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 1장 1~2절 (나그네 인생) 하림교회 황규관 목사
나그네 인생
베드로전서 1장 1-2절
오늘부터 베드로의 서신을 보려고 합니다. 베드로가 쓴 서신을 통해 이 시대 우리들에게 주시는 말씀을 생각해 보길 원합니다.
가수 최희준씨가 부른 하숙생이란 노래가 있습니다. 그 가사는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인생은 나그네길 구름이 흘러가듯 정처 없이 흘러서 간다"라는 내용입니다. 이 노래의 가사의 일부가 성경적인 것 같습니다. 나그네 인생을 살아가는데 이 땅의 것에 정두고 미련두면 갈길 제대로 못 가기 때문입니다.
최희준씨의 노래 가사가 이와 같았다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말하는 “나그네”는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베드로가 이 글을 쓸 때 교회가 처한 환경은 그리 녹록치 않았습니다. 누군가는 이미 네로의 박해가 시작되었다는 말도 하고 누군가는 아직은 본격적인 박해가 시작되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을 자세히 보면 이글을 수신하고 있는 성도들은 고난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바른 신앙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이 글을 쓴 이는 당연히 베드로입니다. 책 제목도 베드로전서이고 우리가 읽은 1절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라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열두 사도들 중에 가장 두드러진 사람입니다. 제자로 부름을 받을 때도 그렇고 예수님께서 부활 후에도 부른 이가 베드로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따를 때도 자주 드러났습니다. 그는 갈릴리 바다에서 어부로 살다가 동생 안드레가 먼저 부름을 받고 안드레의 소개로 주님을 만났던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그의 이름이 원래 갈대라는 뜻의 시몬이었으나 주님은 반석이란 뜻의 베드로로 바꿔주신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는 초대교회 지도자역할을 하다가 60년대 초에 로마로 가서 복음을 전했다고 여겨집니다. 그랬던 그가 지금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쿼바디스라는 영화가 베드로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는데 바로 네로의 박해 때에 베드로의 순교 이야기입니다. 그는 네로의 박해가 시작되었는지 아니면 그 전이었다고 하더라도 이미 곳곳에서 박해가 있었기에 그 속에서 신앙 생활하는 성도들에게 글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이 글을 쓰면서 베드로는 자신을 소개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자신은 이 글을 사도의 권위로 쓰고 있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바울도 편지를 쓸 때 자신을 “사도”라고 소개하면서 썼습니다.
그렇다면 사도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헬라어로 “아포스톨로스”라는 말입니다. 이는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뜻으로 일반적으로는 “사절, 특사, 대사”라고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자신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대사의 자격으로 사역하며 편지를 쓰고 있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제자들 중에 열두 명을 뽑아 사도로 삼으셨고 그 후에 바울을 다메섹 도상에서 환상 중에 부르셔서 이방인에게 보내는 사도로 삼으셨습니다. 후에 바나바를 사도로 칭하기도 하기도 하였으나(행13:43) 일반적으로 사도라고 함은 열두 명의 제자들을 사도라고 칭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자신이 사도라고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이는 자신이 선지자라고 하는 이도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이들은 모두 사기꾼들입니다. 성도들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고 흔들려는 못된 사기꾼이고 거짓 선생일 뿐입니다.
