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소서

141-9

 

헤밍웨이는 미국이 자랑하는 대문호입니다. 그는 1,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때를 지나며 40여 년간 작품 활동을 하였습니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은 무기여 잘 있거나, 노인과 바다그리고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등입니다. 그 중에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라는 영화는 2차 대전이 한창일 때 썼던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영화로도 제작되었는데 그 주인공인 로베르토는 미국인으로서 학원 강사를 그만 두고 스페인 내전에 자원하여 참전하였습니다. 아마도 미국이 세계 대전에 참여한 것을 비유하여 말하고 싶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여하튼 로베르토는 스페인에서 교량폭파의 임무를 완수하고 죽게 되는데 그 과정 중에 만나서 사랑하게 되었던 마리아와의 이별이 있습니다. 그가 죽음을 앞두고 기관총을 난사할 때 종이 울리게 되는데 이 일을 통해 누구를 위해 전쟁에 참여하고 누구를 위해 희생하느냐? 는 질문을 던집니다. 로베르토는 자유와 평화를 위해 참전했지만 결국은 한 여인을 위해 종을 울린 것입니다. 생뚱맞게 말씀을 전하면서 헤밍웨이의 작품이야기를 한 것은 주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서 일하시는데 그 일하심은 누구를 위하여, 누구 때문에 하는가? 라는 질문 때문입니다.

 

오늘 이 질문을 하면서 본문을 함께 보고 주의 일하심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가뭄에 대하여 예레미야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이 가뭄은 여호야김 때에 있었던 가뭄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뭄으로 고통을 당할 때, 이러한 때에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이 가뭄으로 인하여 많은 고통을 당했습니다. 가뭄은 히브리어로 밧초레트라고 합니다. 이 뜻은 부족, 가뭄, 결핍입니다. 이스라엘은 일차적으로 물이 없음으로 인해 토지소산이 없는 기근을 겪었습니다. 동시에 그들은 영적인 가뭄으로 인해 영적인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가뭄은 가뭄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 가뭄은 다음 단계를 예고하면서 회개를 촉구하는 도구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 장에는 칼과, 기근이라는 말이 6번이나 나옵니다. 이렇게 칼과 기근이라는 말을 여러 번이나 반복하는 이유는 가뭄, “전쟁을 들어 심판하기에 앞서 기근을 통해 회개를 촉구하는 하나님의 경고의 언어였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육적인 가뭄은 그것을 통해 영적인 가뭄을 지적하시며 회개를 촉구하고 있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 가뭄으로 인해 이들은 심한 고통을 겪었는데 이를 아주 자세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2절부터 6절까지 같이 읽겠습니다.

유다가 슬퍼하며 성문의 무리가 피곤하여 땅 위에서 애통하니 예루살렘의 부르짖음이 위로 오르도다 귀인들은 자기 사환들을 보내어 물을 얻으려 하였으나 그들이 우물에 갔어도 물을 얻지 못하여 빈 그릇으로 돌아오니 부끄럽고 근심하여 그들의 머리를 가리며 땅에 비가 없어 지면이 갈라지니 밭 가는 자가 부끄러워서 그의 머리를 가리는도다 들의 암사슴은 새끼를 낳아도 풀이 없으므로 내버리며 들 나귀들은 벗은 산 위에 서서 승냥이 같이 헐떡이며 풀이 없으므로 눈이 흐려지는도다

 

