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가지 악

예레미야 29-13

 

예레미야는 나라가 심판을 당하는 시기에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런 그였기에 이스라엘의 죄악과 그에 따른 심판의 메시지를 주로 선포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이 심판을 받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두 가지 악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두 가지 악을 보면서 우리의 모습을 비추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1절부터 3절까지 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가서 예루살렘의 귀에 외칠지니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네 청년 때의 인애와 네 신혼 때의 사랑을 기억하노니 곧 씨 뿌리지 못하는 땅, 그 광야에서 나를 따랐음이니라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위한 성물 곧 그의 소산 중 첫 열매이니 그를 삼키는 자면 모두 벌을 받아 재앙이 그들에게 닥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본문에서 하나님은 몇 가지 동사를 사용하시면서 당신의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먼저는 가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백성들에게 가라고 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이미 1장에서 소명 받을 때 하나님께서 명하셨던 것입니다. 117절에서 너는 네 허리를 동이고 일어나 내가 네게 명령한 바를 다 그들에게 말하라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그들 앞에서 두려움을 당하지 않게 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백성들에게 보내셨습니다. 사실 이 보내심은 신구약의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의 삶이었습니다. 특별히 신약의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이 땅에 보내심을 받은 것처럼 이 세상에 보냄을 받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가리켜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뜻을 가진 아포스톨로스, 사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마찬 가지로 우리들도 보냄을 받은 자들인 것입니다. 세상에 하나님의 사도로 보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들은 천국을 상속 받은 자의 삶에 만족하는 자들이 아니라 우리의 정체성이 세상으로 보냄은 받은 자라는 사실을 항상 인식하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주님은 외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외치다라는 말은 카라라는 히브리어인데 부르다, 선포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예레미야에게 백성들에게 가서 외치라고 하신 것은 말씀을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심판과 회개의 말씀을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외치는 외침은 단순히 선포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들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소리인 것입니다. 이 외침이 없다면 아무도 주님께 돌아올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이 시간 예배를 드리고 있는 우리들도 마찬 가지입니다. 누군가의 외침이 있어야 주의 백성으로 돌아 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014절과 15절은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죽기 직전까지 디모데에게 때를 얻든지 못 었든지 말씀을 전하라고 하였습니다.

 

누군가 전하지 않으면 아무도 들을 수 없고 하나님을 알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이 사실을 11장에서 힘 쎈 천사의 손에 들려있던 작은 책을 요한이 먹고 죽음을 각오하고 말씀을 전하여 그들로 하나님을 알게 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가서 외치라고 하신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당신의 사랑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기억하노라라는 말입니다.

2절 중반절에 내가 너를 위하여 네 청년 때의 인애와 네 신혼 때의 사랑을 기억하노니라고 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사랑했던 시절을 기억하고 계시다고 하고 있습니다. 말씀하시기를 네 청년의 때의 인애와 네 신혼의 때의 사랑을 기억한다고 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청년의 때란 말은 아브라함을 부르신 후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때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과 언약하신 하나님은 430년 후에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아들이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언약을 받아들이며 신혼의 기쁨 속에서 충성을 맹세하였던 것입니다(24:6-8).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세워주신 언약 하에 있었을 때를 청년 때의 사랑이라고 말한다면,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편 팔과 큰 재앙으로 구속하여 내시고 시내산에서 만나시던 때는 신혼 때의 사랑에 비유할 만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약속해 주신 것으로 청년의 때의 사랑이라고 한다면 출애굽을 통하여 하나님과 결혼한 셈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청년의 때의 인애와 네 신혼의 때의 사랑을 기억한다고 하며 그 시기를 설명하기를 곧 씨 뿌리지 못하는 땅, 그 광야에서 나를 따랐음이니라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사랑의 시기는 광야였다는 것입니다. 그 땅은 씨를 뿌리지 못하는 땅이라고 했고 6절에서는 광야 곧 사막과 구덩이 땅, 건조하고 사망의 그늘진 땅, 사람이 그 곳으로 다니지 아니하고 그 곳에 사람이 거주하지 아니하는 땅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 광야는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살 수 없는 땅입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셨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따른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이 광야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사랑을 나누던 곳이 광야였고 그들이 사랑을 잃었을 때 광야로 데라고 나갔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싶거나 하나님을 만나고 싶을 때 광야로 갔습니다.

 

그 이유는 광야가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광야라는 히브리어가 미드바르입니다. 이는 말씀이라는 뜻의 다바르와 같은 어근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솔로몬의 지성소를 드비르라고 하는데 하나님과 만나는 장소입니다. 그러므로 광야는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장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호세아서에서 호세아가 고멜을 광야로 데라고 나가 말로 위로하고 그곳에서 새로운 관계와 시작을 하게 됩니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그 광야는 소망의 문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광야는 사랑의 장소입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그곳은 사람이 살 수 없는 땅, 고난의 땅입니다. 하지만 다윗이 광야에서 도망을 다니며 하나님과 만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훈련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범죄 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벨론이라는 포로지의 광야에서 우상숭배를 모두 버리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세례 요한도, 예수님도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관계를 새롭게 했습니다. 엘리야도 이세벨의 죽이겠다는 말에 두려워하여 광야로 나갔고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나 믿음과 사명을 회복하였습니다.

