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큰일도 하리라
요한복음 14장 12-31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을 하시며 자신이 팔릴 것과 제자들에게 배신을 당할 것을 말씀하심으로 두려워하고 있던 제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처소를 예비하러 가신다고 하셨고 다시 오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가시는 곳이 어딘지 알지 못함으로 알려달라고 하는 도마의 말에 주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고 빌립의 아버지를 보여 달라는 말씀에는 당신을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또 제자들에게 말씀하기를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고 하셨습니다. 더불어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나아가 주님은 성령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시겠다고 하셨고 그 보혜사가 어떤 일을 하실 지도 알려 주셨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1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주님은 제자들에게 11절에서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을 수 없다면 내가 행하는 그 일로 나를 믿으라고 하셨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제자들에게 너희도 큰일을 행할 텐데 나보다 더 큰일도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많은 오해를 낳았습니다. 그 오해는 성도들이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보다 더 많은 기적들을 행할 것이라고 해석되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은사주의자들이 좋아하는 구절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이성을 모두 잃게 만들고 자신들에게 철저히 복종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가 있고 그 은사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보다 더 큰일도 하는 은사라고 거짓을 행하고 사람들을 미혹하여 거짓 것을 믿게 하였습니다. 인간적으로는 그들이 그런 능력이 있어서 죽은 자도 살려내고 산도 바다로 옮기며 없던 돈도 만들어 내었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전혀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의도는 은사적인 차원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일에 대하여 하신 말씀입니다. 당신은 지금 죽으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죽음 앞에서 자신이 가르친 제자들은 자신을 팔거나 부인하고 도망갈 것을 아셨습니다. 그런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보다 더 큰일을 하겠다고 하신 것은 성령이 임한 후에 제자들을 통해 전해질 복음이 폭발적인 역사를 일으킬 것을 미리 예고하신 것입니다.
당신은 3년 반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지만 모두 떠났다면 이후에 제자들이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사역을 하면 환란을 피하여 도망하는 자들이 아니라 기꺼이 자신의 생명을 내어 놓는 자들이 많아질 것을 미리 말씀하심인 것입니다.
이 말씀의 성취는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50일이 되었을 때 나타났습니다. 바로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입니다.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하자 제자들은 방언을 하기 시작했고 그것을 본 자들이 새 술에 취했다고 하자 베드로는 나가서 새 술에 취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며 말씀을 전하자 그 말씀을 들은 자들이 마음에 찔려 예수님을 믿고 돌아왔는데 그 날 돌아온 자들의 수가 3,000이나 되었고 그 후에 미문가에 앉아있던 앉은뱅이를 고치는 사건을 통해서는 5,000명이 예수님을 믿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수님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도 이 약속은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가 나가 복음을 전하지 않을 뿐 전하면 반드시 영혼들이 회개하고 돌아와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베드로의 신앙고백 이후에 약속하시기를 “네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주님보다 더 큰 일을 이루기 위하여 필요한 것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은혜와 도우심입니다. 그리고 이 도우심은 기도라는 방법을 통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13절과 14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13절과 1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주님은 당신을 믿는 자들은 자신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후에 무엇이든지 당신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행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도 앞에서 보았던 말씀처럼 오해하는 구절입니다. 앞 뒤 문맥 다 끊어놓고 본 절만 읽으면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구하는 대로 주시는 분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앞 뒤 문맥을 살피며 읽어보면 무엇이든지는 한정된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보다 더 큰 일을 이루는 일에 있어서 무엇이든지인 것입니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구하면 얻는다는 뜻이 아닌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 구하는 것의 제한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응답으로 주어지는 것에는 제한이 있는 것입니다. 그 제한은 자신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시는 것입니다. 하여간 본문에서 무엇이든지는 한정된 의미를 갖습니다. 여기서 무엇이든지는 더 큰 일 즉, 복음전파에 필요한 모든 것을 구하면 행하겠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 말씀을 지금의 성도들처럼 오해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곧 육신의 생명의 주도권을 주님께 내어드리고 오직 복음전파를 통해 영혼들을 건지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디모데후서에서 사형언도를 받고 죽을 날을 기다리던 바울은 자신도 잡혀 죽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떨고 있던 디모데에게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딤후2:2)라고 했고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4:2)라고 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요한계시록에서도 핍박 속에 있던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주님은 나가 복음을 전하라고 하고 있습니다(계11장). 