이 가뭄으로 인해 당하는 고통에 대해 본문에서 아주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먼저는 성문의 무리가 피곤해 하고 있습니다. 이는 성문의 무리가 의미하는 바는 그 성의 지도자들이라는 말인데 이는 일반백성들 뿐 아니라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는 백성의 장로들까지도 고통을 당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또한 귀인들이 사람을 보내어 물을 얻으려 했으나 어찌 못했다고 하여 돈과 권력으로도 구할 수 없는 상황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상황을 더 자세히 묘사하기를 암사슴은 새끼를 낳아도 풀이 없으므로 새끼를 버릴 정도라고 하고 있는데 암사슴은 모성애가 강한 동물로 알려져 있는데 그 암사슴도 새끼를 버릴 수밖에 없는 고통을 표현하고 있고 더위를 잘 버티는 들 나귀도 풀이 없어 기운을 잃어버렸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이 기근으로 심한 고난을 겪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사람들과 짐승들의 두 부류를 각각 언급하며 두 번씩 말씀하신 이유는 그 고통이 극심함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이 가뭄으로 당한 고난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슬퍼하며 피곤하여 애통하니 부르짖음이 위로 올랐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을 비롯한 모든 나라와 지역은 가뭄이나 자연재해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당했던 가뭄은 단지 가뭄 자체가 아니라 그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향해 말씀하시길 원하시며 원하는 바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시는 통로인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 때에는 기근을 통해 그들을 믿음의 사람으로 만드셨고 룻기에 배경이 되는 가뭄은 그 일로 인해 모압 여인 룻이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고 그를 통해 다윗의 계보를 잇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또한 학개서에서는 기근을 통해 성전건축을 재개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아모스서에 등장하는 기근은 죄에서 돌이키라는 하나님의 음성으로서의 역할을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가뭄이 등장한 이유는 하나님을 버리고 죄 된 길로 빠르게 행하는 이스라엘을 향해 주께로 돌아오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담긴 것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에도 영육 간에 가뭄이 발생합니다. 그 가뭄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통로입니다. 그러기에 그 가뭄의 때에 하나님의 음성을 바르게 알아듣고 주님의 의도를 깨달아 그 길로 행한다면 그것은 재앙이 아니라 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호세아서 215절에서는 가뭄과 같은 아골 골짜기도 그곳에서 하나님과 만나고 그분의 소리를 듣는다면 그곳은 소망의 문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인생길에서 종종 만나는 가뭄의 때를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으로 삼는 지혜 있는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런데 왜 가뭄이 벌어지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에 고통이 심한 가뭄이 주어진 원인은 무엇일까요? 본문에서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0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이 백성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그들이 어그러진 길을 사랑하여 그들의 발을 멈추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받지 아니하고 이제 그들의 죄를 기억하시고 그 죄를 벌하시리라 하시고

 

이스라엘에 가뭄이 발생한 이유를 하나님은 우리가 말하는 것처럼 온난화가 어쩌고 하면서 자연현상에서 찾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위에서 찾고 계십니다. 먼저는 이스라엘이 어그러진 길을 사랑했다고 합니다.

어그러진에 해당하는 누아라는 히브리어는 흔들리다, 방황하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본문은 하나님을 의뢰하지도 순종하지도 않고 헛된 것에 자신을 내맡기는 변덕스러움을 지적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역사적으로 자신들의 필요를 따라 하나님과 우상을 바꾸어가며 섬겼습니다. 사사기도 그러하고 분열왕국 시기 내내 그러했습니다. 고난이 닥치면 하나님을 섬기다가 그것이 사라지고 평안해 지면 곧 우상과 세상을 섬기는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오늘 본문에서 그들이 어그러진 길을 사랑하였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할 때마다 그들에게 여러 가지 소리로 멈추라고 외쳤으나 그들은 오늘 본문 말씀대로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자들을 유다는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따라 멸망을 받았도다”(11)라고 하고 있습니다.

 

사실 지혜로운 백성이라면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의 행위가 얼마나 어리석은지 알 수 있습니다. 위기가 닥쳐올수록 이사야서 3015절에서 너희가 돌이켜 조용히 있어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라고 했던 말씀처럼 잠잠하고 여호와를 신뢰해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백성들은 정반대로 행동하였기에 재앙을 맞게 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바라기는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우리는 어그러진 길로 가던 길에서 돌이켜 바르게 행하는 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뭄의 재앙을 당하게 된 두 번째 이유는 거짓 거짓선지자의 예언과 그것은 듣고 행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 때문입니다.

13절부터 16절까지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이에 내가 말하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시옵소서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칼을 보지 아니하겠고 기근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이 곳에서 너희에게 확실한 평강을 주리라 하나이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선지자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 예언을 하도다 나는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고 그들에게 명령하거나 이르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이 거짓 계시와 점술과 헛된 것과 자기 마음의 거짓으로 너희에게 예언하는도다 그러므로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내 이름으로 예언하여 이르기를 칼과 기근이 이 땅에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는 선지자들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노라 그 선지자들은 칼과 기근에 멸망할 것이요 그들의 예언을 받은 백성은 기근과 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거리에 던짐을 당할 것인즉 그들을 장사할 자가 없을 것이요 그들의 아내와 아들과 딸이 그렇게 되리니 이는 내가 그들의 악을 그 위에 부음이니라

 

