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괴하고 놀라운 세대

5:30-31

 

오늘 본문을 시작하면서 하나님은 예루살렘 거리를 빨리 달리며 어떤 사람을 찾아보라고 하십니다. 그 사람은 본문에 기록된 대로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예루살렘을 멸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동성애를 비롯한 온갖 더러운 죄악으로 심판을 받았던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는 기준이 의인 10명이었다면 본문의 말씀이 주어졌던 당시 예루살렘에서는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멸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루살렘이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강력하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본문 9절과 29절에서 두 번이나 어찌 이 일들에게 대하여 벌하지 아니하겠으며 내 마음이 이런 나라에 보복하지 않겠느냐고 묻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이렇게 진노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 세대의 죄 때문입니다. 5장에서 그 세대의 죄를 지적합니다. 그것을 하나씩 보도록 합시다.

 

당시의 세대를 정의하는 첫 번째 말은 아는 것과 믿는 것이 다른 세대였습니다.

4절과 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말하기를 이 무리는 비천하고 어리석은 것뿐이라 여호와의 길, 자기 하나님의 법을 알지 못하니 내가 지도자들에게 가서 그들에게 말하리라 그들은 여호와의 길, 자기 하나님의 법을 안다 하였더니 그들도 일제히 멍에를 꺾고 결박을 끊은지라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백성들을 변호하려 했습니다. 정직하게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하나도 찾을 수 없다고 하시며 예루살렘을 멸하려 하시는 주님 앞에서 예루살렘 사람들을 변호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4절을 보면 예레미야의 생각에 예루살렘 사람들이 하나님의 법을 알지 못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아니고 일부 비천한 자들에게 국한 된 일이라 여겼습니다. 그들은 배우지 못하고 천성이 악해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 못하였고 그래서 범죄 한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5절 말씀처럼 지도자들을 찾아갔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여호와의 길과 하나님의 법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알고 있기에 그들은 비천한 자들과는 다를 것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을 보면 그 기대는 처참하게 무너졌습니다. 그래서 5절 후반을 보면 그들도 일제히 멍에를 꺾고 결박을 끊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5절 말씀을 현대어 성경은 그런데 바로 이 사람들이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다고 노골적으로 선언을 하고, 하나님의 계명은 자기들은 이제 하나님과 손을 뗀 자유로운 사람들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들은 이제 하나님에게서 완전히 떠나간 사람들이 되어 버렸습니다.”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그들은 천한 자나 귀한 자나, 배운 자나 배우지 못한 자나 모두 한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아는 것과 믿는 것이 같지 않은 세대였습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자였지만 그것은 이성에 국한 되었습니다. 그 아는 것이 가슴까지 내려오지 않은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알기만 할 뿐 믿지는 않는 자들이었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하며 착각하고 살아가는 자들이 많습니다. 자신이 성경을 조금 알고 오랜 시간동안 교회를 다녔기에 하나님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하며 그 아는 것이 믿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살아갑니다. 그럴까요? 아닙니다. 아는 대로 믿는 자가 참 신앙인인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은 참으로 믿는 자이길 바랄 뿐입니다. 믿는 자란 믿는 것과 아는 것에 하나인 사람을 말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서소 413절에서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른다고 한 것입니다.

 

믿는 것은 아는 것에 바탕을 둡니다. 참 믿는 자는 믿음에 합당한 삶이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삶이 없는 자는 믿음이 없는 자이고 믿음이 없는 자는 아무리 성경과 하나님에 대해 알고 있어도 그는 참 신앙인이 아닌 것입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말씀의 홍수에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에 따른 믿음은 찾기 힘든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은 아는 것과 믿는 것에 하나가 되는 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두 번째로 당시는 음란한 세대였습니다.

7절과 8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어찌 너를 용서하겠느냐 네 자녀가 나를 버리고 신이 아닌 것들로 맹세하였으며 내가 그들을 배불리 먹인즉 그들이 간음하며 창기의 집에 허다히 모이며 그들은 두루 다니는 살진 수말 같이 각기 이웃의 아내를 따르며 소리지르는도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영적으로는 우상을 섬겼으며 육적으로는 발정 난 수말처럼 이웃의 아내를 따랐다고 본문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영육 간에 음란한 세대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우상의 이름으로 맹세하였습니다. 이 우상숭배에 대해서는 이미 213절에서 두 가지 악에 대해 말할 때 말씀드렸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더불어 그들은 육체적인 음행도 지적받고 있습니다. 그들이 음행을 한 것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내가 그들을 배불리 먹인즉 그들이 간음했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주신 풍요를 가지고 음행한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차라리 가난하고 환란 가운데 있는 것이 복이었을지 모릅니다.

