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귀한 선물

행 3장 1-10절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네가 제일 갖길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말할까요? 돈, 건강, 명예, 이성, 성공, 집, 땅 ????

 

 

뭐 이런 것들을 요구했다고 해서 신앙이 없다거나 세속적이라고 말할 것은 없습니다. 그것은 현실이고 인생이니까요. 돈이 없는 현실의 삶을 살아가는 분은 돈이 가장 필요할 것이고 건강이 안 좋으신 분은 당연히 건강일 것입니다. 우리 교회적으로는 숫자적인 부흥과 교회 이전일 것입니다. 이래저래 우리들이 바라는 것들은 세속적일 수도 있겠지만 현실을 사는 우리들에게 있어 갖고 싶은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한 앉자 구걸하던 이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었습니다. 아니 그 보다 더 큰 것을 얻었습니다. 아니 비교할 수도 없는 것을 얻었다고 해야 맞습니다.

오늘 본문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하나님의 나라의 때에 대해 묻는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고 했고 그 말씀을 들은 500명의 사람들 중에 120명만이 열흘을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중에 성령이 불같이 임하여 새롭게 되는 경험을 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이 일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일은 제자들 뿐 아니라 그 집 옆을 지나던 모든 이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120명의 사람들이 한 집에 모여 기도하면서 자신들이 살던 나라의 말로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놀라운 현상에 대해 비꼬아 말하기를 "새술에 취했다"고 했습니다.

 

 

이 놀라운 사건으로 인해 사도들은 놀랍게 변화되었습니다.

먼저 사도 베드로는 두려움으로 숨어 지내던 삶을 뒤로하고 밖으로 나가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설교를 들은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성령이 임하심은 사도들에게만 국한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증거가 베드로의 설교입니다. 성령이 임하시기 전의 사람들은 예수님 뿐 아니라 그를 추종하던 자들에게까지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에 그리스도를 죽인 죄를 지적하는 베드로의 설교에 가슴을 찢고 회개하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것도 한두 사람이 아니라 수천 명의 사람들이 매일 주께로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일의 연속선상에 오늘 본문의 일이 벌어졌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평소처럼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가던 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루에 세 번 기도했습니다. 오전 9시, 오후 3시 그리고 해질녘에 기도했습니다. 본문의 9시 기도는 오후 세시 기도입니다.

 

 

기도하러 올라가던 중에 그들의 눈에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한 사람이 들어왔습니다.

그에 대해 2절은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이 사람의 현실을 정말 비참했습니다. 그가 몸에 장애가 있고 구걸을 하는 사람이라서 비참하기 보다는 그의 구걸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어 보이는 모습 때문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구걸을 하라고 그 자리에 두는 자입니다. 여러 가지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긍정적으로는 그를 불쌍히 여긴 이웃들이 그의 수입을 위해 성전 미문 앞에 데려다 주고 데려 가고 했는지도 모릅니다. 반대로 부정적으로는 요즘 못된 사람들이 몸이 불편한 사람들을 역이나 공원에 내려놓고 저녁이 되면 데려가면서 그의 수입을 가로채는 것처럼 그도 그런 이용을 당하는 사람이라고 생각될 수 있습니다.

 

 

어찌되었건 그는 자신의 삶을 어찌하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만 그럴까요?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끌려 다니며 자신이 무엇을 위해 사는지도 모르고 살아갑니다. 공부하는 목적도, 돈을 버는 목적도, 살아가는 목적도 잃어버리고 인생이 이끄는 대로, 세상이 이끄는 대로 그 자리에 놓여 져 하루를 보냅니다. 하루하루의 삶이 자기주도의 삶이 아니라 세상이 이끄는 대로, 세상의 가치가 이끄는 대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산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그렇게 살기 때문입니다.