지금은 사도도 선지자도 따로 있지 않습니다. 오직 사도성과 선지자성이 있을 뿐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왕, 제사장, 선지자 직을 가지고 계시고 그의 영인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 이제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모든 주의 백성들은 그 직분을 감당하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들은 사도의 역할 즉, 주로부터 세상으로 보내심을 받은 직분을 감당해야 하고, 선지자 즉,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역할을 감당해야 하며, 왕 즉, 주님과 함께 말씀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직분을 감당해야 하고, 제사장 즉, 주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기도로 나아가는 일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말하면 어느 특정한 사람만이 사도이고 선지자인 것이 아니라 우리 모든 믿는 사람들이 사도이고 선지자이며 제사장이고 왕으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소개하듯이 우리도 이시대의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세상으로 나아가야 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세상으로 나갈 때 우리의 손에는 그리스도의 사신으로서 그리스도의 편지인 복음을 들고 나아야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으로 나가야 하는 것은 우리를 보내신 예수님께서 이미 행하셨던 일입니다. 그분은 빌립보서 2장의 말씀처럼 하늘보좌 버리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죄인의 몸으로 이 땅에 보내심을 받아 죽기까지 충성하셨던 분이십니다. 히브리서는 영문 밖에서 죽임을 당했다(히12)고 했고 계시록에서는 세상 또는 소돔까지 보내심을 받아 죽으셨다(계11)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를 보내신 예수님의 명을 따라 주님께서 가셨던 그 길을 기꺼이 가야 할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편지의 수신자에 대해서 언급했습니다. 우리가 읽은 대로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라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언급된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는 소아시아에 있는 지역들입니다. 사실 이 지역들은 바울이 복음을 전해 교회를 세웠던 곳입니다. 베드로가 그곳에 갔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이 지역들은 바울의 선교지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베드로는 그곳에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로마에도 박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소아시아에 있는 성도들에게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미 교회가 자리를 잡으면서 유대인들과 이방 종교인들에게 핍박을 받았고 뿐만 아니라 로마에 네로의 박해가 있었을 때는 박해를 피해 소아시아로 피했고 그 박해의 손길이 자신들에게 미칠지도 모르기에 두려움에 떨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도바울은 소아시아에서 잡혀 로마로 압송되어 사형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이 로마에 잡혀 죽음을 기다리면서 소아시아의 에베소에 있었던 디모데에게 편지를 쓰면서 아시아에서 핍박을 피해 도망갔던 사람들을 언급했습니다. 그중에서 “부겔로와 허모게네”(딤후1:15)가 있다고 하고 있습니다. 또한 디모데에게는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1:8)라고 하였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베드로도 소아시아에 있는 성도들에게 핍박 속에서도 믿음을 지켜야 할 것을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소아시아에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성도들을 가리켜 “나그네”라고 정의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나그네”가 어떤 자인지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2절에서 “나그네”를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세 단계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먼저는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된 자”라는 것입니다. 이를 에베소서 1장 3절부터 5절에서는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그네인 성도는 창세전에 택함을 입은 자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요한계시록 13장 8절과 17장 8절에서는 “창세전에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한 자”를 말하는데 오늘 본문과는 반대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창세전에 성도를 택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저와 여러분을 창세전부터 알고 계셨고 택하셔서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어서 나그네에 대한 정의 두 번째는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을 입어 순종하는 자”입니다. 이 부분을 에베소서 1장 13절과 14절에서는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성도의 구원에 대해 말할 때 성부의 예정, 성자의 희생, 성령의 보증의 순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베드로는 순서를 바꿔 말하고 있습니다. 성부의 예정,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 성자의 희생으로 순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을 하는 이유는 성도를 구원하는 일에 있어서 이 모든 일을 성도에게 적용시키는 일을 성령이 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사역을 통해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가 성도에게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믿게 되는 전 과정이 성령의 사역인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을 입어 순종하는 자”를 나그네의 두 번째 정의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어서 나그네에 대한 세 번째 정의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입니다. 에베소서 1장 7절은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피 뿌림은 에베소서의 말처럼 “속량, 곧 죄 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피 뿌림이란 구약의 제사제도에 있었던 것을 상징으로 가지고 온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어린양을 잡아먹고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게 하심으로 장자가 죽음을 면하였고, 정결례를 지낼 때 부정했던 사람의 부정을 씻기 위해 새의 피를 흐르는 물에 받아 백향목과 홍색실과 우슬초와 또 다른 새와 함께 피를 찍어 주정했던 사람에게 뿌려 죄를 가렸던 것을 말합니다. 또한 민족의 죄를 씻는 대속죄일에 잡았던 염소의 피와 그 외에 속죄제의 제물의 피를 제단과 속죄소에 뿌려 죄를 속하였던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란 말은 하나님께서 성도를 택하신 가장 중요한 이유를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놀라운 은혜를 입은 것이 성도 즉, 나그네인 것입니다.
이렇게 놀라운 은혜를 입은 성도를 “나그네”라고 정의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나그네가 어떤 존재인지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나그네라는 말을 본서에서 세 번이나 사용하고 있고 나그네와 같은 의미로 “거류민”이라는 말을 한 번 사용하고 있습니다.
