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에 할례를 받으라

예레미야 610-15

 

계속된 이스라엘에 대한 책망은 결국 북쪽에서부터 끓는 가마가 쓰려져 그 내용물이 쏟아져 내리듯이 바벨론이 내려올 것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본장 1절을 통해 말하기를 베냐민 자손들아 예루살렘 가운데로부터 피난하라 드고아에서 나팔을 불고 벧학게렘에서 깃발을 들라 재앙과 큰 파멸이 북방에서 엿보아 옴이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주변에서 양 떼를 먹이며 예루살렘을 향하여서 목책을 만들어 공격하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루살렘이 공격을 당하고 철저하게 심판을 당하게 되는 이유는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그들의 넘치는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이를 7절에서도 묘사하기를 샘이 그 물을 솟구쳐냄 같이 그가 그 악을 드러내니 폭력과 탈취가 거기에서 들리며 질병과 살상이 내 앞에 계속하느니라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이 이제 하나님의 인내의 한계를 넘고 있었기에 심판이 문밖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들은 그렇게 패역해졌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을까요? 그 정도 환란이 있거나 선지자들의 외침을 들었다면 죄에서 돌이킬 만도 하다싶은데 그들은 왜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가지 않은 것일까요?

 

그것은 오늘 제목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바로 그들의 귀가 할례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10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누구에게 말하며 누구에게 경책하여 듣게 할꼬 보라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듣지 못하는도다 보라 여호와의 말씀을 그들이 자신들에게 욕으로 여기고 이를 즐겨 하지 아니하니

 

주님은 누구에게 말하며 누구에게 경책하여 듣게 할꼬라고 하심으로 당신의 말씀을 아무도 듣고 있지 않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같은 시대 같은 내용의 말씀을 전하게 하기 위해 불렀던 에스겔을 부르시면서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 가운데에 선지자가 있음을 알지니라”(2:5)라고 거듭해서 말했습니다. 그들은 듣기는커녕 말씀을 전하는 예레미야와 에스겔을 대항하고 박해했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누구에게 말하며 누구에게 경책하여 듣게 할꼬라고 탄식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세대는 시대를 거듭하며 계속해서 나타났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활동할 때도 그러했지만 예수님께서 활동하실 때도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세대를 향해 책망하시기를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11:17)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져도 전혀 반응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답답한 세대는 현대 우리가 신앙생활하고 있는 이때 다시 찾아왔습니다.

 

어제 교계신문에 기사가 실렸습니다. 현재 기독교인들 중에 윤회를 믿는 사람과 창조를 믿지 않는 사람이 각각 약 40%정도라고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통계를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고민하게 했던 내용이었습니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요? 먼저는 우리 목회자들의 잘못이 첫 번째입니다. 바른 복음과 하나님에 대해 바르게 가르치지 못하고 이 땅의 복을 강조하고 죽음 이후에 완전한 심판과 구원이 있다는 것을 바르게 가르치지 못하고 바르게 살지 못한 것이 첫 번째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본문 14절에서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말씀을 들으나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이 시대 교인들의 불신앙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당시에 도 있었는데 본문 13절에서 묘사하고 있습니다. 기록되기를 이는 그들이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욕을 부리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홍수처럼 쏟아지지만 너무나 적은 무리만이 그 말씀을 진지하게 듣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말씀에 대해, 진리에 대해 진지한 고민이 없습니다. 교회에 나와 평안을 찾고 교회에 나와 기도하여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 것으로 만족하고 더 이상의 고민이 없습니다. 오늘 먹고 배부르면 내일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는 짐승 같이 살아가기 때문에 진리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없는 것입니다.

