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이기지 못하리라

예레미야 11-19

 

예루살렘 위에 아나돗이라는 마을이 있었습니다. 이곳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정복한 후 땅을 정복할 때 아론의 후손들에게 분배되었던 땅이었습니다. 그런 그곳에서 예레미야가 태어났습니다. 제사장이었던 예레미야는 순서에 따라 일 년에 두 주 정도의 성전 봉사를 위해 예루살렘에 갔습니다. 그는 그 때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게 되었는데 그 부르심이 오늘 말씀입니다.

 

1절부터 3절까지 같이 읽겠습니다.

베냐민 땅 아나돗의 제사장들 중 힐기야의 아들 예레미야의 말이라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가 다스린 지 십삼 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였고 요시야의 아들 유다의 왕 여호야김 시대부터 요시야의 아들 유다의 왕 시드기야의 십일 년 말까지 곧 오월에 예루살렘이 사로잡혀 가기까지 임하니라

 

예레미야는 아나돗 출신 제사장이었습니다. 본문에서 예레미야를 아나돗제사장이라고 소개하는 이유는 그들이 특정한 집단을 이루고 살았던 자들이었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 2118절과 역대상 660절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아나돗은 레위의 아들 중에 고핫 자손, 고핫 자손 중에 아론의 자손들에게 주어진 땅이었습니다.

 

아나돗에 거주하던 제사장이라는 말은 한 가지 사건을 기억하게 합니다. 그것은 열왕기상 2장에 솔로몬이 왕위를 이어받은 후에 아도니야를 왕으로 옹립했다가 실패한 다윗 때의 제사장 아비아달이 제사장에서 파면당하고 고향 땅 아나돗으로 쫓겨난 기록입니다. 이 아비아달은 성막이 실로에 있을 때 제사장이었던 엘리의 후손이었습니다. 엘리는 자녀들을 바르게 가르치지 못하고 하나님보다 자녀를 더 사랑하여 징계를 받아 죽음을 당하고 그의 손자가 태어났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는 뜻의 이가봇이란 이름을 얻게 했던 사람입니다. 그 후손이었던 아비아달은 다윗 때는 다윗 곁에서 제사장 사명을 감당했으나 솔로몬 때 폐위되어 아론의 계보는 더 이상 대제사장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일반적인 제사장의 사명만을 감당하는 신세가 되었었습니다.

 

그런 예레미야를 통해 사독의 계보를 이어가며 제사장 사명을 감당하던 예루살렘의 제사장들과 지도자들을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 성전만을 붙잡고 회개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에 하나님께서 계시므로 망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당시 정치, 종교 지도자들을 향해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실로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자신들의 조상들이 하나님 앞에 바로서지 못했을 때 법궤도 빼앗기고 실로도 파괴되었던 과거의 아픔을 되풀이하지 않게 하기 위해 안타까움으로 선포한 선지자인 것인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자들은 이 시대의 죄악과 그것이 가져올 처참한 결과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은 세상을 향해 외치고 안타까움으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이렇게 선지자 활동을 하던 시기를 본문에서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요시야 13년부터 시드기야 115월까지 라고 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요시야 13년에 선지자 활동을 시작하였는데 이때는 국내적으로는 므낫세로부터 이어져 왔던 우상숭배가 60여년 넘게 행해져오던 시기였고 국제적으로는 지금 이라크와 이란의 조상인 바벨론과 메디아가 연합하여 앗수르를 치기 시작하던 때였습니다. 그리고 5년 후 요시야는 본격적인 종교개혁을 시작했고 앗수르는 바벨론과 메디아에 의해 이스라엘 영토에 대한 영향력을 잃고 있던 시대였습니다. 그러기에 백성들은 잘될 것이라는 희망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요시야의 종교개혁을 통해 온전히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못했고 겉으만 우상숭배를 하지 않았을 뿐 그들의 내면은 여전히 우상과 세상을 섬기는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시드기야 115월 바벨론의 세 번째 침공으로 성전을 완전히 불탔고 백성들은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노예로 살아가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이러한 때 예레미야는 선지자 활동을 했기에 눈물의 선지자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라는 망하고 성전을 파괴되어 불에 타고 백성들은 죽임을 당하거나 끌려가 노예가 될 것을 알았던 예레미야의 눈에서는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불러 선지자로 세우셨습니다.

