오병이어기적을 일으키신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목자 없는 양같이 여기셨다는 사실입니다.
3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당시 이스라엘에는 목자다운 목자가 없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이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 그리고 제사장들과 에세네파 그리고 열심당 등이 있었지만 백성들의 배고픔과 목마름을 해결해 주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자신들이 추구하는 방향에서 열심을 낼 뿐 백성들을 진정으로 위해주는 이들은 없었습니다.
제사장그룹이었던 사두개파들은 태생적으로 주어진 우월한 제사장의 지위를 가지고 재물을 모으고 정치에 결탁해 사는 존재들이 되었습니다. 바리새파들은 종교적 열심을 내었지만 그 열심은 백성들을 정죄하는 도구가 되어 자신들만의 세계에 사로잡혀 사는 존재들이 되었습니다. 에세네파도 그러했으면 열심당은 나라의 자주권을 찾겠다고 힘을 냈지만 도리어 사회를 혼란스럽게 할 뿐 백성들의 진정한 목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세례요한이 나타나 백성들의 영적 목마름을 해결해주었습니다. 거침없는 행보로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죄를 지적했습니다. 메시야의 나라를 기대했던 백성들은 그를 따르기에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동서사방에서 요한에게 나아왔습니다. 그는 어두운 시대의 등불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도 헤롯 안디바에게 잡혀 죽음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제 그 시대에 진정한 목자는 없어 보였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본격적으로 나기 시작했고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구름떼같이 몰려들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엄청난 인기에 취해 있기보다는 따를 이 없이 이리저리 헤매며 목자를 찾아다니는 당시 사람들의 불쌍한 현실을 보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주님의 백성들을 향한 마음이 기록된 것입니다. 그것은 “목자 없는 양같이 여기사 불쌍히 여기셨다”는 내용입니다.
지금 이 시대 우리들을 보시면서도 동일하게 불쌍히 여기십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목자를 찾아 헤매고 다닙니다. 요즘 대선인데 우리를 이끌 목자를 선택하는데 모두 골머리를 앓습니다. 이 사람도 저 사람도 만족이 되질 않습니다. 우리의 경제도 그렇고 자녀들의 문제도 그렇고 이리저리 목자를 찾아다닙니다. 하지만 진정한 목자가 없는 시대임을 압니다. 정말 절망인 것은 진정한 목자이신 주님을 따르는 교회까지도 이 땅의 백성들의 목자가 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진정으로 불쌍히 여기는 이는 주님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정치도 종교도, 또 나름 사회 지도층인사들도 모두 목자가 되지 못합니다. 오직 주님만이 우리의 목자이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다 나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노라”고 말입니다.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신 주님은 그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셨고 때가 저녁이 되었습니다. 이에 제자들은 주님께 나아와 그들을 마을로 보내 먹을 것을 사먹게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이에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과 주님이 무리를 대하는 자세가 확연히 차이가 납니다.
제자들은 무리들의 필요를 각자 해결하게 하자고 했다면 주님은 제자들에게 해결해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대화 뒤에 나오는 엄청난 사건을 알지 못한다면 주님과 제자들과의 대화에서 제자들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상하신 것입니다. 날은 저물었고 오천 명을 먹일만한 방법도 없었으면 돈도 없었습니다. 당연히 제자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방책은 각자 해결하고 오는 것이었습니다. 도리어 주님께서 하신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말씀이 이상한 것입니다.
이에 제자들은 말하기를 이 무리를 다 먹이려면 200데나리온의 돈이 든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에 반응하지 않으시고 물으시기를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제자들이 두루 다니며 떡을 찾았고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받아 주님께 가지고 왔습니다. 이는 다른 복음서에 보면 이 떡은 어린아이의 도시락이었습니다.
주님은 이에 제자들에게 무리를 50명씩 무리지어 앉게 시켰고 제자들은 주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행했습니다. 마치 갈릴리 가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종들에게 돌 항아리 여섯에 물을 채우라고 하신 것과 같습니다. 그 때 가나 혼인잔치 집의 종들도 순종했다면 제자들도 그 말씀에 순종하여 50명씩 앉혔습니다.
그런 후에 주님은 하늘을 우러러 떡 다섯과 물고기 두 마리를 두고 축사하시고 떡을 떼고 나누고 물고기도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그 결과 무리가 배불리 먹고 열두 광주리가 남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마치 가나 혼인잔치 집의 물을 종들이 떠나가 연회장에 갖다 주었을 때 물이 변하여 최상급 포도주가 된 것과 같은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주님은 이 사건을 통해 제자들과 무리들에게 가르치고자 하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 당신이 목자 없는 양 같은 무리들에게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 필요가 표면적으로는 빵이었습니다. 그들의 굶주림에 주님은 떡과 물고기로 배를 채우셨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그들에게 주시고자 한 것이 빵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이후에 주님을 계속해서 따랐고 주님은 그들을 책망하시면서 빵을 통해 계시하신 자신을 보지 못하는 것에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요한복음은 이 사건 뒤에 주님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가리켜 나는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6:35).라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이 오병이어 사건을 통해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자신이 생명의 떡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 살았듯이 주님도 우리에게 자신을 주어 우리를 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생명의 떡이 되셔서 우리에게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주님은 요한복음 6장 51절에서 다시 말씀하시기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받지 못하고 떠났습니다.
