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과 염소는 웬수?
이스라엘의 유대 광야를 생각하면 양떼가 떠오릅니다. 그곳에서 작은 길들이 무수하게 나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모두 양들이 줄을 지어 간 흔적들입니다. 이렇게 목자를 따르는 양떼를 보면 그 광야도 그리 거칠게만 보이지 않습니다. 그곳에 가서 살라고 하면 고민이 되겠지만 그 풍경만 놓고 보면 나름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풍경이기도 합니다. 이런 양떼를 자세히 주의하여 보면 양떼 속에 양만 있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양떼 속에 염소들이 섞여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양을 칠 때 양과 염소를 섞여 키웠습니다. 대략 7대 3정도로 섞어 키우는데 그것은 양떼를 위하여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에는 양과 염소에 대한 오해가 있습니다. 양을 좋고, 염소는 나쁘다고 생각하죠. 교회 내에 염소 같은 성도들이 있어 성도들을 들이받고 괴롭힌다고 말들을 합니다. 하지만 각각의 특징이 있을 뿐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둘을 모두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 증거로 제사제도에는 두 짐승 모두 거룩한 동물로 구별되었습니다. 심지어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1년에 한번 대속하는 대속죄일에 드리는 짐승은 두 마리의 염소였습니다. 양과 염소는 서로 갈등하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 공생하는 관계인 것입니다.
양과 염소를 섞어 키워야 하는 이유 중 첫 번째는 양떼만을 키우면 땅이 황폐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양은 풀을 먹을 때 줄기까지 먹습니다. 심지어는 뿌리까지 캐먹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렇게 모든 것을 먹어치우기에 다음 해에는 초장에 풀이 나질 않게 됩니다. 그런데 염소를 함께 키우면 염소의 습성을 양이 따라하게 되어 초장을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게 됩니다. 염소는 풀잎만을 뜯어먹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 옮겼다가 오면 다시 풀이 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양들은 염소가 풀을 뜯는 모습을 보고 자신들도 따라 하기에 초장이 보존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양의 게으름 때문입니다. 양들은 풀을 배부르게 뜯게 되면 움직이지 않고 자리에 눕는 습성이 있습니다. 이렇게 먹고 자고를 반복한 양은 비대해지는데 잘못해서 그 몸으로 움푹한 곳에 누웠다가는 일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마치 거북이가 뒤집혀 허우적거리듯 양도 비슷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런데 이 때 양이 너무 긴장하면 복부에는 가스가 차오르게 되고 혈액순환이 잘 되질 않아 다리까지 혈액이 공급되지 못합니다. 그 영향으로 다리는 마비가 일어납니다. 이 상태로 오래 있게 되면 스스로 죽든지 포식자들에게 잡혀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염소를 함께 섞여 키우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염소들로 인해 누워있지 못하게 되고 결국 건강을 유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염소를 섞어 키우는 이유는 겁 많은 양의 습성 때문입니다. 양들은 겁이 많아 험한 길과 높은 바위 앞에서 주저하게 되는데 이러한 곳을 지날 때 염소가 중요한 역할을 감당합니다. 유대의 목자가 양들을 이끌 때 평탄한 길로만 인도할 수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거칠고 위험한 길을 갈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는데 이 때 겁 없는 염소가 앞서 가면 양들을 그 뒤를 따르게 됩니다. 또한 물가로 인도해 물을 먹일 때도 염소의 역할이 있습니다. 양들은 겁이 많아 바람 때문에 물살이 흔들려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움직이기라도 하면 놀라서 어쩔 줄 모릅니다. 이 때도 염소의 담대한 태도는 양들을 안정시키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이렇게 낮 동안에 함께 방목하다가 밤이 되면 목자는 이 두 그룹을 나누었습니다. 염소는 추위를 타는 짐승이라 굴 안쪽으로, 양은 더위에 약하기에 굴 입구에 재워야 둘 다 잠을 설치지 않습니다. 낮에는 뜨거운 태양을 견디지 못하는 양들은 더위에 강한 염소의 배 밑으로 머리를 쳐 박고 더위를 피하였습니다. 교회 안에 순종적이지만 욕심 많고 게으르며 겁 많은 양 같은 성도들도 있고 때로는 베드로처럼 나대다가 실수도 하고 겁 없이 큰일을 계획하고 추진하는 염소 같은 성도들이 있어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기왕 말이 나왔으니 양들의 특징 몇 가지만 더 나누겠습니다. 양들이 초장에 누울 수 있는 조건이 있습니다. 다윗은 시편 23편에서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고”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양으로, 하나님을 목자로 비유하여 노래하고 있는데 목자이신 하나님께서 양인 자신을 눕게 해주신다고 하고 있습니다. 눕게 해 주신다는 것이 강제로 누워있게 하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목자가 양이 누울 수 있도록 해 준다는 말은 양의 염려하는 습성 때문에 나온 말인데 양을 당장 먹고 배가 부르다고 눕지 않습니다. 누워 한숨 자고 일어 난 후에도 먹을 것이 있어야 누울 수 있습니다. 만약 먹을 것이 없다면 양들은 당장 배부른 것은 안중에도 없고 오직 나중에 먹을 것이 없다는 것으로 인해 평안히 눕지 못합니다. 이는 마치 우리가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고 당장 내 눈에 무엇인가 보이지 않거나 오늘은 평안한데 내일이 어찌될지 몰라 불안해하는 우리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또한 양은 시력이 아주 좋지 못합니다. 양의 시력은 -0.7 정도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1m 앞에 있는 사물도 제대로 구별할 줄 모릅니다. 그래서 목자는 자신에 뒤를 따라오는 양의 목에 방울을 달아 뒤에 따라오는 양들이 그 소리를 듣고 따라오게 했습니다. 양은 이 외에도 방향감각이 없습니다. 생각해 보면 양처럼 부실하게 태어난 짐승도 없습니다. 꾀도 없고, 힘도 없고, 방향감각도, 좋은 시력도, 날카로운 이빨이나 발톱도, 들이받을 뾰족한 뿔도 없습니다. 거기다 자신을 숨길 줄도 모르고 안짱다리는 빨리 뛰지 못하고 후각이 발달하지 않아 독초도 구별하지 목하여 목자가 초장의 독초를 제거하지 않으면 그것을 먹고 심각한 상태에 이르기까지 합니다. 우리 성도들이 양과 어찌 그리도 비슷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러기에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따라가지 않으면 길을 잃고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이제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만을 따르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