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징계하소서

예레미야 1023-24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를 지적하시며 그 행위가 얼마나 헛된지를 말씀하시는 것으로 본문 10장을 시작하셨습니다. 이 우상숭배는 세대를 초월하고 민족을 초월하여 행해지고 있고 지금도 여전해 행하여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우상숭배하고 있는 이스라엘을 책망하시는 내용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부르셔서 시내산에서 만나실 때 그들에게 처음으로 주지시킨 것은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우레와 같은 소리로 백성들에게 말했고 백성들은 그 소리가 너무 무서워 모세에게 말하기를 하나님으로 직접 말하지 않게 하고 당신을 통해 듣게 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하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하늘로부터 너희에게 말하는 것을 너희 스스로 보았으니 너희는 나를 비겨서 은으로나 금으로나 너희를 위하여 신상을 만들지 말라”(20:22,23)고 하셨습니다.

 

또한 십계명의 첫 번째와 두 번째 계명으로 우상숭배 금지를 명하셨습니다. 말씀하기를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20:3-6)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상숭배에 대해 철저하게 금하셨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언약하고 40일도 채 지나지 않아 모세가 내려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신들을 위하여 자신들을 인도할 신을 만들었습니다. 바로 금송아지였습니다. 그 일로 인해 많은 사람이 주의 심판으로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리고 40년간 광야에서 훈련을 받고 신세대가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전 모압 땅에서 또다시 바알브올을 섬기는 일에 참여했다가 심판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일은 끊임없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와 사사시대 내내 우상을 숭배했고 솔로몬도 여인들과 결혼하면서 우상을 공식적으로 가지고 들어왔으며 남북이 갈리는 과정에서 북쪽의 여로보암은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기며 그 뒤를 따르는 왕들과 백성들이 그 우상을 음란하게 섬기게 했습니다.

 

이렇게 우상을 숭배했던 이스라엘의 죄를 책망하시며 그것의 결과인 심판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들은 우상을 섬겼던 것일까요? 그들이 우상을 섬길 때마다 징계를 받고 고난을 당했음에도 왜 변하지 않고 계속된 우상숭배를 행했던 것일까요?

그것은 먼저 우상이 자신들을 길을 인도할 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2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사람의 길이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

 

이 말씀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기도입니다. 이 기도에 근거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조명해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걸음을 지도해 주시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발걸음을 하나님이 아니라 우상이 인도해 줄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러기에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서 절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그들에게 그 길을 배우지 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2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여러 나라의 길을 배우지 말라 이방 사람들은 하늘의 징조를 두려워하거니와 너희는 그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2절 초반에서 주님은 여러 나라의 길을 배우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길은 우상숭배의 길입니다. 그들은 우상이 자신들의 길을 인도해 줄 것이라 믿었습니다. 이를 달리 하면 우상이 자신들의 삶에 형통을 줄 줄 믿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가지 말라고 한 길을 따릅니다. 세상의 방법을 따르고 사람들의 소리를 듣고 그 길을 갑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연초가 되고 어려움이 생기면 사람들은 점집을 드나듭니다. 결혼과 같은 대소사를 앞두고 점집을 찾아 갑니다. 어제 뉴스에 결혼하려던 사람이 결혼하면 죽는다는 점쟁이의 말을 듣고 결혼을 취소했다는 기사가 났습니다. 사람들은 우상이 자신의 삶을 인도해 줄 줄 압니다.

 

