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요한복음 1321-38

 

지난주에 이어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오늘 본문의 이야기를 다시 말씀 드리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마가의 다락방에서 최후의 만찬을 하시면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 신 후에 있었던 제자들과의 대화입니다. 먼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들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라고 말씀을 시작하셨습니다. 이에 제자들은 그가 누구인지 궁금해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베드로가 머리짓을 하며 요한에게 말씀 하신 자가 누구인지물어보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요한은 예수님께 누구인지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라고 하시며 떡 조각을 적셔서 가룟 유다에게 주었습니다. 그 후에 가룟 유다는 예수를 팔기위해 밖으로 나갔고 제자들은 그가 돈을 맡은 자라 예수님께서 무엇을 사오라고 심부름을 시킨 줄 알았습니다. 그가 나간 후에 예수님은 당신이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지금을 올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주셨는데 그것은 서로 사랑하라 그래야 사람들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묻기를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지금은 너희가 나를 따라 올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베드로의 열정이 그 말에 그냥 있게 못했습니다. 그는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주님을 그에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라고 하며 오늘 본문이 마쳐집니다. 이 본문 말씀을 통해 주께서 주시는 은혜를 함께 받도록 하겠습니다.

 

이 이야기들 중 21절부터 32절까지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의 배신을 말씀하시면서 당신이 영광을 이미 받았다고 말씀하셨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이 이미 진행되고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후에 그 일로 말미암아 당황하고 두려워 할 제자들을 생각하신 주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3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작은 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일찍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예수님은 이 죽으심 앞에서도 오직 제자들만을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33절을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을 가리켜 작은 자들이라고 하고 계신 것입니다. 제자들을 작은 자들이라고 칭하신 것은 그들의 신앙이 아직 성숙하지 못한 상태였고 잠시 후에 벌어질 예수님의 잡히심으로 인해 그들이 두려워하게 되고 심지어는 주님을 부인하게 될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이 아직 환란을 겪어 낼 만큼의 믿음이 없었음을 아셨습니다. 아니 그들에게는 그럴만한 능력이 단 1%도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제자들을 가리켜 작은 자들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단 1%의 능력도 없었다고 말씀 드린 이유는 그들에게 아직 성령이 임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성령이 없는 사람은 주를 위해 주께서 앞서 가신 길을 따라 갈 수 없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힘으로 무언인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자신감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얼마 가지 못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가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들인 것입니다. 마가복음의 저자 마가는 자신이 쓴 복음서에 물동이를 가지고 가는 자와 예수님께서 잡히신 곳에서 홑이불을 벗어 던지고 간 자로 자신을 등장시켰습니다.

 

하지만 그가 본격적으로 주님의 일을 위해 나선 장면은 사도행전 13장입니다. 그는 외삼촌 바나바를 따라 바울과 함께 선교여행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지금의 터키남부인 앗달리아 항에 도착했고 거기서 조금 육지 쪽을 들어가 버가라는 곳에 도착했을 때 그는 자신 앞을 가로막고 서 있는 해발 4,000m 정도 높이의 타우르스 산맥 앞에서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의 의지는 세계 복음화였지만 그의 능력은 눈 덮인 타우르스 산맥 앞에서 돌아서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은 선을 행하되 온전히 행하지 못합니다. 거룩한 삶을 추구하되 오래가지 못합니다. 우리의 말은 그럴 듯 하지만 행실을 말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의지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의 의지는 이미 죽은 의지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성도의 행실을 온전케 하는 것입니다.

 