 

그래서 성도에게 광야는 저주가 아니라 복인 것입니다.

 

또한 요한계시록 12장에서는 무저갱에서 나온 짐승에게 아이를 낳은 여인이 쫓기게 되는데 그 장소가 광야라고 했고 그곳에서도 보호 받는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광야같은 고난의 자리에 있을 때도 결코 버리거나 잊지 않으시고 철저히 보호하십니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구출하고 돌아와 두려워 떨 때에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말씀하시기를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15:1)라고 하셨고 이사야서 4110절은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기억하는 이유에 대해 본문은 너를 위하여라고 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와 이방을 의지하고 당신을 버린 것에 대해 책망하시는 중에 옛 사랑을 기억하고 계시는데 그 이유가 이스라엘을 위하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다시 회복되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들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자신에게로 돌아오길 바라고 있었기에 너를 위하여기억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청년 때의 인애와 네 신혼의 때의 사랑을 기억하시는 주님은 이스라엘을 향한 변함없는 사랑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위한 성물 곧 그의 소산 중 첫 열매이니 그를 삼키는 자면 모두 벌을 받아 재앙이 그들에게 닥치리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바쳐진 성물로 여겨지는 백성이었습니다. 성물이란 하나님께 바쳐진 재물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레위기를 보면 하나님께 바쳐진 재물을 함부로 대하거나 부정한 자가 먹으면 속죄제를 지내거나 죽기까지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성물이라고 한 것은 그만큼 귀하게 보고 계시며 철저하게 지켜 주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성물이기에 누구든지 이스라엘을 함부로 다루거나 핍박을 하면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작고 힘없는 민족이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보호하시기에 두려울 것이 없는 민족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를 삼키는 자면 모두 벌을 받아 재앙이 그들에게 닥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사랑했고 여전히 사랑하고 있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입니다.

4절부터 5절까지 같이 읽겠습니다.

야곱의 집과 이스라엘의 집 모든 족속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나 여호와가 이와 같이 말하노라 너희 조상들이 내게서 무슨 불의함을 보았기에 나를 멀리 하고 가서 헛된 것을 따라 헛되이 행하였느냐

 

하나님은 내게서 무슨 불의함을 보았느냐고 묻고 계십니다. 이렇게 묻는 것은 당신이 이스라엘에게 불의한 일을 행한 적이 없다는 강한 표현인 것입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6절과 7절에서 광야 곧 사막과 구덩이 땅, 건조하고 사망의 그늘진 땅, 사람이 그 곳으로 다니지 아니하고 그 곳에 사람이 거주하지 아니하는 땅을 우리가 통과하게 하시던 여호와라고 했고 내가 너희를 기름진 땅에 인도하여 그것의 열매와 그것의 아름다운 것을 먹게 하였다고 한 것입니다. 이렇게 잘 해 주었는데 너희는 내게서 무슨 불의를 보았느냐고 반문하고 계신 것입니다.

 

31절에서도 무슨 연고로내 백성이 말하기를 우리는 놓였으니 다시 주께로 가지 않겠다 하느냐고 따지고 있습니다. 미가 선지자를 통해서도 내 백성아 내가 무엇을 네게 행하였으며 무슨 일로 너를 괴롭게 하였느냐 너는 내게 증언하라(6:3). 도대체 무엇으로 너를 괴롭게 했단 말이냐? 하십니다.

 

하나님의 서운함은 이렇게 이스라엘에게 잘 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하나님을 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행한 이스라엘에 대해 헛되이 행했다고 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헛되다라는 말은 히브리어 헤벨입니다. 이 말은 허탄한 것”, “바람과 같은 것혹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전도서에서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고 할 때 쓰인 단어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멀리 떠나 바람같이 헛된 것들을 따랐습니다. 자신들을 사랑했었고 여전히 사랑하고 계시는 주님을 버리고 헛된 것들을 따른 것입니다. 이들이 따랐던 것은 8절과 11절에서 무익한 것을 따랐다는 말과 연결됩니다. “무익한 것이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익한 것을 따랐는데 그들이 그렇게 한 것은 그것들이 당장 자신들에게 유익을 주었고 영원히 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부터 바알을 섬겼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농사란 것을 처음 지었는데 그 농사에 필요한 것을 제공하는 신이 바알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알은 풍요의 신이고 비를 내리는 신이었기에 농사짓는 데는 가장 중요한 신이었습니다. 그들은 당장 바알을 통해 풍요를 얻는 것 같았고 영원히 얻을 것 같았지만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은 그들을 책망하고 그 땅을 황폐하게 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타작마당이 주는 풍요를 즐거워했고(9:1) 담무스를 위해 애곡을 하는 것에 힘을 다했습니다(8:14). 그 이유는 타작마당에 있던 바알 신이 자신에게 풍요를 준다고 믿었고 자신들의 애곡을 통해 지하에서 올라온 담무스 즉, 바알이 자신들에게 풍요를 준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멀리하고 세상을 쫓는 것은 세상이 풍요를 준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지금이나 그 때나 하나님을 버리고 헛된 것들을 따른 자들은 마치 하와가 뱀의 유혹에 넘어 갔던 것처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아니라고 말하며 헛된 것을 추구하고 사탄을 따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왜 하나님의 말씀보다 마귀의 유혹을 따라갔습니까? “먹음직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3:6) 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따랐던 애굽, 앗수르, 바벨론 등은 모두다 이스라엘보다 크고 강했습니다. 그리고 부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를 먹음직하고 보암직한 것으로 부러워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저들의 부강은 저들이 섬기는 신이 가져다주는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방이 누리고 있는 그 복을 받으려고 그들의 신을 섬기게 이른 것입니다.