4절과 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주님께서 예레미야를 부르시며 그 시점에 대해 말씀해 주셨는데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선지자로 세웠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의미는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부르신 것이 즉흥적이고 순간적인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철저한 계획과 준비 가운데 되어 진 것이라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를 주의 백성과 주의 일꾼으로 부르신 것이 그러합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14절과 5절에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부르신 것을 본문에서는 성별하였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예레미야를 성별하셨다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부르실 때 예레미야 개인의 자질이 좋았거나 훌륭해서 불렀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레미야를 부른 부름의 근거는 예레미야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구별해 주셨기에 선지자로서 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당신의 거룩한 일을 위해 따로 구별하여 세우신 것입니다.

 

거룩이 예레미야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고 그분이 구별해 주셔서 예레미야가 거룩해 진 것 같이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거룩해 진 것은 우리의 행위나 자질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구별하여 주셨고 거룩하다 칭해 주셨으며 그 칭함에 흠이 없도록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게 하시고 그 은혜를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주입해 주심으로 이루어 진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여전히 부족하고 여전히 죄를 이기지 못하지만 예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성도가 된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 사명자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제도적인 직분인 목사나 장로, 집사 등의 직분을 넘어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은혜를 증거하는 증인이라는 사명자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이렇게 부름을 받은 예레미야의 반응이 있습니다.

6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

 

부름 받은 예레미야의 첫 번째 말은 슬프도소이다였습니다.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슬프다고 한 것은 당혹스럽고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가 외쳐야 할 내용과 그 말로 쳐야 할 대상들을 생각하며 자신이 그 일을 감당한다는 것이 너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맡기신 일이 세상을 향해 복을 말하고 평안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레미야를 통해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은 재앙이었고 심판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 말을 듣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말과 그 말을 전하는 예레미야를 싫어하였고 심지어는 그를 때려 착고에 채우고 웅덩이에 던지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심판과 재앙에 대해 말하는 사명은 단지 예레미야만의 것은 아니었습니다. 같은 시대 포로지에서 외쳤던 에스겔도 애곡과 애가와 재앙의 말을 전해야 했고 요엘은 메뚜기 재앙을 통해 여호와의 심판의 날을 전했고 이사야를 비롯한 모든 선지자들도 죄를 지적하고 그 죄에 따른 심판을 선포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각 시대마다 그 시대를 보고 말씀을 전해야 하고 삶으로 그 말씀을 실천하며 그 삶으로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는 자들은 죄를 보며 슬퍼하고 자신이 전해야 하는 엄청난 사명 앞에 당혹스럽고 두려워 슬퍼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한 예레미야는 자신은 아이라 말 할 줄 모른다고 하고 있습니다. 모세도 하나님께 부름 받았을 때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4:10)라고 하였습니다. 에스겔도 소명을 받은 후에 7일 동안 근심 중에 있었습니다. 솔로몬도 왕이 된 후에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한다”(왕상3:7)고 하였습니다. 이들이 모든 이러한 반응을 보인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자신이 감당해야 할 사명의 크기와 자신의 능력의 엄청난 차이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어린아이일 뿐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연약하고 모자란 사람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못난 모습은 쉽게 변하지 않고 우리 속에 죄의 뿌리는 쉽게 뽑히지 않습니다. 쉽게 절망하고 주님께 목숨을 바쳐 충성하겠다던 다짐도 쉽게 무너집니다. 심지어 어떤 때는 우리 스스로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기 부끄러울 때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거룩한 주의 일을 감당한다는 것이 너무나 두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고 탄식하며 세리의 기도처럼 예배당 한쪽 구석에서 가슴을 치며 죄인임을 고백할 뿐인 것입니다.

 

이렇게 두려워하며 자신의 연약을 고민하는 예레미야에게 주님은 명령하시며 격려해 주셨습니다.

7절부터 9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너는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고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우리가 읽은 구절에서 하나님을 두 가지 하지 말라와 두 가지 하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먼저 하지 말라는 것 두 가지는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고라는 말씀과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아이라고 하지 말라는 것은 주의 일은 예레미야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고 예레미야는 도구일 뿐이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지켜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8절 후반에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라고 한 것입니다.

 

또한 두 가지 해야 할 것은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라는 말과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라는 말입니다. 두 가지 하라는 것은 한 마디로 하면 가서 말하라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예레미야는 주님께서 보내는 곳에 가서 주님께서 하라는 말씀을 전하는 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우리들도 그러합니다. 우리는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이제 내가 산 것 아니요 그리스도 예수께서 내 안에 사는 것이라고 한 것처럼 우리의 삶을 더 이상 우리의 것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가라하며 가고 서라하면 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구름기둥이 움직이면 따라고 구름기둥이 멈추면 멈추었던 것과 같이 말입니다.

