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딜 수 없나이다.
예레미야 20장 14-18절
예레미야의 심판 설교는 듣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불편함을 주었습니다. 당연한 것은 잘 된다거나 바벨론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으니 힘을 내라는 등의 설교가 아니라 심판과 재앙에 대해 말하였기 때문입니다. 18장과 19장에서 계속된 토기장이의 주권과 토기의 깨어짐을 통해 하나님께서 복주시기로 했던 이스라엘의 죄가 극에 달하였기에 토기를 깨뜨리듯이 예루살렘을 깨뜨릴 것을 말씀했으니 그것을 들은 사람들이 예레미야를 가만 두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그를 가두고 때리며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말라고 강요했습니다. 그러기에 예레미야는 너무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런 고통스러운 예레미야의 탄식이 오늘의 본문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이 시대 주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에게 위로와 힘이 공급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으로 읽은 14절부터 보면 예레미야는 자신의 태어남을 저주하고 있습니다. 14절부터 18절까지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내 생일이 저주를 받았더면, 나의 어머니가 나를 낳던 날이 복이 없었더면 나의 아버지에게 소식을 전하여 이르기를 당신이 득남하였다 하여 아버지를 즐겁게 하던 자가 저주를 받았더면 그 사람은 여호와께서 무너뜨리시고 후회하지 아니하신 성읍 같이 되었더면, 그가 아침에는 부르짖는 소리, 낮에는 떠드는 소리를 듣게 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나니 이는 그가 나를 태에서 죽이지 아니하셨으며 나의 어머니를 내 무덤이 되지 않게 하셨으며 그의 배가 부른 채로 항상 있지 않게 하신 까닭이로다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나와서 고생과 슬픔을 보며 나의 날을 부끄러움으로 보내는고 하니라”
이 본문을 현대어 성경은 좀 더 이해하기 쉽게 번역했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태어난 날이 저주스럽구나. 내 어머니가 나를 낳던 그 날이 복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내 아버지에게 '아들이야, 아들! 자네에게 아들이 생겼어!' 하고 기쁜 소식을 전하여 아버지를 즐겁게 하던 자가 저주스럽구나. 그 사람이 여호와께서 사정없이 무너뜨린 성처럼 되었더라면, 그가 아침에는 부르짖는 소리를, 낮에는 전쟁의 함성을 들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어째서 그가 나를 태에서 죽이지 않았는가? 내가 어머니 뱃속에서 죽었더라면, 그것이 나의 무덤이 되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내가 무엇 때문에 태에서 나와 이런 고생과 슬픔을 겪으며 수치 가운데서 나날을 보내는가?“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태어남을 저주한 사람이 또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욥이 그 주인공입니다. 그는 하루아침에 자녀와 재산을 모두 잃어버렸고 몸은 병이 들었으며 인생에서 마지막 위로자인 아내마저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는 말을 남기고 떠나 고통이 극에 달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도 자신의 태생을 저주했는데 본문의 예레미야와 같습니다.
그도 스스로를 저주하기를 “내가 난 날이 멸망하였더라면, 사내 아이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더라면, 그 날이 캄캄하였더라면, 하나님이 위에서 돌아보지 않으셨더라면, 빛도 그 날을 비추지 않았더라면, 어둠과 죽음의 그늘이 그 날을 자기의 것이라 주장하였더라면, 구름이 그 위에 덮였더라면, 흑암이 그 날을 덮었더라면, 그 밤이 캄캄한 어둠에 잡혔더라면, 해의 날 수와 달의 수에 들지 않았더라면, 그 밤에 자식을 배지 못하였더라면, 그 밤에 즐거운 소리가 나지 않았더라면, 날을 저주하는 자들 곧 리워야단을 격동시키기에 익숙한 자들이 그 밤을 저주하였더라면, 그 밤에 새벽 별들이 어두웠더라면, 그 밤이 광명을 바랄지라도 얻지 못하며 동틈을 보지 못하였더라면 좋았을 것을, 이는 내 모태의 문을 닫지 아니하여 내 눈으로 환난을 보게 하였음이로구나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내 어머니가 해산할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무릎이 나를 받았던가 어찌하여 내가 젖을 빨았던가 그렇지 아니하였던들 이제는 내가 평안히 누워서 자고 쉬었을 것이다”(욥3:3-13)라고 하였습니다.
예레미야도 욥도 자신이 당하는 고통이 너무나 컸기에 자신이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겠다고 말합니다. 심지어는 자신이 태어나지 않도록 전쟁이 일어났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하며 나아가 뱃속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욥은 자신의 신상의 문제로 인해 고통을 당했다면 예레미야는 주의 말씀을 전하다가 핍박을 받으므로 고통을 당하였고 그 결과 자신의 태생을 저주하였던 것입니다.