가뭄의 두 번째 원인이 되는 선지자의 거짓 예언과 그것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야 말로 가장 근본적인 문제였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말로 그들을 속였습니다. 그들은 예언하기를 칼과 기근이 이 땅에 이르지 아니하리라 이곳에 확실한 평강을 주리라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거짓이었습니다. 선지자는 그들의 죄를 지적해 주어야 했습니다. 입술에 발린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그것이 바르지 않은 것은 바르지 않다고 해 주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것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이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어떻게, 그리고 왜 그렇게 외친 것일까요?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그렇게 살았고 자신들의 마음에서 원하는 대로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묻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단지 자신들의 육적 생각에서 나온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지금도 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난무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자신의 마음에서 나오는 대로 말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성도의 죄를 보면서도 애써 못 본 척합니다. 아니 못 본 척하는 것은 그래도 예쁘게 봐 줄 수 있습니다. 바르지 않은데 잘 될 것이라고만 말해주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들은 성도를 죽게 하는 것이고 자신도 그들과 함께 망하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당장 눈앞에 이익을 위해 미래에 닥칠 재앙에 눈감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 땅의 사역자들이 이렇게 된 것일까요? 그것은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서로 이 땅의 가치관에 물들었고 그것이 주는 유익을 위해 서로 묵인 하에 언약했기 때문입니다. 목회자는 성도의 죄를 지적하지 않고 눈감아주고 성도는 그 대가로 교회에 남아주겠다는 묵인 말입니다. 정말 건전한 관계는 목회자는 성도의 죄를 지적해 주고 성도는 그것을 기쁘게 받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성도와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칭찬만으로 기록한 성경이 데살로니가전서입니다. 바울을 데살로니가교회의 믿음을 칭찬하면서 그들이 그렇게 훌륭한 믿음을 가지게 된 것의 이유로 너희는 많은 환란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다”(1:6)라고 하였습니다. 환란 중에도 말씀을 기쁨으로 받았기 때문이라고 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여러분의 죄를 보고 눈감지 않는 목사가 되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여러분에게 미움을 사도 여러분에게 바른 말씀을 전하는 목사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해 주십시오. 저도 기도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책망의 말씀도 달게 받아 하나님의 사람으로 설 수 있게 되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강단에서만 말고 강단에서 내려가 여러분과 개인적으로 만났을 때도 동일한 자세로 대하기를 바랄뿐입니다.

 

예레미야는 이러한 이유로 그 백성을 위해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그러기에 그의 별명이 눈물의 선지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그 백성을 위해 기도하지 말라고 하고 있습니다.

11절과 1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복을 구하지 말라 그들이 금식할지라도 내가 그 부르짖음을 듣지 아니하겠고 번제와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그것을 받지 아니할 뿐 아니라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내가 그들을 멸하리라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기도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금식하고 부르짖어도 듣지 않겠고 번제와 소제를 드려도 듣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도리어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멸해 버리시겠다고 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그들이 너무 오랫동안 하나님을 만홀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너무 많이 그리고 오랫동안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 앞에 나갔습니다. 가끔 하나님께 돌아왔으나 진심으로 돌이키지 않고 재물과 평안한 삶을 구할 때만 돌아왔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를 듣지 않겠다고 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듣지 않으셨다고 그들을 아주 버리신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그들을 더 이상 악한 자의 삶에 내어버려 둘 수 없었기에 잠시 환란과 재앙에 내어 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간을 통해 그들의 죄악이 끊어지고 하나님과 더 깊은 인격적 관계를 맺기를 원하시기에 힘든 침묵과 아픈 외면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행하실 때 이스라엘은 고통이겠으나 하나님보다 더 하진 않습니다. 당신의 자녀, 당신의 사랑인 이스라엘을 환란 가운데 내어주는 하나님은 더 힘든 것입니다. 마치 부모가 아픈 자식 앞에서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이 대신 아파주기를 바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들의 죄로 인해 심판을 선고받은 자신과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예레미야의 기도가 있습니다.

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여 우리의 죄악이 우리에게 대하여 증언할지라도 주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소서 우리의 타락함이 많으니이다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나이다

 

21절도 같이 읽겠습니다.

주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미워하지 마옵소서 주의 영광의 보좌를 욕되게 마옵소서 주께서 우리와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시고 폐하지 마옵소서

 

본문을 자세히 보면 이스라엘의 죄를 지적하면서 예레미야는 우리라고 거듭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죄악과 형벌에서 자신도 자유하지 않다는 고백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은 민족의 죄 앞에서 자신의 죄로 여겨 회개했습니다. 에스라 선지자는 백성들이 이방인과 결혼하여 사는 것을 보고 자신의 죄로 여겨 회개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분은 바로 우리 주 예수님이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하늘보좌 버리시고 사람의 모양으로 오셔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예레미야는 이렇게 우리의 죄라고 하며 우리를 용서해 달라고 하고 그 근거로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소서라고 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용서의 근거를 자신들의 돌이키는 행위나 대단한 공로에서 찾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 주의 이름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위해 일하고 주의 이름이 욕되지 않게 일하시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주의 이름을 위해 일하라고 하는 말은 예레미야만 한 것은 아닙니다. 이사야를 비롯한 그 외의 선지자들도 용서와 회복의 근거로 주님의 이름을 위해 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중보는 모세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시내산에 머물 때 모세는 율법을 받기 위해 시내산에 올랐고 그 백성들은 그 기간을 기다리지 못해 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자신들을 인도해 내신 하나님이라고 섬기며 뛰놀 때 하나님은 그들을 멸하려 했으나 모세가 주의 이름을 위하여 주의 백성을 멸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32:12)

