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 다 보존되어야 한다

9:9-17

 

2015년이 시작되고 첫 주일이 되었습니다. 이 때쯤 되면 사람들은 새로운 각오와 결단, 그리고 계획들을 만들고 실천을 시작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결단을 하고 새해를 시작하셨습니까? 한 번 더 예배하기, 5분 더 기도하기, 매일 성경읽기, 한 명 이상 전도하기, 죄 된 삶 끊어내기, 주변 사람들에게 선 행하기 등의 결단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러한 생각과 삶을 이루기 위해 새로운 환경이나 관계, 또는 계획을 세우게 되는데 이럴 때 흔히 쓰는 말이 새 술은 새 부대에라는 말입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2015년 새롭게 시작하는 교회의 부서나 우리의 삶이 새롭게 시작하고 새 마음으로 하고자 할 때 이 말을 하면서 새 각오를 다지는 것입니다

.

이럴 때 사용되는 새 술은 새 부대에라는 말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근거하여 사용되고 있는 말입니다. 이 말을 그렇게 사용하는 것은 오늘 본문 가장 마지막 절에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 되느니라라고 한 말 때문입니다. 이 구절에 근거하여 이렇게 말하는 것은 분명히 맞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부대가 터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본문을 자세히 보면 새 술과 새 부대 뿐 아니라 헌 부대와 낡은 옷도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이야기를 보면 먼저 마태가 부름을 받는 장면이 있습니다.

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세관에서 세금을 받고 있던 마태를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예수님께서 부르시자 마태라는 사람은 조금도 주저함 없이 예수님을 따랐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그것은 마태의 혈통이 레위인이라는 것과 그의 평소의 관심사 때문이었습니다. 마태는 레위인으로 태어났기에 어릴 때부터 말씀교육이 철저했습니다. 그는 말씀을 통해 메시야에 대해 배웠고 당시 메시야에 대한 관심이 극에 달할 때라 마태도 자신이 구약 성경을 통해 알고 있는 메시야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자신이 살고 있는 동네에 예수라는 사람이 나타났고 그의 행동과 가르침이 메시야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죄인 중에 죄인이라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자신을 부르시는 예수님의 부름이 있었고 그는 조금도 주저함 없이 예수님을 따랐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마태는 그 기쁨을 주변 사람들과 함께 했습니다.

10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마태는 자신을 불러 주신 예수님께 감사하여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모셔서 식사를 대접했습니다. 그 때 자신의 동료 세리들과 제자들이 함께 했습니다. 마태가 이렇게 한 것은 유대인들에게 죄인이라고 멸시받았던 자신을 당시 선생이라고 불리던 예수님께서 자신을 불러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자신들과 음식을 잡수시던 일은 마태와 그 동료 세리들에게는 말 할 수 없는 기쁨이었겠지만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율법주의자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마태가 하던 일인 세리는 당시 창녀와 함께 죄인의 대표였기 때문입니다. 그런 죄인들과 당시 랍비라고 불리던 예수님이 함께 한 식탁에 앉아 음식을 나누고 있다는 것은 당시 종교적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바리새인들의 질문이 있습니다.

11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바리새인들에게 있어서 이 질문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이란 뜻 자체가 구별된또는 분리된자라는 뜻입니다. 이들이 처음 등장한 때는 헬라시대였는데 헬라의 문화와 종교로부터 자신들을 분리하여 구별된 삶을 살겠다고 시작한 무리였습니다. 그러던 것이 화석화 되었고 생명력 없는 종교인이 되어 예수님께서 사역하시는 동안 가장 강력한 대적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보기에는 본문의 예수님의 행동은 거룩한 선생으로서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이해 할 수 없는 행동으로 인해 질문을 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의 소리를 들으신 주님은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대답을 주셨습니다.

12절과 1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자신의 행동을 이해 못하는 바리새인들에게 한 가지 비유를 들어 자신의 행동을 이해시키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읽은 대로 병든 자와 의원의 관계입니다. 의원의 존재이유는 바로 병든 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마태를 비롯한 세리들은 병든자요 자신은 그들을 위해 왔다고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라고 하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배우라라는 말은 랍비들이 성경을 더 공부해야할 필요성이 있는 사람들을 깨우치고자 할 때 흔히 사용하던 상투적인 말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성경에 능통하다고 자위하면서도 참 종교의 핵심이요 내용인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게을리 하고 외적인 의식과 형식에만 매달려 있었습니다.