 

성도는 풍요로울 때 위험한 존재입니다. 가난하거나 육체에 고난이 있을 때는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그분을 의지하며 살다가 풍요로워지면 그 풍요를 감당하지 못하고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래서 호세아는 그의 책 411절에서 음행과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가 마음을 빼앗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도 그러합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우리가 추구하는 세상 것을 우상으로 섬기며 이웃의 아내를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8절 말씀을 현대어 성경은 너희들은 포동포동하게 살이 찌고 성욕을 참지 못하여 날뛰는 수말들과 같이 되었다. 누구나 다른 사람의 아내를 탐낸다. 수말이 암내를 맡으면 웃는 것처럼 욕심을 부리고 있다고 번역하였습니다.

 

어떻습니다.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음심을 얼마나 잘 표현 했나요 수말이 암내를 맡으면 웃는 것처럼 이 세대의 사람들도 그렇지 않습니까? 주인의 아내의 유혹을 뿌리친 요셉이 하나님께 득죄하지 않겠나이다라고 외치는 경건한 사람을 찾기 힘든 세대에 우리들은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주께서 주신 경제적인 풍요가 우리를 음행하게 한다면 그 풍요는 사라지길 바랍니다.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가 우리로 음행하게 한다면 그 지위가 우리에게서 멀어지길 바랍니다. 육체적 건강이 우리로 음행하게 한다면 그 건강도 사라지길 바랍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고린도전서 618절에서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느니라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에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20)라고 했습니다.

 

거룩하고 경건한 세대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먼저 경건하고 거룩한 세대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뒤에 오는 세대들, 지금 청년들과 학생들에게 거룩과 경건에 대해 말하는 것은 울리는 꾕과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라기서 213절에서는 너희가 이런 일도 행하나니 곧 눈물과 울음과 탄식으로 여호와의 제단을 가리게 하는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다시는 너희의 봉헌물을 돌아보지도 아니하시며 그것을 너희 손에서 기꺼이 받지도 아니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말했을 때 그 백성들은 반문했습니다. 다음절에서는 우리가 무엇을 했기에 그러냐고 묻습니다. 이에 주님은 너와 네가 어려서 맞이한 아내 사이에 여호와께서 증인이 되시기 때문이라 그는 네 짝이요 너와 서약한 아내로되 네가 그에게 거짓을 행하였도다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주의 제단으로 나오는 것을 방해하고 삶이 핍절해 진 것은 그들이 음행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아담에게 오직 하와 하나만을 만드신 이유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그에게는 영이 충만하였으나 오직 하나를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만드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라 그러므로 네 심령을 삼가 지켜 어려서 맞이한 아내에게 거짓을 행하지 말지니라(2:15)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한 명의 아내를 주신 것은 경건한 백성을 얻고자 하심이었습니다. 최초의 일부 이처였던 라멕은 본인도 경건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후손들도 모두 경건하지 않은 자들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이 세대가 비록 음란한 세대라 할지라도 성도들은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만약 지금 음행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오늘부터라도 끊고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서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로 당시는 말씀에 반응하지 않는 세대였습니다.

12절과 1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들이 여호와를 인정하지 아니하며 말하기를 여호와께서는 계시지 아니하니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할 것이요 우리가 칼과 기근을 보지 아니할 것이며 선지자들은 바람이라 말씀이 그들의 속에 있지 아니한즉 그같이 그들이 당하리라 하느니라

 

그들은 먼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심하게는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결과는 자신들에게는 재앙이 임하지 않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나아가 선지자들의 외침은 바람으로 여겼습니다. 도리어 그들은 선지자들이 외친 말씀으로 인해 그들이 당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선지자들을 공격하겠다는 것입니다.

 

사실 예레미야를 부를 때 보라 내가 오늘 너를 그 온 땅과 유다 왕들과 그 지도자들과 그 제사장들과 그 땅 백성 앞에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성벽이 되게 하였은즉 그들이 너를 치나 너를 이기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할 것임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1:18,19)라고 했습니다.