 

이렇게 가서 말해야 하는 예레미야의 입에 손을 대신 것은 이제 예레미야는 주님께서 주신 말을 전하는 자가 된 것을 의미합니다. 이사야에게는 숯불로 입을 지지는 환상을 보여주셨고 에스겔과 요한은 말씀 두루마리를 먹는 환상을 통해 자신들이 전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하셨습니다. 우리들도 이들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의 입이라고 우리가 원하는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구원의 말, 사랑의 말을 하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주님은 예레미야에게 두 가지 환상을 보여 주셨습니다.

먼저는 살구나무가지 환상입니다.

11절과 1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시매 내가 대답하되 내가 살구나무 가지를 보나이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네가 잘 보았도다 이는 내가 내 말을 지켜 그대로 이루려 함이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살구나무 가지를 보여주시며 네가 무엇을 보느냐고 물으시고 이 환상을 통해 말씀하시려는 것이 무엇인지 말씀하셨습니다. 살구나무는 아몬드 나무입니다. 이 아몬드나무를 히브리어로 샤케드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무엇을 보느냐고 물었을 때 샤케드를 보나이다라고 했고 이에 하나님은 잘 보았다고 하셨는데 보았다는 말이 쇼케드입니다. “쇼케드지켜보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샤케드쇼케드의 비슷한 발음을 통해 예레미야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을 전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지켜보고 계시며 예레미야를 통해 선포하신 말씀을 반드시 이룰 것을 말씀해 주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쇼케드해 주십니다. , 눈동자처럼 지켜 보호하여 주십니다. 또한 우리에게 전하라고 하신 말씀 즉,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를 믿으면 구원을 받고 그것은 믿지 않으면 생명이 없다는 말씀은 반드시 성취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환상이 있습니다.

13절부터 16절까지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대답하되 끓는 가마를 보나이다 그 윗면이 북에서부터 기울어졌나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재앙이 북방에서 일어나 이 땅의 모든 주민들에게 부어지리라 내가 북방 왕국들의 모든 족속들을 부를 것인즉 그들이 와서 예루살렘 성문 어귀에 각기 자리를 정하고 그 사방 모든 성벽과 유다 모든 성읍들을 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무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들에 절하였은즉 내가 나의 심판을 그들에게 선고하여 그들의 모든 죄악을 징계하리라

 

하나님은 두 번째 환상으로 끓는 가마가 북에서부터 기울어져 그 내용물이 남쪽으로 흘러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환상을 북쪽으로부터 대적들이 쏟아져 내려와 유다를 칠 것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이 두 번째 환상은 예레미야가 외쳐야할 말씀의 내용이기도 했습니다. 평안하다고 여기고 자신들의 바르지 못한 삶은 생각지 않고 예루살렘성전에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이유를 들어 영원히 복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심판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북방 왕국들의 모든 족속들을 부르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심판하실 이유를 말씀하시기를 무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들에 절하였기 때문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하면 그들은 자신들은 우상을 섬기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요시야의 종교개혁으로 모든 우상들의 신전과 제사장들을 폐하였고 여호와의 성전에 나와 절기를 지키며 예배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들에게 여전히 우상을 숭배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그들의 내면입니다.

 

그래서 같은 시대, 같은 내용으로 선지자 활동을 했던 에스겔은 예루살렘이 무너졌을 때 한 가지 환상을 통해 심판의 이유를 말씀했습니다. 그것은 녹슨 가마솥환상이었습니다. 요시야가 종교개혁을 통해 녹슨 가마솥의 겉을 닦아 낸 것이라면 사이사이에 배어있는 녹은 벗겨 내지 못하였습니다. 그 사이사이에 배어 있는 녹은 외적인 우상숭배가 아니라 내면에 여전히 남아있는 우상숭배를 의미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긴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만으로 판단할 수 없었습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겼지만 그들은 여전히 우상을 섬겼던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합니다. 우리가 외적으로는 어떤 신에게도 절하지 않지만 여전히 세상에서 섬겼던 것들을 섬기고 그것들이 우리들의 행불행을 결정합니다. 돈과 명예, 자녀와 성공, 쾌락과 세상적 평안을 우리들의 신으로 우리 속에서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소돔을 떠난 롯의 아내가 뒤를 돌아보았던 것처럼 여전히 세상에 두고 왔어야 하는 것을 손에 쥐고 그것을 보며 아쉬워하는 모든 것이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그것을 성경은 음란하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을 향해 심판의 메시지를 전해야 하는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은 약속을 해주고 있습니다.