 

이들은 모양만 갖추면 종교적인 임무를 다 한 것이라고 착각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성경도 참 종교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냉소적으로 랍비들이 흔히 사용하던 너희는 가서 배우라라는 말을 빌어 바리새인들의 자만을 질타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바리새인들과의 대화가 마무리 되려는데 또 한 부류가 찾아와 예수님을 공격했습니다. 그것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입니다.

1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바리새인들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을 시비 걸었다면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자신들과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왜 예수님과 제자들은 금식은 안하고 매일 먹고 마시느냐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바리새인들과 요한의 제자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 월요일과 목요일에 규칙적으로 금식하였습니다. 또한 거국적인 금식일이었던 속죄일과 부림절 전날 그리고 예루살렘 함락을 기념하는 아빕월 9일에 금식하였을 뿐 아니라 수시로 금식하곤 하였습니다.

 

이 두 부류 중에서도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요한의 금식주의만을 고수했기 때문에 정해진 금식일에 금식치 않는 예수와 그의 제자들을 비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극단적인 요한의 추종자들은 A.D. 3세기까지 계속 그 세력을 유지했으며, 또한 금식과 기도를 중심으로 한 철저한 금욕생활을 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만큼 금식에 철저했고 금식을 중심으로 한 금욕 생활이 신앙의 모습으로 자리 잡은 세례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먹고 마심은 신앙의 지도자가 아니라 세속적인 사람으로 비춰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주셨습니다.

먼저 1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예수님은 그들에게 익숙한 혼인잔치 문화를 통해 자신이 지금 죄인들과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한 이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의 결혼잔치가 7일간 이어지는데 신랑의 친구들은 신랑과 함께 그 잔치를 즐겼습니다. 만약 이 결혼잔치 기간에 유대인들의 금식일이 걸리면 금식을 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단 그 잔치가 끝나고 나면 그 때 못했던 금식을 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유대 결혼문화를 통해 지금 예수님은 신랑으로, 예수님께서 선택한 죄인들은 신부의 관계로 비유하시며 지금은 잔치하는 마음으로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당연히 뒤에 이어지는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는 말처럼 신랑의 친구들이 신랑을 신부에게 완전히 내어주면 그들은 잔치 기간에 못했던 금식을 해야 했던 것처럼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곁을 떠나실 때가 오는데 그 때는 금식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는 금식을 강조하고 싶으신 것이 아니라 지금, 즉 주님과 함께 하고 있는 이때는 잔치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주님은 또 다른 말씀을 주셨습니다.

16절과 1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주님은 바리새인들과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본문의 비유를 통해 아주 중요한 진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먼저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다고 하셨고 이어서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지금 우리 시대의 생각과 문화로 이해하면 안 되고 당시 이 말씀을 듣던 사람들의 문화로 들어가 생각해 봅시다.

 

먼저 생베 조각과 새 포도주에 대한 그들의 생각은 어땠을까요? 생베 조각과 새 포도주는 좋은 것이었을까요? 아닐까요?

 

생베조각이란? 헬라어로 아그나포스라는 말인데 이는 손질되지 않은 헝겊또는 아직 빗질을 하지 않은 천이란 뜻입니다. 당시 생베조각은 매우 질기고 부드럽지 못한 상태의 천이었습니다. 그래서 생베를 옷감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세탁과 손질 과정을 통해 부드럽게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세탁을 하면 크기가 줄어들었기 때문에 생베 조각을 세탁과 손질 과정을 거치지 않고 낡은 옷에 덧대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렇게 했다면 반드시 생베는 낡은 옷은 더 찢어놓는 결과를 낳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다고 했을 때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당시 사람들은 그 의미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생베는 결코 좋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새 포도주에 대한 생각은 어땠을까요? 새 포도주는 아직 발효되지 않은 상태의 포도즙입니다. 이 생즙을 낡은 가죽 부대에 넣으면 안 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낡은 가죽 부대는 이미 굳어 있는 상태라 포도즙이 발효되는 과정을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포도즙이 발효되는 것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새 가죽 부대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야 그 팽창력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에서 새 포도주는 좋은 포도주가 아닙니다. 그래서 같은 말씀을 기록하고 있는 누가는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속담에도 친구와 포도주는 오래 될수록 좋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새 포도주라는 말을 듣고 있던 청중은 생베라는 말과 함께 좋지 않은 상태, 아직 미숙한 상태, 미완성의 상태의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왜 생베와 새 포도주 그리고 낡은 옷과 낡은 가죽부대라는 것을 끌어와서 말씀하고 계신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앞에서부터 보았던 바리새인들과 요한의 제자들 그리고 마태와 마태가 상징하는 죄인들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당시 바리새인과 요한의 제자들은 낡은 옷이었고 낡은 가죽 부대였습니다. 그런 그들이 마태와 죄인들을 품을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찢어짐이 더하거나 터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거룩한 삶을 문제 삼은 적이 없습니다. 그들의 위선이 문제였을 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태복음 5장에서 성도들의 삶의 기준을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의로워져야 한다고 했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바리새인들의 거룩한 삶이나 세례요한의 제자들의 경건의 삶을 낡은 가죽부대와 낡은 옷이라고 한 것이기에 결코 낡은 가죽 부대나 낡은 옷이 나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없어져야 한다고 말한 것도 아닙니다.