그러면서 그 복음을 전하다가 예수님께서 죽으셨던 세상에서 죽는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하기에 주님은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하셨고 그 기도에 응답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주님은 당신에 대한 사랑과 당신이 우리에게 주신 계명의 관계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15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주님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께서 주신 계명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계명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13장 34절과 35절에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말씀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새 계명인 사랑의 가장 적극적인 행위는 무엇일까요?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따뜻한 말로 대하는 것일까요? 그것도 당연히 사랑의 일부입니다. 하지만 가장 적극적이고 큰 사랑은 바로 복음전파인 것입니다. 가족에 대한 가장 큰 사랑의 행위는 복음전파입니다. 안 믿는 가족들과 이웃들에게 주어야 할 가장 큰 사랑의 행위는 복음전파입니다. 그 행위를 통해 가족과 이웃을 천국으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새 계명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특별히 복음전파라고 한정짓는 순간 더 힘들어짐을 느끼게 됩니다. 성도들 중 다수는 이미 경험했으리라고 여겨집니다. 가족들과 가까운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들로 하여금 교회로 발걸음을 옮기게 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주님도 이미 경험하셨고 잘 알고 있는 바였습니다. 예수님도 형제들에게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현실로 인해 주님은 복음전파를 위해 주신 선물이 있습니다.
16절부터 20절까지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주님은 새 계명을 지키는 일이 인간의 힘으로 되지 않음을 아셨습니다. 오직 절대자의 힘, 즉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가능하지 않음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성령을 약속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가리켜 본문에서는 “다른 보혜사”라고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보혜사라는 말을 보아야하는데 이 말은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곁에”라는 뜻의 “파라”와 “말하다”는 뜻의 “클레토스”의 합성어입니다. 그래서 직역하면 “곁에서 말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단어는 여러 가지 단어로 이해되었는데 그것은 “변호사, 상담가, 위로자, 보혜사”등입니다.
그런데 보혜사를 수식하는 한 단어가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이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또 다른 보혜사가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바로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말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보혜사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살아계실 때 제자들 곁에서 말씀해 주시고 위로해 주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런 분께서 이제 몇 시간 후에 잡혀 심문을 당하시고 죽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당신을 대신할 한 분을 보내시겠다는 것입니다. 그가 바로 “다른 보혜사”, “성령”인 것입니다.
본문을 계속해서 보면 이 성령에 대해 여러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래서 성령이 거하시는 성도를 가리켜 “성전”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어서 한 말씀에서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는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성령은 세상은 받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사탄에게 속해있어 거짓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8장 44절에서는 그들을 가리켜 마귀를 아비로 둔 자들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거짓의 아비 사탄과 대조적으로 17절에서 우리 안에 계신 성령에 대해서는 진리의 영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성령에 대해 말씀하시는 중에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19절의 말씀처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주님은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지만 너희는 나를 보리라고 하셔놓고 그 이유에 대해 말씀하기를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구절을 현대어성경에서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날 것이기 때문이라”라고 번역했습니다. “살아날 것이기 때문”이란 말의 전제는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2장 1절 말씀처럼 모든 사람은 죽었었고 그 중에 성령을 통해 살아날 자가 있는 것을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보존하시며 지켜주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에 대해 말씀해 주신 주님은 당신에 대한 사랑과 계명을 지키는 일의 관계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21절부터 24절까지 같이 읽겠습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가룟인 아닌 유다가 이르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주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이 주신 계명을 지키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가룟인이 아닌 다른 유다가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주님은 앞에서 했던 말씀과 동일하게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이 말씀은 자연인인 상태의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요구입니다. 왜냐하면 죄 가운데 태어나 죄 가운데 사는 인간은 스스로는 절대로 하나님을 알지도 못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계명을 지키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지키며 살 수 있는 유일한 힘은 성령의 도우심 밖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 스스로 무엇인가 행하여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다면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 땅의 수억의 사람들 중에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킬 인간은 없습니다. 단지 성령의 도우심으로 자신을 절제하며 그 분께서 원하시는 일을 감당할 뿐인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의 도우심으로만 주님을 사랑하고 기꺼이 새 계명을 지키며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의 내주하심만이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켜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왜 그분이 계셔야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25절과 26절에 답이 있습니다.