욥은 그렇다 치고 사명자 예레미야는 왜 이렇게 힘들어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당연히 그가 당하는 박해가 견딜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웠기 때문입니다.
1절과 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임멜의 아들 제사장 바스훌은 여호와의 성전의 총감독이라 그가 예레미야의 이 일 예언함을 들은지라 이에 바스훌이 선지자 예레미야를 때리고 여호와의 성전에 있는 베냐민 문 위층에 목에 씌우는 나무 고랑으로 채워 두었더니”
예레미야가 백성의 어른들과 제사장의 어른들을 데리고 힌놈의 아들 골짜기로 가서 토기를 깨뜨리며 심판에 대해 한 말로 인하여 바스훌이라는 사람이 예레미야를 가두고 때렸습니다. 그는 성전의 총감독이었습니다. 성전의 질서를 관장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신분의 바스훌은 여호와의 집 뜰에서, 총감독인 자기 허락도 없이 감히 성전을 강도의 굴혈이라고 설교했던 것도 참을 수가 없었는데 그것도 모자라 제사장의 어른들을 책망한 예레미야를 더 이상 그냥 둘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잡아다가 때리고 다시는 그런 말을 못하게 하는 것은 자신의 당연한 임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좀 더 바스훌에 대해 생각해 보면 그를 임멜의 아들이라고 본문을 말하고 있습니다. 임멜은 다윗이 제사장들을 24반차로 나누어 성전을 섬기게 할 때 15번째 반차를 맡았던 자였는데 바스훌의 조상이 되는 자였습니다(대상 24:14). 그도 제사장이었기에 같은 제사장이었던 예레미야에 대한 존중이 있어야 함에도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레미야를 때리고 목에 나무로 만든 고랑을 채워 제사장들을 비롯하여 사람들이 드나들던 베냐민 문에 묶어 두어 치욕스럽게 하였습니다. 그 문은 성전의 북쪽에 위치하여 있었습니다. 그 문은 예루살렘 성과 성전 사이를 드나드는 통용문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 문을 지나는 제사장들이나 백성들이 예레미야를 모두 보았습니다.
예레미야를 이렇게 때리고 묶어둔 것은 바스훌 혼자 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전의 총감독이라도 어떤 제사장에게 징계를 하려면 하기 전에 반드시 대제사장과 다른 제사장들의 협의가 있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예레미야를 때린 것은 바스훌이었으나 그 뒤에는 제사장들의 협의나 묵인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예레미야를 때리고 모욕을 준 이유는 예레미야가 예언할지라도 그 예언이 사람들에게 중시되어지지 않게 하려는 속셈이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이 사건은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바스훌은 성전의 총감독이었지만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열방의 감독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성전의 감독관이 감히 열방의 감독관의 감독과 책망을 멸시하고 그것도 모자라 때리기까지 한 것입니다.
지금도 복음을 전하며 주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자들을 세상은 때리고 모욕을 줍니다. 그래서 다시는 복음을 전하거나 죄를 책망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세상은 협력하여 성도를 핍박하고 모욕하여 성도들이 말씀을 전하며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것을 막습니다.
나아가 성도가 전하는 말씀에 대해 중요하게 여기지 않게 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세상이 교회를 향하여 하는 비난을 듣고 교회의 초정에 응하려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응했던 사람들도 세상의 눈치를 보며 세상으로 나아가는 갑니다. 사탄이 원하는 것이 이것이고 이것이 현실인 것입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을 그렇게 되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렇게 매를 맞고 고랑에 채워져 밤새도록 있다가 아침을 맞은 예레미야에게 바스훌이 나아와 풀어주었습니다. 이 때 예레미야는 그에게 묶여있는 동안 여호와께서 주셨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3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다음날 바스훌이 예레미야를 목에 씌우는 나무 고랑에서 풀어 주매 예레미야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네 이름을 바스훌이라 아니하시고 마골밋사빕이라 하시느니라”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바스훌의 이름을 바꾸어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골밋사빕이라고 말입니다. 원래 바스훌의 이름의 뜻은 “자유”였는데 “두려움이 사방이 있다”는 뜻의 “마골밋사빕”이라고 바꾸어 주신 것입니다. 이 마골밋사빕이란 말은 6장 25절에서 이미 한 번 언급했었습니다. 기록되기를 “너희는 밭에도 나가지 말라 길로도 다니지 말라 원수의 칼이 있고 사방에 두려움이 있음이라”고 했는데 여기에서 “사방에 두려움”이라고 한 구절입니다. 이것처럼 예언하지 말라며 때리고 고랑에 채운 바스훌의 사방에 두려움이 있게 될 것을 예언해 주신 것입니다.