 

개인소득이 3만 불이 넘으면 기독교가 쇠퇴한다는 통계가 말해주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많은 교인들의 신앙의 목적이 이 땅의 재물과 성공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땅의 풍요가 주어지면 더 이상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는 것은 말해주고 진리와 영원한 생명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듣지 않는 세대, 아니 적극적으로 듣지 않으려는 세대를 향해 주님의 요구가 있습니다. 그것은 귀에 할례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못 듣는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되는데 이를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욕으로 들려진다고 하고 있습니다. 미가선지자도 자신이 말씀을 전했을 때 그 말씀을 들은 당시 사람들의 반응에 대해서도 예레미야와 같은 말씀을 했습니다. 기록하기를 그들이 말하기를 너희는 예언하지 말라 이것은 예언할 것이 아니거늘 욕하는 말을 그치지 아니한다 하는도다”(2:6)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들에게 예언하지 말라”(2:12)라고 명령합니다. 그 이유야 설명이 없어도 알 수 있듯이 자신들에게 욕을 한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왜 욕으로 들었을까요? 그것은 자신들이 원하는 말씀을 전해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죄를 지적하고 바르게 살라고 말을 하는 선지자의 말은 자신들을 괴롭게 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욕으로 들려진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세례요한의 책망을 들었던 헤롯 안디바도 그와 같았습니다. 그는 동생 빌립의 아내인 헤로디아와 부적절한 결혼을 하였습니다. 이에 세례 요한은 책망을 했고 그 말은 더 이상 하지 못하게 하기위해 감옥에 넣고 끝내는 목을 잘라 죽이고 말았습니다. 시대를 막론하고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지적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들도 마찬가지고 이 말을 하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본성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죄를 지적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힘들어도 고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의 책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책망을 듣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는 믿음의 선진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알고 따르것입니다.

1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가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가지 않겠노라 하였으며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가라고 말씀합니다.

옛적길이란? 믿음의 선진들이 갔던 길입니다. 에녹이 걸었고 노아가 걸었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걸었던 길입니다. 다윗이 걸었던 길, 히스기야와 요시야가 걸었던 길을 가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강한 손과 편 팔로 애굽에서 건져내셨습니다. 그리고 시내산에서 그들과 언약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로 피를 뿌려 언약했습니다. 그 이후부터 이스라엘은 가야 할 길이 정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살아가는 삶인 것입니다.

 

선진들이 믿음의 길을 걸으며 겪었던 것들은 우리에게 교훈으로 주어졌습니다. 우리가 실패하며 배우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멀리는 성경에 기록된 인물들의 삶을 보고 배웁니다. 가까이는 한국교회 선진들의 삶을 보고 배우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교만하여져서 배우려하지 않습니다. 어른들의 신앙을 율법주의, 기복주의로 매도합니다. 우리 선진들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경외했기에 삶을 바치고 목숨을 드렸던 것들을 일부러 모르는 척 하는 것 같습니다.

 

율법주의와 기복주의가 순교를 가능하게 하던가요? 고 주기철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을 비롯한 수많은 순교자들과 세상을 밝힌 성도들의 삶을 율법주의 기복주의로 해석이 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믿음의 선진들은 순수하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에 근거하여 기꺼이 삶을 드렸던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본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길, 새로운 말씀, 새로운 진리는 없습니다. 며칠 전에 교회로 우편물이 하나 왔습니다. 손 글씨로 봉투를 썼기에 관심 있게 뜯어보았습니다. 그 내용은 이 시대에 주님께서 재림하셨는데 그를 믿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만희입니다.

 