그런데 문제는 세상에 있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 더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바로 기독교 점쟁이와 기독교 점쟁이를 찾아다니는 우상숭배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앞날을 묻고 그것에 대해 그럴싸하게 대답해 주는 거짓 선지자가 지금도 판을 칩니다. 그 대가로 자신은 그들에게 신과 같은 존재가 되거나 돈을 갈취하는데 이런 자들이 지금도 아주 많습니다. 그들은 주님도 하지 않은 일들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임하게 될지를 묻는 제자들에게 알 것 없다고 말씀하시고 심지어는 자신도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그들은 묻는 것마다 답을 다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한국교회는 부패하여 졌을까요? 참 하나님을 찾지 않고 교회나 절이나, 무당집이나 장소와 대상이 다를 뿐 하는 짓은 어찌 그리 같을까요? 그 이유는 자신의 앞길을 알고 싶은 욕심과 그것을 자신이 믿는 대상이 알려주고 형통하게 해 줄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작 신앙이 영원토록 소유하고 있는 거룩한 삶, 도덕적이고 윤리적이 삶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이미 기독교의 생명력은 잃어버렸고 죽은 종교가 되어 종교라는 틀 속에 갇혀 그 안에 거하며 나름의 종교생활이 주는 즐거움만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점쟁이 목사와 점쟁이 짓을 하는 나름 영성이 있다고 하는 자들은 그 일을 그만해야 합니다. 그러한 행위로 연약한 성도들을 미혹하고 거룩한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벗어나 종교생활이라는 울타리에 가두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어리석게 우상에게 자신의 길을 묻는 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말씀하시기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3“6)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인생의 길을 지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실제로 주님은 광야에서 이스라엘의 길을 인도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막을 건축하고 봉헌 한 후에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인도하시는 것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하나님은 백성들보다 3일 길 앞서서 가시고 쉴 곳을 찾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길을 지도하실 줄 믿고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는 자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읽은 23절에서도 내가 알거니와 사람의 길이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이 땅에서 우리의 삶의 문제를 넘어 영혼의 구원에 대해 말씀하실 때도 동일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주님께서 가신 길을 알아야 따르겠다는 도마의 말에 요한복음 146절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길이십니다. 그러므로 우상이 주는 길, 세상이 미혹하는 길로 가지 아니하며 오직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신의 일을 인도할 것을 믿고 그 길을 따는 자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또한 우상숭배자들은 세상의 징조를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읽었던 2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여러 나라의 길을 배우지 말라 이방 사람들은 하늘의 징조를 두려워하거니와 너희는 그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사람들이 우상을 따르는 이유를 본문에서는 이방 사람들은 하늘의 징조를 두려워하거니와 너희는 그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하늘의 징조를 두려워한다는 것은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을 두려워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신에게 미칠까 두려워하여 우상 앞에 가서 절하고 자신의 안위를 보장받으려 합니다. 이러한 행위는 교인들도 비슷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이유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오직 하나님만으로 기뻐하기보다는 혹시나 자신에게 이 땅에서 벌어지는 안 좋은 일이 미칠까 싶어 하나님을 섬기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헌신은 조건이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환란이 오면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자신이 하나님께 헌신한 만큼 돌아오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의 존재마저 의심합니다. 이러한 신앙은 우상숭배자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의 신앙과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바르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가 하나님께 요청하는 것이 있습니다.

2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여 나를 징계하옵시되 너그러이 하시고 진노로 하지 마옵소서 주께서 내가 없어지게 하실까 두려워하나이다

 

예레미야는 나를 징계하시옵시되라고 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이 말은 백성을 대표하여 하는 말입니다. 예레미야는 왜 징계하여 달라고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평안한 중에는 절대로 그 죄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징계해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징계라는 말을 생각해 보고 징계해 달라는 말을 보아야 합니다.