앞으로 바스훌은 바뀐 이름 마골밋사빕이 실현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인데 그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4절부터 6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너로 너와 네 모든 친구에게 두려움이 되게 하리니 그들이 그들의 원수들의 칼에 엎드러질 것이요 네 눈은 그것을 볼 것이며 내가 온 유다를 바벨론 왕의 손에 넘기리니 그가 그들을 사로잡아 바벨론으로 옮겨 칼로 죽이리라 내가 또 이 성읍의 모든 부와 그 모든 소득과 그 모든 귀중품과 유다 왕들의 모든 보물을 그 원수의 손에 넘기리니 그들이 그것을 탈취하여 바벨론으로 가져가리라 바스훌아 너와 네 집에 사는 모는 사람이 포로 되어 옮겨지리니 네가 바벨론에 이르러 거기서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너와 너의 거짓 예언을 들은 네 모든 친구도 그와 같으리라 하셨느니라”
심판에 대해 부정하고 대항했던 바스훌에게 그 심판을 당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말을 들은 모든 친구들도 그러하겠다고 했는데 여기서 들은 친구들이란 그 말을 듣고 동조했던 모든 사람을 가리킵니다. 대제사장과 제사장들, 백성의 어른들과 그 백성들을 모두 포함한 말입니다. 정말로 그들은 바벨론의 칼과 전염병으로 죽고 남은 자들은 포로로 끌려가 노역 중에 죽었습니다.
말씀을 농담으로 여겼던 롯의 두 사윗감도 소돔과 고모라가 심판을 받을 때 함께 죽었습니다. 사마리아성이 아람에 의해 포위되어 식량사정이 비참하게 되었을 때 엘리사는 자신을 잡으러 온 장관에게 내일이면 좋은 곡식이 넘쳐나 헐값에 팔릴 것이라고 예언했으나 그 장관을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왕하7:2)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엘리야는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고 예언했는데 말씀대로 “백성이 성문에서 그를 밟아 죽이고”(왕하7:20)말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20절에서 “예언을 멸시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교만하여져 성전에서 분향하려했던 웃시야왕도 제사장들의 목숨을 건 만류를 뿌리치고 분향하였다가 이마에 문둥병이 들어 별궁에 거하다 죽어 열조의 묘에도 묻히지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제자들이 전하는 말씀 듣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 성읍에서는 저주하여 심판을 받게 하겠다는 뜻으로 발에 먼지를 털어버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자세로 신앙생활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귀가 닫히면 그것은 단순히 못 듣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심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이 구했던 “듣는 마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바라기는 주님의 말씀이 언제나 천둥소리처럼 크게 들려 옳지 않은 길에서는 돌이키고 낙심한 가운데서는 새 힘을 얻으며 이미 바르게 행하고 있는 삶은 더 큰 힘을 얻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레미야는 바스훌에게 풀려나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토해 냈습니다.
7절과 8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 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파멸과 멸망을 선포하므로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 거리가 됨이니이다”
예레미야는 자신이 선지자로 부름 받은 것을 표현하기를 “주께서 나를 권유”하였기에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예레미야가 표현한 권유하였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파타”라는 말입니다. 이는 “유혹하다, 속이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성적으로 유혹하는 것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공동번역성경은 7절을 “야훼여, 저는 어수룩하게도 주님의 꾐에 넘어갔습니다. 주님의 억지에 말려들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웃음거리가 되고 모든 사람에게 놀림감이 되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선지자로 부르실 때부터 속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처음 선지자로 부르실 때 살구나무 환상을 통해서 자신을 지켜 보호해 주실 것이라고 하셨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5장 18절에서는 하나님을 가리켜 “속이는 시내”라고 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은 주님 때문에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을 당하는 자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전에 자신의 삶을 계속해서 살고 있었다면 당하지 않아도 될 것들을 8절의 말씀처럼 “말할 때마다 외치며 파멸과 멸망을 선포하므로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당하고 있다고 하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지금 하나님께서 하게 하시는 사역과 자신이 원하는 평안한 삶이 병행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현실을 그렇지 못했습니다. 말씀을 선포하자니 고통이 따르고, 하지 않자니 하나님의 강력한 이끄심을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고민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사도바울은 “무릇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3:12)라고 하여 성도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분명하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종종 하나님께 대하여 이런 심정일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모든 것이 형통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고 하나님께서 도우실 것이기 때문에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현실을 그렇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고 씨름합니다. 저도 고등학교 때 소명을 받고 신학을 시작했지만 거듭되는 어려움으로 인해 본서의 예레미야처럼 하나님과 씨름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바울의 말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백성의 삶을 포기하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성도가 넘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고 넘어졌을 때 완전히 짓밟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10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나는 무리의 비방과 사방이 두려워함을 들었나이다 그들이 이르기를 고소하라 우리도 고소하리라 하오며 내 친한 벗도 다 내가 실족하기를 기다리며 그가 혹시 유혹을 받게 되면 우리가 그를 이기어 우리 원수를 갚자 하나이다”
예레미야는 바스훌이 마골밋사빕 즉, 두려움이 사방이 있는 상태가 아니라 자신이 두려움이 사방에 있는 상태 즉, 현재 자신의 상태가 마골밋사빕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이 자신을 비방하고 죽이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이 마골밋사빕이란 말은 바스훌에게 붙여준 이름이었지만, 이제 예레미야의 별명이 되었습니다. 그 대적들은 예레미야에게서 흠을 찾아 고소하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 예레미야로서는 두려워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레미야가 유혹에 넘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치 덫을 놓은 후에 짐승이 잡히기를 기다리는 사냥꾼 같은 것입니다. 완전하지 못한 인간이었던 예레미야는 그들에게 흠이라도 잡혀 고발을 당할까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이는 마치 예수님에게서 흠을 찾아 고발하기 위해 달려들었던 유대 지도자 같았었습니다.