또 어떤 분이 제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그 문자에게는 복음은 비밀이라 아무나 깨닫지 못한답니다. 이 땅의 대부분의 목사들은 깨닫지 못하고 신학교에서도 배울 수 없답니다. 자신을 비롯한 몇 몇 만이 깨닫기에 자신에게 와서 배워야 한답니다. 그런가요? 하나님께서 복음을 감추어 주셔서 아무나 깨닫지 못하게 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 시대 복음은 이미 열려있고 주께서 선택한 백성들은 이 말씀을 읽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복음 외에는 더 이상 새 길, 새 진리, 새로운 말씀은 없습니다. 이미 밝히 드러난 하나님의 말씀이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가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18절에서 바울이 말하기를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220절은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나아고 고린도전서 311절을 통해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성경을 통해 그리고 교회사를 통해 믿음의 선진들이 갔던 길, 그 옛길을 자세히 주의하여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길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욕심에 근하여 성경을 재해석하고 자신의 상황에 맞추어 왜곡하고 싶은 욕심도 내려놓고 오직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의 말씀을 보고 그 길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세대가 그 길을 찾지 않는 것의 원인은 자신이 잘 알고 있다는 교만 때문입니다. 그 안다는 것이 말씀을 많이 알거나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고 죽기까지 주님의 뜻을 따르려는 데 근거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들이 안다는 것은 철저히 이기적인 욕망에 근거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겸손하게 선진들의 순수했던 신앙의 길을 따르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17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또 너희 위에 파수꾼을 세웠으니 나팔 소리를 들으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듣지 않겠노라 하였도다

 

조금 전에는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가라고 했다면 이어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말씀은 너희 위에 파수꾼을 세웠으니 나팔 소리를 들으라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스라엘에 파수꾼을 세웠고 그들로 나팔을 불게 했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듣지 않겠다고 하며 거부했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파수꾼은 선지자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파수꾼이었습니다. 파수꾼의 임무는 무엇입니까? 파수꾼은 대적이 오는 것을 보면 자신의 백성들에게 알려 그들로 잠에서 깨어나 대적들과 대항하여 서게 할 준비를 하게 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깨웠습니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재앙을 대항하여 서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선지자들의 소리를 듣지 않았습니다. 역사를 통해 보면 그들은 그 선지자들을 대항하고 심지어는 죽이는 것으로 마무리하였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선지자 이사야도 므낫세가 통나무에 넣고 톱으로 켜 죽였고 예레미야의 끝은 기록이 없으나 그의 생애 전체가 살해 위협을 당하는 생이었습니다.

 

그들은 세례 요한도 죽였고 예수님도 십자가에 달았습니다. 그 뒤를 이은 사도들은 요한을 제외하고 모두 순교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파수꾼으로 세우고 나팔을 불게 했던 선지자들의 소리를 세대를 초월하여 듣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이 땅에 파수꾼으로 세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넓게는 성도들 모두를 파수꾼으로 세웠고 좁게는 목회자들을 세웠습니다. 이 시대 목회자를 비롯한 모든 성도들은 파수꾼으로 온전한 나팔수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저도 때로는 기록된 말씀이 책망이라면 책망이 아닌 좋은 말로 위로하고 격려해 주는 것으로 마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성경강좌를 할 때도 그렇습니다. 괜히 말해서 참석한 사람들과 불편한 관계가 되고 싶지 않아 주께서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에 대해 말하지 않겠다고 저항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주님께서 제게 주시는 감동은 만일 나팔이 분명하지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투를 준비하리요”(고전14:8)라는 말씀과 갈라디아서 110절에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라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먼저 파수꾼이 되어 온전한 나팔 소리를 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나팔 부는 자의 사명을 감당함과 동시에 그 소리를 듣는 자가 되어야합니다. 이 귀가 닫히는 것처럼 소름끼치는 일은 없습니다. 왜 이것이 소름끼치는 상황일까요? 만약 어떤 사람이 철길을 걷고 있는데 그의 뒤에서 기차가 달려온다고 가정합시다. 그 상황을 보고 있는 이들이 소리를 지르는데 정작 당사자는 다른 소리에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귀에 헤드폰을 끼고 락음악을 크게 듣고 있었습니다. 어떤가요? 그 상황을 가정한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치고 심장박동이 빨라지지 않습니까?