25절과 26절까지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성도들이 새 계명을 지키게 되는 것은 바로 성령께서 모든 것을 가르쳐주시고 생각나게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미 예수님은 제자들이 환란을 겪게 될 일에 대해 예언 하시면서 마가복음 13장 11절에서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넘겨 줄 때에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하지 말고 무엇이든지 그 때에 너희에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니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나 이 시대 주의 백성들이나 모두 동일하게 세상 주관자인 사탄에게 공격을 당합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것은 그 때마다 주께서 믿음을 지킬 수 있는 말씀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야고보서 1장 5절에서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라고 한 것입니다. 여기서 지혜는 시험을 이기는 지혜를 가리킵니다.
또한 바울은 디모데에게 환란에서 이기게 하면서 “내가 말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도 총명은 환란과 박해 속에서도 믿음을 지킬 수 있는 총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초대교회성도들은 로마박해가 한참 심할 때도 성령의 감동으로 믿음을 지켰습니다. 바울도 수없이 죽을 고비를 넘기고 예수살렘에서 잡혔다가 심문을 받게 되는데 그 때 주께서 입을 열어 말씀하게 하셨습니다. 백성들과 천부장 앞에서, 벨릭스와 베스도 총독 앞에서, 그리고 헤롯 아그립바2세 앞에서도 자신을 변화시킨 주님에 대해 말하였습니다.
주의 성령이 안에 있으면서 행하시는 놀라운 일은 이미 우리가 본 것처럼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는”것입니다.
이렇게 성령의 도우심을 믿고 나가 복음을 전파하려는 그들에게 주어지는 한 가지 감정이 있습니다. 그것은 두려움입니다. 특별히 복음을 전파라는 말씀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박해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했습니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에게 중요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27절과 28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라면 내가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라
주님은 제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당장 눈앞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연약함과 초대교회성도들의 두려운 현실, 그리고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두려워하지 않을 이유에 대해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기” 때문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르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 있는 평안은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일생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은 박해와 죽음 앞에서도 오직 사랑하는 영혼들만을 생각하시며 그 모든 고난과 수치를 감당하신 평안인 것입니다.
주님은 어떤 상황에도 평안이 깨지지 않았습니다. 이를 배운 사도들도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평강이 깨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평안은 절대로 요동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4장 6절과 7절에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 미문가에 앉아있던 앉은뱅이를 고치고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관원들에게 잡혀 들어가 온갖 협박을 받게 됩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을 전하지 말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관원들에게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벧전 4장 19,20)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다음날이면 헤롯 아그립바 2세에게 먼저 순교한 야고보처럼 죽을 있었는데도 감옥에서 자는 평안을 누렸습니다. 마찬가지로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에서 억울하게 맞고 옥에 갇혔음에도 두려움에 떨거나 고통스러워 하지 않고 오히려 찬송함으로 옥문을 여는 자들이 되었었습니다.
이처럼 제자들은 환란 속에서도 예수님께서 주신 평안으로 평안해 했던 것입니다.
나아가 베드로는 그 평강이 더욱 커지는 법에 대해 말했습니다. 베드로후서 1장 2절에서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은혜와 평강이 더욱 많아지는 비결에 대해 말씀해 주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에 대해 본문 마지막에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29절부터 31절까지 같이 읽겠습니다.
“이제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이 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의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그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 함이로라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하시니라”
이렇게 해야 할 일과 주신 성령에 대해 말씀하신 이유는 이제 곧 닥칠 환란의 때 때문이었습니다. 그 때에 주님께서 해 주신 말씀을 기억하게 하려는 것이고 그를 통해 그 환란과 고난을 넉넉히 이기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세상의 임금이란 사탄을 가리킵니다. 그 사탄의 수하에서 놀아나는 이 땅의 모든 권력과 가치관들로부터 끊임없는 공격을 당할 때 이 말씀을 기억하고 이기게 하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바로 복음전파입니다. 이 일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