 

 

마치 앞에 사람이 달리니 자신도 달리고 그것을 본 주변의 사람도 함께 달리는 것과 같습니다. 인생을 허락하신 주님의 목적을 인식하지 못하고 사니 생각할 겨를도 없이 열심히 달리기만 합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에 입사하고 결혼하고 자식 낳고, 그 자녀들 출가시키면 손자 손녀에 매이고 그러다가 주께서 부르시면 가는 그런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단지 그 속에서 영적인 자기를 발견하고 영적인 삶을 주도적으로 살지 못하면 본문의 앉은뱅이와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영적인 앉은뱅이입니다.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무슨 말을 하냐고 할 것입니다. 스스로 인생을 계획했고 이만큼 이루었는데, 믿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별 다를 것이 없는데 무슨 말이냐고 하실 것입니다. 제 말은 육체의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2장 1절은 우리의 과거를 죽었었다고 말합니다. 죽은 자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냥 그 자리에 누워 있을 뿐입니다. 누군가가 들어다 놓으면 그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이 죽은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은 단 하나 누군가가 살려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구원입니다. 그것이 영적 앉은뱅이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며 희망입니다.

 

 

또한 모든 인생은 앉은뱅이와 같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본문의 걸인은 고침을 받자마자 성전으로 달려 들어갔습니다.

8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그가 일어나자마자 했던 첫 번째 것이 성전으로 달려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집으로 갈 수도 있었을 텐데. 그가 그렇게 한 이유는 그는 장애가 있다는 것 때문에 부정하게 여겨져 성전에 한 번도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는 성전 문 앞 까지는 갈 수 있었지만 그 문지방을 넘지 못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백성,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은 천국 문 앞에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나름의 종교와 선행으로 천국을 얻으려고 하지만 근원적인 부정, 즉 원죄와 자범죄로 인해 성전 문 앞에 있을 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많은 종교들이 선행과 공로를 요구합니다. 불교도 그렇고, 흰두교도 그렇습니다. 기독교와 비슷한 천주교도 그렇고, 이단인 신천지도 그렇습니다. 모두가 천국 문 앞에서 헤매고 있을 뿐 들어가지 못합니다.

 

 

성도 여러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 문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0장에서 주님은 당신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하셨습니다. 14장 6절에서 주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외 다른 방법은 모두 강도요 절도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사람들을 유혹해서 갈취하고 죽이려는 것뿐이지 진정한 생명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의 선행은 힘이 없습니다. 그것으로는 죄를 속할 수 없다 이것입니다. 오직 그리스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없는 백성들은 비참한 것입니다. 비참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그 삶에 이미 익숙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삶에서 벗어나면 그것이 얼마나 비참한 삶인지 알게 됩니다.

 

 

범죄한 인간의 비참함에 대해 창세기4장은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후에 하나님을 가인을 내어 쫓았습니다. 그랬을 때 가인이 한 땅을 지정하여 거했는데 그 땅 이름이 '놋'입니다. 놋이란 말의 뜻은 '방랑'입니다. 범죄하고 하나님을 떠난 인생이 방랑이라는 것일 것입니다. 또한 그와 그의 후손들의 삶이 그들의 두려움을 나타냅니다. 그는 아들을 낳은 후에 성을 쌓았습니다. 두려웠을 것입니다. 아벨을 죽인 후에 하나님은 누구도 가인을 해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은 아벨을 죽인 가인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했는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성을 쌓았습니다. 그의 후손들 중 라멕은 두 명의 아내를 두었고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을 죽였습니다. 또한 그는 말하기를 가인에게 해를 가하면 벌을 칠배를 받는다면 자신에게 해를 가하면 칠십 칠배로 벌을 주겠다고 말하며 자신의 두려움과 악함을 드러냅니다. 또한 두발가인은 쇠로 갖가지 연장을 만들어 자신을 지키려 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 범죄한 인생의 모습니다.

 

 

미래가 두렵고 세상이 두려워 자신만의 성을 쌓고 조그만 해를 당하면 과하고 거칠게 보복을 하며 두려움을 잊기 위해 쾌락에 빠져드는 인생들의 모습입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주님께서 찾아오신 것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갑시다.