 

사실 낡은 옷과 낡은 가죽 부대를 망가뜨리는 것은 두 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먼저는 낡은 가죽 부대가 의미하는 생각과 삶이 굳어진 것이고 또 하나는 생베 조각과 새 포도주의 미성숙함이 문제인 것입니다.

 

낡은 옷과 낡은 가죽 부대는 버려야 할 것일까요? 예수님의 말씀을 잘 생각해 보면 낡은 옷과 낡은 가죽 부대도 염려하고 계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낡은 옷도 더 헤어지면 안 되고 낡은 가죽 부대도 터지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생베 조각과 새 포도주도 염려하고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생베 조각과 새 포도주, 그리고 낡은 옷과 낡은 가죽 부대까지 모두 염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현대의 교회 속으로 들어가 봅시다.

교회 안에는 온갖 부류의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객관적으로 볼 때도 의롭고 훌륭합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비난 받아 마땅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에 처음 나왔음에도 오랫동안 신앙생활 한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오랫동안 교회생활을 했음에도 여전히 세속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현대교회의 사람들도 오늘 본문의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한 부류는 아직 미숙한 모습의 성도들과 한 부류는 바리새인과 세례 요한의 제자들처럼 나름 경건하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두 부류의 갈등이 있습니다. 마치 마태의 집에서처럼 말입니다.

 

생베 조각과 새 포도주 같은 성도들은 기존의 종교적 틀에 갇혀 있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결코 좋게 보이지 않습니다. 반대로 생베 조각과 새 포도주 같은 성도들의 눈에 낡은 옷과 가죽 부대같이 굳어지고 고리타분해 보이는 성도들의 삶은 가까이 하기에 먼 당신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은 연약하고 미성숙한 성도들을 받아들이고 아직 미성숙한 성도들은 오랫동안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새 부대를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둘은 모두 보존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서로 판단을 금해야 합니다. 자신의 기준과 시선으로 함께하고 있는 성도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일은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21절로 3절에서는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라고 했고

 

야고보서 411절과 12절은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성도 간에 판단하고 정죄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영역이 아닙니다. 단지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2장은 2절부터 5절은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한번 옆 사람을 보십시오. 그 사람이 여러분의 생각과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인지, 여러분의 마음에 쏙 드는 삶을 사는 사람인지 한번 보십시오. 어떠십니까? 말은 못하겠고......, 그렇다면 자신을 좀 보십시오. 곁에 있는 성도가 보기에 흡족할 만한 사람인지 어떤지 보십시오. 어떠십니까?

 

성도 여러분,

오늘 생베조각같이, 오늘 새 포도주같이 어설프고 미성숙한 성도가 어느 날 훌륭한 그리스도인 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새 부대를 만들어야 합니다. 굳어진 종교인의 틀을 벗어 버리고 예수님께서 기꺼이 죄인의 집에 유하시고 그들과 식탁을 함께 하고 죄인들을 대하여 오래 참으신 주님의 마음, 그 마음으로 우리의 부대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모두가 보존 될 뿐 아니라 성숙하게 되는 것입니다.

 

2015년 우리들의 부대를 새롭게 하여 주님께서 함께하게 하신 사람들을 품고 기다려주며 기도해주어 모두가 성장하는 한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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