이미 지난주에 보았지만 가룟 유다가 처음 예수님을 따를 때의 마음은 예수님을 팔아버리는 것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그가 그렇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의지는 거기까지였습니다. 그의 의지는 자신의 이성이 용납하는 선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이상은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도 마가에 대해 말씀 드렸지만 마가는 그 후에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며 베드로의 통역관으로 사역을 했고 후에 이집트에서 순교하는 자로 서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주의 성령이 임하고 그 은혜가 충만하여 져야 가능한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을 작은 자들이라고 한 이유인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다락방을 나서서 감람산에 도착하여 예수님께서 군사들에게 잡히는 순간 바로 자신들이 작은 자들인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제자들을 작은 자들이라고 말씀하신 주님은 제자들과 잠시 동안만 있을 것이고 내가 떠나고 나면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도 없고 올 수도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예수님께서 가신 곳을 알 수도 없고 갈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 길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가신 것이고 아버지께 가기위해서는 십자가를 져야 했듯이 하나님과 그의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께 나아가려는 자들도 반드시 십자가를 통해서만 갈 수 있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려는 자들은 반드시 십자가를 통과해야 합니다. 이 말은 일차적 의미는 자신이 십자가를 지라는 뜻이 아닙니다. 고행을 하고 공로를 쌓으며 도를 닦고 덕을 행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통과해야 한다는 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피의 뿌림을 입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후에 주의 은혜를 입어 쉽고 가벼워진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대속죄일에 백성들을 속하는 염소를 피를 들고 지성소 안에 언약궤 안에 피를 뿌릴 뿐 아니라 제사장들도 자신들의 허물을 위해 송아지를 잡아 그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 피를 뿌렸듯이, 또한 문둥병이나 부정으로부터 정결해 지기 위해 자신의 죄를 위해 죽은 새의 피를 백향목, 홍색실, 우슬초로 찍어 일곱 번 뿌려 속했던 것과 같은 의미인 것입니다. 구약의 백성들이 짐승의 피를 통과해야만 하나님께 나아갔듯이 신약의 성도들은 그리스께서 십자가에서 흘린 피, 그 대속의 피를 통해서만이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과 저는 작은 자일 뿐입니다. 오직 주님의 강력한 은혜를 입어 그분께서 우리를 온전히 주장하실 때만이 우리는 가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입으로만 뻥뻥 거리고 겉으로만 주를 위하는 척 하는 뻥쟁이, 위선자일 뿐 인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주님은 계명을 하나 말씀하셨습니다.

34절과 3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지금은 따라 올 수 없다고 하시며 한 가지를 남겨 주셨습니다. 죽음 앞에 서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유산을 남기신 것이 아니라 계명을 남겨 주셨습니다. 그것은 새 계명입니다. 그러면서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왜 주님은 서로 사랑하는 것을 새 계명이라고 하셨을까요? 새 계명이 있으면 옛 계명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 옛 계명에서 사랑은 무엇일까요? 구약에서도 주님은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구약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사랑하라고 할 때는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그 한정된 사랑의 관계는 일명 선민 안에서의 사랑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 선한 일을 행하는 사람 반대로 하면 악을 행한 사람과 이방인은 사랑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사랑의 한계는 사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방인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요나서의 결론에서 니느웨 성안에 갈 바를 알지 못하는 사람 12만 명을 내가 사랑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냐고 하셨습니다.

 

새 계명과 반대되는 옛 계명은 하나님께서 한정한 것이 아니라 구약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율법을 잘못 해석하고 확대 적용하면서 생긴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계명에 반하여 새 계명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 상대가 어떠한 사람이든지 상관없습니다. 그가 이스라엘 안에 있는 사람이건 이방인이건 상관없이 주의 백성이 해야 할 일은 사랑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누가복음 627절부터 35절에서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며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만을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꾸어 주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그만큼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꾸어 주느니라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명하신 새 계명인 사랑은 성도의 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이미 읽은 35절에서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통해 사람들에게 당신을 드러내시길 원하십니다. 우리의 어떤 모습입니까? 그것은 서로 사랑하는 모습입니다. 큰교회도 아닙니다. 높은 권력도, 돈도 아닙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숫자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통하지 않고서는 그리스도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만약 그렇게 해서 그리스도가 드러나실 수 있다면 전능하신 하나님은 기꺼이 그렇게 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의 사랑하는 삶을 통해서 드러나시길 원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통해 세상은 그리스도를 보는 것입니다.

 

지금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통해 사랑을 보고 있습니까? 지금 우리의 이웃들이 성도들의 사랑의 모습을 보고 감동받고 있습니까? 주님께서 허락하신 한국교회의 풍성함은 사랑으로 드러나지 않고 썩어 냄새를 풍기는 음식쓰레기 더미 같은 모습입니다.

 

왜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주님께서 드러나신다고 하신 것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은 사랑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위해 당신의 생명을 아낌없이 던져 주신 그 사랑이 주님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살과 피를 죽었던 우리에게 이식시켜주셔서 살게 해 주신 그 사랑입니다. 한 알의 밀로 죽어주셔서 많은 생명의 열매인 우리를 맺어주신 그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곧 주님이시기에 사랑의 행동이 사랑이신 주님을 품은 사람들에게서 자연스럽게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을 쓴 요한은 요한일서 316절에서 이 주님의 사랑의 은혜에 합당하게 사는 것에 대해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316절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하신 주님은 요한일서 316절에서 그 은혜로 인해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고 말한 것입니다.