 

하나님은 우리가 온전히 돌이켰거나 하나님의 백성으로 온전해 졌기 때문에 용서하시거나 회복시키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차원에서 이사야는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 불에서 택하였노라”(48:10)라고 하셨고 이어서 11절에서 하신 말씀이 나는 나를 위하며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용서하시고 회복시키십니다. 그 근거는 우리가 아니라 우리를 자신의 백성으로 만드신 당신의 이름 때문입니다. 그래서 9절에서 여호와여 주는 그래도 우리 가운데 계시고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이오니 우리를 버리지 마옵소서라고 한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당당하게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고 하고 있는 이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레미야가 우리를 용서해 달라는 근거로서 첫 번째가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소서라고 했고 두 번째로 방금 말씀드렸던 우리는 주의 백성이기 때문이라고 했다면 마지막은 언약을 기억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미 읽었던 21절을 보면 주께서 우리와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시고 폐하지 마옵소서라고 하고 있는 구절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기도할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문구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하나님을 일컬어 언약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바로 언약하신 하나님은 반드시 그 언약을 지키신다는 의미입니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벽이 불타고 성읍 백성들이 고통당하는 것을 알고 하나님께 금식하며 기도하며 회복을 요구했던 기도가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1:5)라고 하였고 만일 내게로 돌아와 내 계명을 지켜 행하면 너희 쫓긴 자가 하늘 끝에 있을지라도 내가 거기서부터 그들을 모아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에 돌아오게 하리라 하신 말씀을 이제 청하건대 기억하옵소서”(1:9)라고 한 것입니다.

 

이러한 확신은 우리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합니다. 성도로서 죄에 넘어지지 않는 것이 가장 아름다고 바람직한 모습이나 우리는 이 땅에서 자주 넘어지는 존재라 사탄의 참소에서 자유하지 못합니다. 뿐만 아니라 종종 자신의 구원을 자신의 행위에서 찾으려는 어리석은 생각이 들어 자신과 같은 존재가 어떻게 구원을 받겠느냐고 할 때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통해 약속하신 완전한 용서와 구원의 은혜에 대한 확신을 잃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사도 바울은 사형언도를 받은 상황 속에서도 이 믿음이 절대로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디모데후서 112절에서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것을 확신함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지금까지 보았던 주의 이름을 위하여 주의 백성인 우리를 주께서 언약하신 것을 기억하여 용서하시고 구원해 달라고 한 예레미야는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더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백성들과 그의 고백입니다.

22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이방인의 우상 가운데 능히 비를 내리게 할 자가 있나이까 하늘이 능히 소나기를 내릴 수 있으리이까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그리하는 자는 주가 아니시니이까 그러므로 우리가 주를 앙망하옵는 것은 주께서 이 모든 것을 만드셨음이니이다 하니라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기에 비를 내리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라고 하며 그러기에 하나님을 앙망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앙망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카와인데 이는 기대하다. 바라다, 소망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앙망해야 하는 이는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생수의 근원(1:13)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4:14)라고 하였고 백성들을 향해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7:37,38)라고 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언제든지 어떤 상황이든지, 무슨 일을 행했어도 또한 어떤 환란과 고난의 때에든지, 형벌의 때에나 재난의 때에든지 언제든지 하나님께 나아갑시다. 그분은 가뭄의 때에 우리에게 비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왜입니까? 우리가 완전해서가 아니라 주의 이름을 위해서 일하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있어서 이 사실은 피할 수도, 부인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런 주님께 언제든지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10:35)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담대함이란 환란과 박해 속에서도 예수님의 보혈의 피로 완전한 용서를 받았다는 확신과 그것에 근거하여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는 담대함이라는 믿음입니다.

 

우리를 아들의 피로 사서 당신의 백성을 삼으신 주님은 언제든지 당신의 이름을 위해 일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사탄의 참소를 받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고 쭈뼛거리는 어리석음을 버리고 언제든지 돌이켜 하나님께 나아가 용서의 은혜를 입고 기쁨을 회복하는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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