징계란 히브리어로 야사르라고 합니다. 이는 훈계, 징계, 징벌하다, 교훈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야사르란 말을 헬라어로 번역된 70인역에서는 파이데이아로 했습니다. 이도 히브리어와 동일한 의미를 갖는데 이 야사르파이데이아는 단순히 어떤 죄에 대한 대가로 벌을 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죄에 대한 징벌의 의미보다는 바르지 못한 자녀를 바르게 가르치고 키우기 위한 교육의 의미가 더 큰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예레미야가 징계해 달라고 할 때는 벌을 달라고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자신들을 바르게 교육해 달라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징계해 달라고 하는 본문은 히브리어 문법 중에 니팔형으로 쓰였습니다. 이 단어를 니팔형으로 번역하면 스스로 징계를 받게 하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개역개정성경의 번역도 나를 징계하소서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자신은 원치 않는데 징계를 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여 징계를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자신이 원치 않는데 받는 징계와 자신이 원하여 받는 징계는 그 차원이 다르고 그 자세가 다르고 결과가 다르게 됩니다. 이 차이는 공부하기 싫어하는 아이와 스스로 하고 싶어 하는 아이를 같이 앉혀 두고 가르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 둘 중에 누가 학습 효과가 큽니까? 이렇게 묻는 것 자체가 의미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스스로 징계를 받는 자는 자신이 무엇을 잘 못 했고 어떻게 그 삶을 바르게 해야 하는지 알지만 자신의 힘으로 되지 않기에 하나님의 훈련과 교육 안으로 스스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요구는 예레미야만 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잘 아는 하박국 선지자도 동일하게 요청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도 당시 이스라엘의 패역으로 고민하고 기도했습니다. 예레미야와 동일한 시대 활동했던 선지자입니다. 그도 그 백성의 우상숭배와 도덕적 부패, 종교적 타락을 보며 하나님께 따져 말했습니다. 그러한 패역을 자신이 보지 않도록 그들을 징벌해 달라고 외쳤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바벨론을 통해 이스라엘을 치겠다고 했고 그렇게 해야만 하나님을 인정하시는 신앙이 물이 바다 덮음 같이 온 세상에 가득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하박국은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3:2)라고 하였습니다.

 

선지자들은 항상 동일했습니다. 자신들의 안위나 육신의 형통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오직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일에만 마음을 두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이 땅의 형통과 회복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이 다 사라진다 해도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다워지고 하나님의 영광이 다시 회복 될 수만 있다면 그것이 고통스럽고 힘든 과정이지만 기꺼이 감당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박국은 자신의 노래 결론에서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3:17,18)라고 노래한 것입니다.

 

선지자들은 이렇게 기도하면서 두렵지 않았을까요?

우리가 만약 이렇게 기도한다면 두렵지 않을까요?

아닙니다. 그들도 두렵고 우리도 두려운 것입니다. 마치 군 입대를 앞둔 청년처럼, 지옥 훈련을 앞둔 운동선수처럼 두려운 것입니다. 두려워도 해야 하기에 선지자는 자신을 징계하여 달라고 했고 그것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두려움으로 인해 선지자가 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읽은 24절에 여호와여 나를 징계하옵시되 너그러이 하시고 진노로 하지 마옵소서 주께서 내가 없어지게 하실까 두려워하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박국도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의 기도대로 예루살렘은 바벨론의 공격으로 무너졌고 자신들도 그 고난의 대열에 함께 했습니다. 하박국은 바벨론으로 끌려가 그곳에서 죽었고 예레미야는 자신의 백성들에게 살해위협을 당했을 뿐 아니라 요하난이라는 자에 의해 애굽으로 끌려갔고 그 후에는 어떻게 되었는지 아는 이가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어떻습니까? 우리도 이렇게 기도할 수 있을까요?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지 못하는 부분이 있고 그것을 바꾸고 싶은 열망이 있음에도 자신의 의지로 되지 않을 때 그 일을 위해 자신의 어떤 것을 희생하고라도 회복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선지자처럼 기도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성도가 성도답지 못하고 직분자가 직분자답게 살지 못하는 것으로 인해 고민하며 그것을 끊기를 원하지만 자신의 의지로 되지 않을 때 하나님의 징계를 적극적으로 구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훌륭한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바라기는 이와 반대의 사람은 없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죄를 합리화하고 세상에서는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다는 말로 자신을 거짓 위로할 뿐 아니라 주변 신앙인까지도 물들이려는 사람은 없기를 바랍니다. 자신이 성도답게 살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길 줄 아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경건하게 살고자하는 자들은 예레미야나 하박국 선지자와 동일하게 징계를 구해야 합니다. 그것이 복입니다. 그래야 그 영혼이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징계의 유익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12:5-11)라고 말입니다.

 

또한 요한계시록 319절에서는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한다고 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아직 세상을 우상처럼 섬기며 하나님 앞에 바르지 못한 것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어느날 갑자기 환란이 닥치듯 닥친 징계 앞에서 끌려가듯 고치지 마시고 자원하여 스스로 징계를 구하고 그 안으로 들어가 새로운 신앙의 삶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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