 

이렇게 무익 것을 따르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책망하시는 주님은 그러한 일을 이방인들이 자신들의 신을 바꾸지 않고 있는 것과 비교하여 책망하였습니다.

1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어느 나라가 그들의 신들을 신 아닌 것과 바꾼 일이 있느냐 그러나 나의 백성은 그의 영광을 무익한 것과 바꾸었도다

 

지금 우리들에게도 이 말씀은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이방종교를 따르거나 이단에 빠진 사람들의 신앙은 목숨을 내 겁니다. 하지만 참 진리라고 하고 생명인 예수님을 섬기는 기독교인들은 너무 자주, 너무 쉽게 하나님을 멀리하고 세상을 따르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한탄처럼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은 너무나 하나님을 자주 버리고 무익한 것을 따르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십니다.

1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너 하늘아 이 일로 말미암아 놀랄지어다 심히 떨지어다 두려워할지어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늘을 향해 말하기를 놀랄지어다 심히 떨지어다 두려워할지어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하늘이 가리키고 있는 것은 이 세상입니다. 이 세상이 놀라고 떨고 두려워해 해야 할 이유를 조금 전에 읽은 구절에서 이 일로 말미암아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 일 즉, 하나님을 멀리하고 헛된 것을 따른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버리고 헛된 것을 따르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부르는 행위인 것입니다.

 

이렇게 심판을 부르는 이유를 11절에서 는 바꾸었다고 하고 있고 17절에서는 떠났다고 하고 있으며 19절에서는 버렸다고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우상과 바꾸고 하나님을 속히 떠나고 하나님을 버린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죄를 한마디로 요약한 것은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다고 한 것입니다.

여기서 두 가지 악이란 무엇일까요?

1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먼저는 생수의 근원되는 하나님을 버린 것이고 두 번째는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은 생수의 근원이십니다. 선지서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샘의 근원으로 말씀합니다. 에스겔서도 스가랴서도 호세아서도 아모스서도 스가랴서도 샘이 주로부터 흘러 주변을 적시고 생명을 살릴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초막절 끝 날에 성전에 서셔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7:37,38)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린 것입니다. 그들에게 생명을 줄 수 있는 분이 주님이심에도 어리석게도 하나님을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는 웅덩이를 팠습니다. 여기서 웅덩이란 정치적으로는 앗수르와 애굽을 의지하고 종교적으로는 우상을 섬긴 것입니다. 이것은 앞에서도 말씀 드렸듯이 헛된 것들이었습니다. 그것들은 무익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따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웅덩이를 팠다고 하면서 그 웅덩이를 다시 묘사하기를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라고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아카바 지진대에 위치했습니다. 그들은 웅덩이를 파고 우기 때 힘을 다해 빗물을 저장했습니다. 그리고는 더 이상 하나님을 의지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잠시 잊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조금 전에 말씀 드렸든 자신들이 사는 곳이 지진대라는 것입니다. 물을 아무리 잘 모았어도 하나님께서 그 땅을 잠시 흔드시면 그 수고는 모두 수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터진 웅덩이라고 한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어리석은 사람들이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을 우상과 바꾸고, 하나님을 떠나고, 하나님을 버리고는 헛된 것들을 의지합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생수의 근원이십니다. 우리들이 목이 마를 때 그분은 강물이 없고 두레박이 없어도 반석을 쳐서 물을 내어 마시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생수의 근원이십니다. 세상의 물 즉, 명예, , 쾌락 등은 먹고 또 먹어도 목마르지만 주님께서 주시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샘물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세상을 의지하고 사람을 의지하며 우상숭배하는 자들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터진 웅덩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웅덩이를 파고 그곳에 물(, 명예, 건강 등)을 모아 두고 평안해 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터진 웅덩이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너무 많은 물을 모아두지 마시기 바랍니다. 많이 모아둔 물은 신앙의 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왕정을 말씀하실 때 돈을 많이 쌓아 두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쌓아놓은 것이 많으면 더 이상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그것을 힘 삼으려는 어리석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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