그는 성전에 기도하러 가던 베드로와 요한에게 구걸을 하였습니다. 그런 그를 베드로와 요한이 주목하여 보고 그에게 자신들을 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성전에 들어가는 누구에게나 구걸을 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에게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관심을 가진 것은 수많은 사람들 중에 베드로와 요한이었습니다. 사실 베드로와 요한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날 이전에도 이 걸인은 매일 그곳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날 그의 소리가 베드로와 요한의 귀에 들린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 안에 계신 성령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앉은뱅이를 만난 이는 베드로와 요한이 아니라 성령, 즉, 주님이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찾아와 만나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비참함, 우리의 두려움을 모두 몰아내고 참 평강과 천국을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본문의 앉은뱅이가 사도들을 만나고 나서 사도들에게 바란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물질이었습니다. 그래서 본문을 보면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자신에게 무엇인가 줄까하여 보았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생들이 자신에게 찾아오신 주님께 원하는 것은 물질입니다. 건강의 회복이고 사업과 삶의 회복입니다. 그것을 바라고 예수님을 찾습니다. 많은 교인들도 그렇습니다. 진정으로 주님을 만나고 싶은 사람보다는 주님께서 주시는 부스러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얼마 전 성도들에게 한 조사를 보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성도들이 제일 듣고 싶어 하는 설교는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첫째가 '축복', 둘째가 '위로' 순이랍니다. 반대로 듣기 싫은 설교는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첫째가 '헌금', 둘째가 '회개' 순으로 나왔답니다.

 

 

여러분을 예수님을 왜 믿습니까? 여러분이 주님께 바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혹시 교회 나오고 하나님을 믿는 이유가 돈 많이 벌고 건강해 지고 만사형통하는 것입니까? 혹시 그것 없으면 떠나실 분은 없으십니까? 모든 것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린다면 주님을 욕하고 떠나실 분은 없습니까?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하는 것은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앉은뱅이가 원했던 돈을 주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실망시키는 말을 합니다. 자신에게는 은과 금이 없답니다. 누굴 놀리는 것도 아니고 자신을 보라고 해 놓고 아무것도 없다니 말이 됩니까? 그 다음 말을 곧 이어서 하지 않았다면 앉은뱅이는 베드로의 얼굴에 침을 뱉어 버렸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말하기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외치며 그 이름으로 일어나라고 명하였습니다.

 

 

베드로가 그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귀한 것, 금과 은으로는 비교할 수 없는 것, 그것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여기서 이름이라는 말은 그의 인격, 그의 실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이름이 아닙니다. 그 이름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 예수님 자체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앉은뱅이는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한 베드로가 일으킨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친히 일으키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의 일으켜 세우시고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삶에 찾아 와 계십니다. 성경에 주님께서 우리의 삶을 권고하신다는 표현이 자주 나옵니다. 여기서 권고란 단어는 히브리어 "바카드"인데 이는 "방문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우리의 삶을 권고하신다는 말은 우리의 삶의 영역에 방문하신다는 것입니다. 아니 우리 안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냥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이 가지고 계신 모든 것을 가지고 와 계신 것입니다. (엘리사의 지팡이가 아니라 엘리사 자신이 온 것과 같음) 권능의 주님께서 우리 안에 계신 것입니다. 이것은 사변이 아닙니다. 드러난 현상입니다. 관념이 아닙니다. 분명한 실제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니까 그래도 주님보다 돈이 더 좋은데, 주님보다 건강, 주님보다 지위나 권력이 좋다고 하시는 분이 있을 줄 압니다. 아니 우리 중에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을 보면 이 모든 것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8절로 10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예수님을 만난 앉은뱅이는 더 이상 그 자리에서 구걸을 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는 걷고 뛰어 성전으로 달려 들어갔습니다. 그에게 일어난 변화는 돈으로도 살 수 없었고 인간의 어떤 능력으로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에게 일어난 변화는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분을 만나는 것으로부터 그의 건강이 회복되어지고 영혼이 회복되고 그의 손과 발이 힘을 얻어 그의 손으로 수고하여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더 이상 구걸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더 이상 성전을 드나드는 사람들을 부러워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더 이상 미문가에 앉아서 죽기만을 기다리는 삶을 살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난주에는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그 주님을 만날 뿐 아니라 그분의 은혜를 사모하기를 바랍니다. 여기서 구체적으로 은혜란 그분으로부터 떨어지는 부스러기가 아니라 그분과의 영적인 친밀함의 교제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분께서 우리의 삶의 문제들을 알아서 해결하실 것입니다. 그분과 깊은 교제를 갖는 사람의 고백은 바울처럼 하게 됩니다. "이제는 내가 산 것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말입니다. 나아가 세상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선물하십시오. 그것이 우리가 세상에 줄 수 있는 가장 귀한 선물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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