 

예레미야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에스겔에게도 인자야 너는 비록 가시와 찔레와 함께 있으며 전갈 가운데에 거주할지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말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도 그 말을 두려워하지 말며 그 얼굴을 무서워하지 말지어다(2:6)라고 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에 임하는 재앙은 자신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재물과 지위가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말씀에 반응하지 않고 도리어 선지자들을 돌로 쳤던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말씀을 받았던 여호야김 왕은 말씀을 읽는 족족 칼로 그것을 찢어 화롯불에 태워버렸습니다. 그들은 귀를 닫고 들으려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몸을 교회에 와 있고 예배를 드리지만 그 말씀에 반응하려 하지 않습니다. 고개를 끄덕이고 아멘이라고 말하지만 그 말씀 앞에 자신을 놓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근거로 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선포되는 모든 말씀은 우리 자신을 향한 것입니다. 심지어 이 말씀을 전하는 목사도 말씀 앞에 자신을 발가벗겨놓고 서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옷이 아닌 마음을 찢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여 애통하는 심령이 되고 나아가 주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서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네 번째로 당시는 주님을 경외하지 않는 세대였습니다.

23절과 2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나 너희 백성은 배반하며 반역하는 마음이 있어서 이미 배반하고 갔으며 또 너희 마음으로 우리에게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때를 따라 주시며 우리를 위하여 추수 기한을 정하시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자 말하지도 아니하니

 

그들은 복 주시는 우리 여호와를 경외하자고 말하지도 않는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글은 그러나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왜 그러나라고 했을까요?

 

22절을 봅시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가 나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내 앞에서 떨지 아니하겠느냐 내가 모래를 두어 바다의 한계를 삼되 그것으로 영원한 한계를 삼고 지나치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파도가 거세게 이나 그것을 이기지 못하며 뛰노나 그것을 넘지 못하느니라

주님은 천지만물을 주관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하나님을 경외하자고 말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비를 주시고 햇빛을 주시는 분임을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이 하늘을 닫으면 열 자가 없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엘리야를 통해 하늘을 닫고 여신 분이 하나님임을 잊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은 것입니다.

 

사도행전 5장에 아나니아와 삽비라 예기가 있습니다. 그들이 땅 판도 얼마를 숨기고 판값 전부라고 속이고 칭찬 만을 기대했을 때 베드로를 통해 성령을 속인 것이라는 책망과 함께 그들은 죽었습니다. 이 일로 인해 초대교회는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들도 신앙생활의 기본은 경외감입니다. 그렇다면 경외란 무엇일까요? 단순히 두려워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경외란 사랑하는 사이에 쓰는 말입니다. 경외란 사랑하기에 두려워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데 자신을 죽일까봐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사랑하기에 그분이 원하지 않는 일을 기꺼이 포기하는 마음입니다.

 

지금도 많은 이들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습니다. 성도라는 이름으로 살지만 성도답게 하나님을 섬기지 못합니다. 그분을 속이며 그분 앞에서 자신을 온전히 조아리지 않습니다.

 

삶은 둘째 치고 예배의 자세도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습니다. 시간을 지키지도 않고 복장을 갖추지도 않습니다. 동네서나 신고 돌아다닐 듯한 슬리퍼를 신고 교회 오거나 트레이닝복을 입고 예배에 참석합니다. 옷이 그것밖에 없다면 어쩔 수 없지만 세상에서 중요한 사람을 만날 때는 복장을 갖추고 마음을 준비하는 우리들은 언제부터인가 사랑의 하나님, 은혜, 외적인 것은 중요하지 않고 오직 마음이 중요하다는 그럴듯한 이유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습이 사라졌습니다.

 

외적인 것이 중요하지 않지만 그 외적인 것은 그 사람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기억해야 합니다.

 

사무엘상 230절에서 엘리 집안의 죄악을 지적하시면서 주님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원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하지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라고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당시는 정의가 없는 세대였습니다.

26절부터 29절까지 같이 읽겠습니다.

내 백성 가운데 악인이 있어서 새 사냥꾼이 매복함 같이 지키며 덫을 놓아 사람을 잡으며 새장에 새들이 가득함 같이 너희 집들에 속임이 가득하도다 그러므로 너희가 번창하고 거부가 되어 살지고 윤택하며 또 행위가 심히 악하여 자기 이익을 얻으려고 송사 곧 고아의 송사를 공정하게 하지 아니하며 빈민의 재판을 공정하게 판결하지 아니하니 내가 이 일들에 대하여 벌하지 아니하겠으며 내 마음이 이같은 나라에 보복하지 아니하겠느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 중에 악인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방 중에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악인이 있답니다. 그는 새 사냥꾼의 매복함 같이 덫을 놓아 사람을 잡는답니다. 그들은 가난한 자를 신한켤레 값으로 샀고 가난한 자의 겉옷과 맷돌 위짝을 전당잡았고 가난한 자의 머리를 티끌 먼지 속에 짓밟았습니다.