17절부터 19절까지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너는 네 허리를 동이고 일어나 내가 네게 명령한 바를 다 그들에게 말하라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그들 앞에서 두려움을 당하지 않게 하리라 보라 내가 오늘 너를 그 온 땅과 유다 왕들과 그 지도자들과 그 제사장들과 그 땅 백성 앞에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성벽이 되게 하였은즉 그들이 너를 치나 너를 이기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할 것임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본문에서 주님은 예레미야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고 당신께서 해주시겠다는 약속이 있습니다.

먼저 예레미야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너는 네 허리를 동이고 일어나 내가 네게 명령한 바를 다 그들에게 말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허리를 동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마음을 단단히 먹으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일어나서 상대해야 할 대상은 온 땅과 유다 왕들과 지도자들과 그 제사장들과 그 땅 백성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말을 한 마디로 모든 백성을 대상으로 심판을 선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이 일을 실행하는 것이 어려울 것이라는 것은 이미 본문에서 예고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과 그 뒤에 이어지는 말들 때문입니다.

 

이렇게 예레미야가 전하면 예고되어 있는 것은 그들의 공격입니다. 사실 예레미야서 전체를 보면 예레미야는 이 말씀을 전하다가 매도 맞고 착고에 채워지기도 하고 웅덩이에 던져져 죽을 위기도 겪습니다.

 

이런 예레미야에게 본문에서 주님은 당신이 보호해 주실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들 앞에서 두려움을 당하지 않게 하리라 보라 내가 오늘 너를 그 온 땅과 유다 왕들과 그 지도자들과 그 제사장들과 그 땅 백성 앞에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성벽이 되게 하였은즉 그들이 너를 치나 너를 이기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할 것임이니라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보호해 주시겠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좀 이상합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은 그들의 우협으로부터 완전한 보호입니다. 해를 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조금도 상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아가 대적들이 나를 해하려 할 때 그들을 완전히 멸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본문을 자세히 보면 예레미야는 대적들로부터 공격을 당하여 매를 맞는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너를 치나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치나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성벽이 되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해 주시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곤경과 재난, 핍박과 환란으로부터 건져내심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모든 어려움 속에서도 예레미야가 사명을 감당하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는 보호이고 구원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적용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해 주신다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지는 일상의 삶과 어려움을 없게 해 주신다는 것이 아니라 그 어려움과 환란 속에서도 성도가 성도로서의 삶을 살게 해 주시고 주어진 그리스도인의 사명의 삶을 완수하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나 동시대 활동했던 에스겔도 동일한 보호를 받았습니다. 에스겔에게도 내가 그들의 얼굴을 마주보도록 네 얼굴을 굳게 하였고 그들의 이마를 마주보도록 네 이마를 굳게 하였으되 네 이마를 화석보다 굳은 금강석 같이 하였으니 그들이 비록 반역하는 족속이라도 두려워하지 말며 그들의 얼굴을 무서워하지 말라 하시니라(3:7-9)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나라가 망하고 포로로 끌려가 일반적인 구원과 보호를 받지 못했지만 환란과 핍박 속에서도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도록 보호해 주시고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에게도 얼굴을 부싯돌같이 굳게”(50:7)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어떤 모욕을 당해도 부끄러워하지 않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도우심입니다. 하나님께서 도우시면 모욕과 수치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견뎌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도우시면 환란과 핍박, 어려움과 고통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견뎌 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도우심과 구원의 역사입니다.

 

이것을 믿고 주어진 이 땅에서의 삶을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빌립보서 413절에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한 것입니다. 가난에 처해도 원망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부요해져도 교만하거나 하나님을 모른다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 그것이 성도의 능력입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은 예레미야와 우리에게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너를 치나 너를 이기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할 것임이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어진 성도의 삶과 복음증거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는 자가 됩니다. 성도의 이 사명을 통해 이 땅을 통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0절에서도 보라 내가 오늘 너를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 위에 세워 네가 그것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라고 한 것입니다.

 

주님의 명령과 약속을 기억해야 합니다.

너는 내가 명한대로 행하라 내가 너를 보호하겠다

그들이 너를 치나 너를 이기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할 것임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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