왜 베드로는 성도를 나그네라고 정의한 것일까요? 나그네가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자신이 현재 있는 곳이 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그네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으면 “자기 고장을 떠나 다른 곳에 임시로 머무르고 있거나 여행 중에 있는 사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런 뜻을 가진 나그네란 단어를 성도에게 붙인 이유는 사전적 의미답게 성도가 현재 살고 있는 이 땅이 자신의 집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단지 여행 중인 것입니다. 서두에서 가요의 가사처럼 “정도 미련도 두지 말아야 할 자”인 것입니다.
나그네는 언젠가 집으로 가듯이 성도는 언젠가 자신의 집인 하나님의 품으로 가야 할 자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서 3장 14절에서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라고 했고 20절과 21절에서는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디모데후서 4장 6절부터 8절에서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라고 하며 생을 마감했던 것입니다.
나그네는 이 세상에 살지만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성도는 하늘에 있는 본향을 향해 가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나그네인 성도들은 이 땅에 소망을 두지 않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시편 146편 5절에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나그네 즉, 성도는 갈 곳과 목표가 분명한 사람인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영화가 절대목적이 아닌 사람인 것입니다. 그냥 과정일 뿐이기에 바울의 말처럼 이 땅의 것들을 “분토, 배설물”과 같이 여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나그네는 불편을 자원한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요즘 유행하는 것인 캠핑입니다. 유행이 다 그렇듯이 또 시들해지겠지만 지금은 그것을 즐기는 사람들이 아주 많습니다. 여름에 캠핑하는 것 뿐 아니라 겨울 캠핑도 많이 즐기고 백팩킹이라고 해서 등에 질만큼만 지고 야생 그대로는 즐기는 사람들도 생겼습니다. 또한 목숨을 걸고 히말라야를 오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즐기지 않는 사람들은 그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저도 그런 사람 중에 하나이긴 하지만 그들은 기꺼이 그 불편을 즐깁니다. 그럴 수 있는 것은 며칠의 불편이 끝나면 안락한 집과 따뜻한 욕조가 기다리고 있기에 기꺼이 불편을 즐기는 것입니다.
나그네인 성도도 그렇습니다.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사는 것은 불편이 전재된 삶인 것입니다. 때로는 그 불편이 너무 심해 고난이 될 때도 있고 목숨을 내놓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나그네인 성도가 그럴 수 있는 것은 영원한 집인 천국이 준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5장의 나사로처럼 아브라함의 품이 준비되어 있기 때문이고 바울의 말처럼 면류관이 준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딤후4:7)
베드로가 성도를 나그네라고 정의하면서 수식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흩어진”이란 말입니다. 성도를 “흩어진 나그네”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함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신의 안락한 삶은 내려놓고 순회전도자가 된 사람과 그 복음을 따라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렇게 흩어질 것은 이미 예견 된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승천하시면서 회복된 이스라엘에서 평화롭게 살고 싶었던 제자들이 이스라엘의 회복의 때를 물었을 때 주님은 그런 것은 제자들이 신경 쓸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면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한 것을 기다리고 하셨습니다.(행1) 그러면서 말씀하시기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이라”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은 스데반의 순교로 성취가 되었는데 사도행전 8장 1절을 보면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라고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도들이 흩어졌고 그 흩어짐은 성도들의 삶이 된 것입니다. 복음성가 가사에도 “오늘은 이곳 내일은 저곳 주 복음 전하리”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이 성도들의 삶이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성도들이 전 세계를 돌아다니라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현장이 우리가 흩어져 살게 된 현장이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보내신 장소인 것입니다. 아포스톨로스, 보내심을 받은 자의 삶의 현장은 복음이 증거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나그네로 부르셨습니다. 나그네로 부른 첫 번째 목적은 2절 말씀처럼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구원받은 나그네들에게는 필연적으로 따르는 목적이 있는데 그것은 증거자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그네인 성도에게 복음과 함께 고난이 따르고, 천국과 함께 핍박을 겸하여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맙시다.
또한 이러한 나그네들을 향한 베드로의 기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은혜와 평강이 더욱 많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은 이미 이것들이 모든 성도 즉, 나그네들에게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가 이렇게 바란 것은 이것들이 끊임없이 주어지지 않으면 나그네의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평강만이 이 삶을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나그네이신 성도 여러분, 이 길을 가는 저와 여러분에도 은혜와 평강이 더욱 많게 되어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완주하고 결과적으로 의의 면류관을 받아 주님께 다시 드리는 자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