 

그들은 힘이 있으므로 자기 전에 악한 일을 꾀하고 아침이 되면 그 일을 실천하는 것으로 낙을 삼았습니다. 그래서 본문의 말씀에 새장에 새들이 가득함 같이 너희 집에 속임이 가득하다고 한 것입니다. 이익을 얻으려고 공정하지 못한 행동을 하고 누군가의 피를 흘리며 자신의 부를 축적하고 반드시 처참하게 무너질 바벨탑을 쌓으면서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다고 착각하는 자들이 많은 것입니다.

 

전에 섬겼던 목사님께서 재정부를 향해 했던 책망의 말씀이 기억납니다. 한번은 재정부에서 부교역자들의 사례비를 깜빡 잊고 지불하지 못했습니다. 이를 아신 담임목사님은 재정부를 불러놓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살인적 도둑놈들아라고 말입니다. 제때 사례비를 주지 않아 그날에 맞춰 모든 재정계획을 세웠던 가난한 부교역자들은 아무 말도 못하고 일주일을 기다려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는 아기 분유 값이 떨어진 이도 있고 게 중에는 쌀독에 쌀이 떨어진 이도 있을 수 있었기에 목사님을 재정부원들을 심하게 책망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에 삶에서도 살인적 도둑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월급을 미루어 지급하고 대금을 미루며 그것이 주는 이익을 추구하는 행위는 악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들에게 정의를 요구하십니다. 그래서 미가는 미가서 31절에서 내가 또 이르노니 야곱의 우두머리들과 이스라엘 족속의 통치자들아 들으라 정의를 아는 것이 너희의 본분이 아니냐라고 했고 아모스는 그의 책 524절에서는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왜 이 세대는 이렇게 악하게 된 것일까요?

그 이유를 30절과 31절에서 밝혀 주고 있습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이 땅에 무섭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고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백성들은 그것은 좋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먼저 선지자 거짓을 예언한다는 뜻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미래를 잘못 맞추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은 바른 말씀을 전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죄를 지적하고 책망하는 일에 게을렀기 때문입니다. 바르지 못한 것을 그냥 두었기에 방종했고 방종했기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 주의 백성들은 모두가 진실한 선지자가 되어야 하고 그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렸다는 뜻은 자신의 안전과 이익만을 위해 백성들을 다스렸다는 것입니다. 백성들이야 그 죄 가운데 죽든지 말든지 자신의 안전과 이익이 보장되는 쪽으로 백성들을 가르치고 다스린 것입니다.

 

그런데 심각한 것은 이것을 좋아했다는 것입니다. 바른 말씀을 전하면 욕을 한다고 하고 이 땅의 쾌락이나 성공의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면 참선지라고 좋아하는 이상한 세대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대를 가리켜 기괴하고 놀랍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기괴하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샤아루라라고 하는데 이는 소름 끼치도록 싫은 것, 공포라는 뜻입니다. 또한 놀랍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샴마라고 하는데 이 또한 황폐, 와삭 소름 끼치게 함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선지자는 거짓을 예언하고 제사장은 자기의 이익만을 추구하고 백성들은 이것을 좋아하는 것은 소름끼치도록 두려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귀와 하나님의 역사는 보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이것이 사라졌습니다.

2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어리석고 지각이 없으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이여 이를 들을지어다

 

여기서 지각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레브입니다. 마음이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없었기에 그분의 말씀을 듣는 귀가 없었고 그분의 역사는 보는 눈이 없었던 것입니다.

 

솔로몬이 왕이 되고 일천번제를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소원을 말하라고 했습니다. 이때 솔로몬이 구한 것이 레브 쇼메아입니다. 이를 직역하면 듣는 마음입니다. 솔로몬의 초기에는 이 마음이 살아 있어서 하나님의 소리와 그분의 역사를 보았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 마음이 무뎌졌고 결국 우상숭배와 죄로 인해 나라가 둘로 갈라지는 아픔을 겪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이 귀가 열리고 눈이 열려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한 사람이 되는 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여기서 구한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바카쉬입니다. 이는 알기 위해 묻거나 발견하기 위해 찾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 진리인지 항상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진리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았다면 그 진리에 근거하여 정의로운 삶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종종 부르는 복음성가 중에 주를 위한 이곳에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그 가사는 이렇습니다.

 

주를 위한 이곳에 예배하는 자들 중에 그가 찾는 이 없어 주님께서 슬퍼하시네

주님이 찾으시는 그 한 사람 그 예배자 내가 그 사람 되길 간절히 주께 예배하네

주 은혜로 이곳에 서있네 주 임재에 엎드려 절하네

그 어느 것도 난 필요없네 주님만 경배해

 

이제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그 한사람 그 사람이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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