주님은 목자 없는 양 같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친히 선한 목자가 되셨을 뿐 아니라 우리에게 자신을 내어주셔서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분은 우리에게도 무엇인가를 하길 원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에 대해 초점을 맞출 뿐 아니라 그 일에 쓰임 받고 있는 제자들도 잠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먼저 제자들은 사람들을 먹이도록 위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3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주님이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처음 주님의 부르심을 입었을 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부활 하신 후 갈릴리로 가셔서 제자들을 만나시고 베드로에게 세 번 자신을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후 베드로에게 말씀하기기를 “네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제자들의 사명은 양떼들을 먹이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의지해 제자들은 자신을 생명을 다해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시대 우리들에게도 주님은 양떼들을 먹일 것을 명하셨습니다. 목사들에게 주어진 말씀뿐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들은 누구나 이 시대 목자 없는 양처럼 헤매고 있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말씀을 전하여 그들의 영혼에 생명의 양식을 먹일 사명이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 주님께서 오셨고 결국에는 자신을 내어 주심으로 일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주님께서 맡겨주신 이 땅의 양떼들에게 생명의 양식인 말씀을 전하여 굶주린 그들을 배부르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제자들은 음식을 찾아야 했습니다.
38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이르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 하거늘”
제자들은 자신들에게 손에 음식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찾아보라고 하심으로 무리들 속에 들어가 음식을 찾았습니다. 기껏 찾은 것이 어린 아이의 도시락이었지만 제자들이 찾아온 그 음식으로 남자만 5천명을 먹이고도 남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도 주님의 양떼를 먹일 양식을 찾아야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름만 그리스도인일 뿐 그리스도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교회를 오래 다녀도 성경을 제대로 한번 읽어본 적이 없습니다.
어제 고향친구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같이 교회 다니던 후배가 신천지에 빠졌는데 어떡하면 좋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묻기를 왜 신천지에 그렇게 깊게 빠지냐고 묻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왜 이 땅의 크리스천들은 이단들이 접근하여 성경에 대해 말하면 대항할 힘이 하나도 없을까요?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성경에 대해 진지하게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껏 한 것이 제자 훈련입니다. 이곳저곳을 끄집어내서 교회의 일군 되는 훈련을 받고 성경을 안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본 성도들을 찾기가 정말 힘이 듭니다. 또한 성경을 진지하게 공부하고자 하는 열심도 별로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 먹일 양식이 없는 것입니다.
아니 주변 사람 먹일 양식을 고사하고 자신도 매일 굶주리고 있습니다. 삶이 문제에 빠질 때 그 문제에서 자신을 구원할 양식인 말씀이 풍성하게 역사하질 못합니다.
성도 여러분,
찾아야 합니다. 잠언과 전도서는 지혜를 찾고 지혜를 얻으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지혜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삶의 방식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생명의 양식이 되는 말씀을 찾아야 합니다. 또한 그 말씀이신 주님을 진하게 찾고 만나야 합니다. 그런 사람에게 생명이 풍성하게 되고 주변을 살릴 수 있는 능력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제자들은 사람들을 무리지어 앉힌 후 빵을 나누어 주어야 했습니다.
4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시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축사하신 후에 떼어 주는 빵을 무리들에게 나누어주어야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바구니에서, 아니면 주님의 바구니에서 계속해서 생겨나는 빵과 물고기를 보았습니다. 빵을 받아먹은 사람들보다 빵을 나누어주는 제자들이 더 많은 은혜를 받은 것은 당연한 것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랬는지 몰라도 요한복음에는 이 사건 후에 예수님께서 자신을 생명을 주는 빵이므로 자신을 먹어야 한다고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주님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제자들만큼은 생명의 말씀이 여기 있사오니 우리가 어디로 가리이까? 라고 말하며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을 받기만 하는 사람들보다 말씀을 준비하고 전하는 자들이 더 많은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주님을 전하다가 더 많은 은혜를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히브리어는 “배우다”와 “가르치다”를 구분하지 않고 한 단어 “라마드”를 사용합니다. 그 이유는 가르치면서 배우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그러면 말씀을 들을 때와는 또 다른 은혜를 받게 됩니다. 가르치고 전하다가 자신은 더 많은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선한 목자로 우리에게 생명의 떡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께서 맡겨주신 하나님을 말씀을 위탁받은 자로 말씀을 찾고 말씀을 전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말씀을 전해야 때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불신앙적인 요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의 반응과 같은 우리의 모습니다.
35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때가 저물어가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여짜오되 이 곳은 빈 들이요 날도 저물어가니”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인간적 한계가 본문에 있습니다.
그것은 시간적 한계인 “날도 저물어가니”와 장소적 한계인 “빈들”입니다. 또한 37절에서는 경제적 한계인 “이백 데나리온”입니다.
제자들은 극히 인간적인 눈으로 한계상황에 대해 직시했고 주님께 말씀드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복음을 전하거나 삶의 문제 부딪칠 때, 이 세 가지는 우리들의 한계를 실감하게 하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식게 합니다.
현재 한국교회는 시간적, 장소적, 물질적 한계에 부딪혀 스스로 주저앉아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이제 전도가 안 된다는 둥, 돈이 없어서 전도할 수 없다는 둥, 우리 동네는 늙은 동네라 이동이 없다는 둥, 이젠 새롭게 들이는 말도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에도 이 문제들이 하나님을 믿고 나아가지 못하게 합니다. 삶의 문제들에 부딪힌 성도들은 시간적, 장소적, 물질적 한계에 짓눌려 믿음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전능하심에도 불구하고 그 전능하신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처럼 이미 날도 저물고 빈들이며 돈도 없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보라고 하고 그것을 당신에게 가져오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그분의 손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 손에서 받아든 복음, 그 손에서 받아든 믿음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전도와 삶의 회복을 이루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심으로 당신을 우리를 위해 생명의 떡을 내어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도 주님의 은혜로 생명을 얻어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말씀이신 주님을 찾아 만나고 믿음으로 주변에 나누어 주어진 생명이 더 풍성해 지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