 

여기서 마땅하다는 말은 헬라어로 옵헤일로입니다. 이 단어는 빚을 졌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에 은혜를 입었기에 그 사랑을 형제들에게 갚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서로 사랑합시다. 우리가 서로 다르지만 상대방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보고 나아가 사랑받은 자격이 없는 우리를 위해 기꺼이 생명 버리신 주님의 사랑으로 인하여 이웃을 사랑합시다. 그런 우리가 되어 세상으로 하여금 우리를 통해 그리스도를 보게 하는 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사랑에 대해 말씀하고 계실 때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새 계명에 대한 생각보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과 자신들을 따라갈 수 없다고 하신 말씀에 대해 계속된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베드로는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물었습니다.

 

3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베드로가 질문한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는 물음은 아주 유명한 말입니다. 폴란드 소설가 센키비치는 이 구절의 벌게이트역의 도미네 쿠오 바디스라는 말에 착안하고 고대 전승에 근거하여 쿠오바디스라는 소설을 집필하였고 1986년에 로빈 르로이라는 감독이 영화로 만들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사역하시는 동안 어디든지 따라다녔습니다. 야고보와 안드레와 함께 어디든 함께 했습니다. 그러기에 베드로는 지금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베드로의 그 질문에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베드로를 비롯한 모든 제자들은 그 길을 따라 갈 수 없었습니다. 베드로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야고보와 안드레의 어머니 살로메는 예수님과 마지막으로 예루살렘 갈 때 말하기를 자신의 두 아들을 예수님께서 세우실 나라의 좌편 우편에 앉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20:22)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주님은 본문에서 베드로에게도 마태복음에서 야고보와 안드레에게도 따라 올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베드로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후에는 알 수 있었는데 요한복음 21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부활 하신 후에 갈릴리로 먼저 가서 고기 잡던 베드로를 부르시고 그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고 대답을 들으신 후에 베드로의 죽음에 대해 하신 말씀에 억지로 동의하는 모습이 있습니다.

 

주님은 2118절에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이를 19절에서 해석 해 주기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라고 해주셨습니다.

 

지금은 따라 올 수 없다는 말을 들은 베드로는 지키지 못한 호기를 부리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3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베드로의 이러한 고백은 베드로 답습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고백한 것이 따른 뜻이 있었기 보다는 정말로 자신의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시는 길을 간다면 자신도 기꺼이 그 길을 가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에 대해 명확하게는 몰랐으나 예수님의 후반 사역을 조금만 생각해 보면 주님은 계속해서 자신이 죽을 것임을 암시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베드로는 주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겠다고 한 것입니다.

 

또한 베드로의 인간적인 모습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루살렘으로 오면서 자신들의 관심사였던 예수님의 좌우편에 대해 계속해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던 중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을 암시하자 다른 제자들과 비교하여 우위를 점하려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1429절에서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나이다고 하면서 다른 제자들과 비교하여 자신은 절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이어지는 31절에서도베드로가 힘있게 말하여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고 했고 이에 질세라 다른 제자들도 베드로처럼 말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목숨까지 내 놓겠다는 베드로를 주님은 칭찬하시기는커녕 베드로의 얼굴을 화끈 거리게 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338절에서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꿈쩍하지 않을 것 같은 베드로의 호기에 대해 주님은 정말 버릴 수 있느냐고 되물으셨습니다. 그런 후에 제자들의 주님을 위해 목숨을 버리겠다는 말이 얼마나 공허한 소리인지에 대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하였으나 주님은 네가 나를 부인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아셨습니다. 지금의 호기는 아무것도 못 할 것을 말입니다. 하지만 성령이 임하고 나면 주님을 위해 전 생애를 바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네로의 박해 때에 스스로 로마로 들어갔고 잡혀 십자가에 달릴 때 주님처럼 십자가에 박힐 수 없다며 거꾸로 박혀 죽었습니다. 그의 호기는 아무 능력도 없었지만 성령의 능력은 그를 자신이 원치 않는 띠를 기꺼이 띠고 죽을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해 대답해 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에 합당한 삶을 사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히브리서 1312절과 13절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라고 말입니다.

 

이제 주님께서 가신 그 길을 따라 갑시다. 어디로 가시냐고 묻고 끝나는 자가 아니라 기꺼이 주님께서 가신 그 십자가의 길을 따라 가며 주님께서 세상에 대하여 죽은 것처럼 함께 죽고, 복종하시되 죽기까지 복종하신 그 복종의 삶을 살고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싸워 주의 거룩함을 드러내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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