 

이 시대 하나님의 소리를 듣지 못한 이들의 삶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강단에서 아무리 외쳐도 듣지 못하는 세대, 강단에서 죄를 지적하고 그 길에서 돌이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외치는 소리를 욕으로 듣고 귀담아 듣지 않는 세대, 그 세대는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생애 전반기와 후반기가 이것의 차이였습니다. 그의 초기는 듣는 마음레브 쇼메아가 살아있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지나면서 그의 이 듣는 귀는 점점 무뎌졌고 결국 하나님과 우상을 겸하여 섬기는 나라가 되고 자신의 아들 때 나라가 찢어지는 아픔을 겪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 나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좀 시끄럽고, 시도 때도 없이 불려 져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올해 하나님은 우리 하림교회를 향한 특별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고 여겨집니다. 하림교회를 향한 특별한 계획이란 그 구성원인 성도들을 향한 특별한 계획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끊어내고 우리와 더 깊은 관계를 맺고 싶어 합니다. 그러기에 힘든 시간이 될 수도 있지만 예레미야를 보게 하셨고 우리의 죄를 객관적인 눈으로 보게 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위로가 아닌 책망의 나팔, 복이 아닌 심판의 나팔 소리를 듣게 하셨습니다.

 

제가 전에 말씀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겠다고 하실 때는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실 때의 본 의도는 돌아오라는 뜻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제목이 귀의 할례를 받으라입니다.

귀의 할례, 즉 귀를 덮고 있는 가죽을 벗겨 버리는 것입니다. 뒤꿈치에 두껍게 덮인 굳은살을 벗겨 내지 않으면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듯이 우리 귀에 덮인 두꺼운 표피를 벗겨 내야 합니다. 무엇으로 덮여있을까요? 그것은 세속적인 욕망입니다. 이 땅에서 잘되고픈 우리의 세속적인 욕구입니다. 그것들을 벗겨내는 작업을 하는 것이 귀의 할례를 행하는 것입니다.

 

올해 우리는 귀의 할례를 받을 것입니다. 비록 그 말씀 듣는 것이 힘들고 어려워도 반드시 해야 한다면 제대로 해야 합니다. 어설프게 한다면 안하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 올해 우리의 귀에 할례를 행합시다. 그래서 하나님의 소리가 제대로 들려 참된 복, 하늘의 복이 넘치는 우리, 하나님과 온전한 교통이 있어 이왕 천국길 가는 것 바르게 가는 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 15
    Mar 2015
    12:42

    예레미야 10장 23-24절 (나를 징계 하소서)

    By하림 Views2352 file
    Read More
  2. 08
    Mar 2015
    12:36

    예레미야 9장 23-24절 (성도의 자랑)

    By하림 Views3471 file
    Read More
  3. 01
    Mar 2015
    13:52

    예레미야 8장 1-7절 (새만도 못해서야)

    By하림 Views2056 file
    Read More
  4. 22
    Feb 2015
    13:07

    예레미야 7장 1-11절 (성전을 성전 되게)

    By하림 Views4008 file
    Read More
  5. 15
    Feb 2015
    13:57

    2015.02.15 예레미야 6장 10-15절 (귀에 할례를 받으라) 하림교회 황규관 목사

    By하림 Views2448 file
    Read More
  6. 08
    Feb 2015
    23:46

    요한계시록 12장 1-8절 하나님의 계획 - 김상문목사

    By하림 Views650 file
    Read More
  7. 02
    Feb 2015
    00:11

    예레미야 5장 30-31절 (기괴하고 놀라운 세대)

    By하림 Views2396 file
    Read More
  8. 25
    Jan 2015
    12:50

    2015.1.25 예레미야 4장 1-4절 (돌아오려거든)

    By하림 Views3580 file
    Read More
Board Pagination Prev 1 ... 50 51 52 53 54 55 56 57 58 59 ... 68 Next
/ 68

Address: 서울특별시 강남구 학동로77길 49 하림교회 (청담동 10번지)Tel: 02-456-3927Email: haezra@hanmail.net
Copyright 2000 스토리바이블 ALL RIGHTS RESERVED. Designed by Nature wi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