새번역성경은 주변 사람들이 예레미야가 넘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에 대해 “나와 친하던 사람들도 모두 내가 넘어지기만을 기다립니다. '혹시 그가 실수를 하기라도 하면, 우리가 그를 덮치고 그에게 보복을 하자' 합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현대어 성경은 좀 더 과격하게 번역했습니다. 번역하기를 “사람들이 모여서 수군거립니다. '저자야말로 사면초가다. 고발하자, 고발하자.' 저와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도 모두 제가 망하기를 바라 모의합니다. '걸어 넘어뜨리고 잡아 족치자. 앙갚음을 하자.'”라고 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예레미야에게 책망을 받은 것을 겸손하게 받지 못하고 예레미야의 흠을 찾아 고소하여 다시는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세상은 교회의 작은 흠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교회답지 못한 면이 있기에 당연하다고 할 수 있지만 누군가는 그것만을 찾아 언론에 대대적으로 흘리므로 교회에 심각한 타격을 주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어제 인터넷에 “대형교회목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제목의 글이 있었습니다. 그 글 중에 교회가 세상에 욕을 먹고 있지만 사실 교회는 아주 많은 일을 하고 있다는 차원의 변론도 하고 있습니다.
그 글에서 교회를 변호하기를 “헤이그 밀사 사건과 3·1 운동, 국채보상운동, 물산장려운동 등을 주도한 사람들은 대부분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리고 현재 한국 교회는 사회복지 민간 부문 70~80%를 감당하고 있고, 각종 기부와 자원봉사에 가장 열심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많은 일을 하고 있음에도 교회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때로는 과장되고 왜곡 돼 전파됨으로 심각한 타격을 입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제 교회 내에서의 모습을 봅시다. 교회 내에서 성도는 말씀을 듣고 자신 속에 죄를 보고 하나님 앞에서 어찌할까를 고민하는 것이 바른 성도의 자세입니다. 전한 자에게 분을 내며 “나도 너의 흠을 찾아내어 다시는 내게 그런 소리를 못하게 하겠다”고 이를 갈면 안 되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은 말씀을 통해 말씀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을 겸손히 받는 자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이렇게 심한 어려움 속에서 탄식하며 기도하는 예레미야의 고민과 갈등이 본문에 있습니다.
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며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예레미야는 고통으로 인하여 다시는 여호와의 말씀을 선포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당연한 것은 연약한 인간으로서 감당할 수 없는 무게의 사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내면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예레미야는 말씀을 전하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으며 괴로워서 견딜 수 없다고 하고 있습니다. 고백하기를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며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여기서 “답답하여”라는 말은 히브리어 “라아”입니다. 이 뜻은 “피로하다, 지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답답하다”란 말은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된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한편 사도 바울도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다”(고전 9:16)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오늘날 성도들도 이와 같이 탄식하며 사명을 감당합니다. 때로는 고만하고 싶고, 때로는 세상의 방식대로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우리 속에서 꿈틀거리는 복음에 대한 열정과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가 세워지는 것에 대한 강력한 열망이 있습니다. 이 열망으로 복음을 전하거나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것이 우리들인 것입니다.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인간은 이 땅에 사는 동안 모두 “마골밋사빕”, 두려움이 사방에 있는 상태의 삶입니다. 믿지 않는 자들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심판의 두려움이라는 마골밋사빕이, 믿는 자들에게는 믿음으로 인해 받는 박해의 두려움이라는 마골밋사빕이 있습니다. 이 둘 중 소망이 있는 두려움 즉, 마골밋사빕은 믿는 자로서 당하는 마골밋사빕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제목처럼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으로 경건하게 살고자 할 때 당하는 핍박과 어려움이 때로는 견딜 없을 만큼 힘이 듭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속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넉넉히 주의 백성으로서의 삶과 사명을 감당하며 사는 자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